지난화


프롤로그






조선은 국교로서 유학을, 정확하게는 유학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국시로 삼아 세워진 국가이다.
유학은 과거 춘추전국시대 공자가 만들어낸 철학으로서 국가와 사람이 응당 따라야 할 자세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로서 동양은 서양보다 이른 시기에 중앙집권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공자는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고, 그에 따라 유학을 따르는 이들은 무교(巫敎)와 불교등의 괴력난신을 따르는 이들을 교화할 대상으로 삼았다. 비록 하늘을 공공연히 언급하는 모습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의 상황을 보면 상당히 무신론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다른 종교들, 예로 불교를 탄압할 지언정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가 기독교와 이슬람교. 카톨릭과 개신교로 갈라진 것 처럼 무자비한 유혈사태로까지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았다. 유학자들에게 미신을 믿는 이들은 교화되어야할 대상이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이었지 국가의 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44년 11월. 4군 6진은 어느정도 완성되어갔고, 두만강과 압록강이라는 자연 국경선은 시각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양측의 백성들이 인정할만한 국경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여진족과 국경지대의 사람들은 때로는 무역을 하거나 친조선계 여진 부족이 상납품을 바치거나 했지만, 때로는 식량이 떨어진 여진 유목민들이 국경을 약탈하고 식량을 빼앗아가는 상황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국경의 관찰사들은 기꺼이 병사들을 일으켜 여진의 부락들을 불살라서 그들을 쫓아내거나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유목민과 국경이 접한 국가라면 당연한 연례행사처럼 일어나는 일일 뿐, 전쟁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도'가 내린 전쟁에 대한 대비는 많은 신하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아직 본격적인 동원을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이 도'의 지시는 분명하게 머지 않아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삼남도에 쏟을 국방비를 줄여 북방 요충지의 요새를 정비하게 하거나 혹은 병사들을 모집하게 하는 일은 여진족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하는데 충분했다.

하지만 4군 6진을 설치하는 데에도 대명의 의심을 무마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이보다 더 국경을 확장하려 한다면 당연히 대명의 경고를 받게 될 것이다.
그것도 사신단이 아닌 대명의 황제인 정통제의 이름으로 말이다.


다만 당장 눈에 보이는 조선군을 축소시키는 행보를 보임으로서 이 북방 국방비 증가는 그저 여진족의 남침을 경계하기 위함이라는 식으로 설득을 할 뿐이었다.
조정 내부의 균열을 그정도로 그쳤지만, 대명의 사신단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을 것이라는게 문제였다. 그들은 그저 조선으로 부터 돈을 뜯어낼 핑계거리를 하나 찾아냈을 뿐이니까.




'이 도'는 사람을 보내 지방의 여러 상인과 접촉하기 시작했는데, 사농공상의 정책을 선택한 조선으로서 계급의 최상위에 위치한 국왕이 직업으로서 최하위에 위치한 상업에 종사하는 자와 접촉하는 것이 알려진다면 곤란하게 될 것이므로 이는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이 사실을 아는 사관은 그가 비밀을 유지하게 할 것을 강요하였으므로, '이 도'의 이러한 선택은 오직 실록에만 적히게 될 터였다.





상인들은 '이 도'의 지시를 받들어 대형 상선 등을 아시카가 막부와 관동의 다이묘들에게 팔아치웠다. 이 배는 민간선박이 대부분이었지만 조선 조정 소유인 관선들 또한 적당히 섞여 있었고, 이 모든 배들을 상인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팔아치우는 형태를 띄었다.


조정으로 부터 내려온 지시를 받고 팔아치우는 것이지만, 그들은 조정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배를 팔아치우라고 지시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일단 일이 잘 못 된다면 조정에서 보상을 해 주겠다고 보증해 주기는 했지만 불안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


물론 조정으로부터 목줄이 풀어진 상인이라고 한들 팔아치우는 즉시 왜구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 예상되는 관서지방의 다이묘에게 배를 파는 상인은 없었다.





돈 맛을 본 상인들은 당장 자신들의 목을 노리고 돌아올 왜구들에게 배를 팔지는 않았지만, 자신들과 상관없고 돈을 주는 자라면 동남아시아의 필리핀까지 내려가서 배를 파는 일을 계속했다.


이 수익은 대부분 조선의 조정으로 돌아갔고, 이는 왕실의 내탕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왕의 이러한 독주에 불안을 품은 대소신료들은 모두 말은 안하고 있지만 과거 태조와 태종의 시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절대 왕권을 위하여 권신들의 목이 마치 허수아비 잘려나가던 그 시절을 말이다. 당장 이 대국에서 대신들과 척을 질 생각은 없었던 '이 도'는 겉으로나마 그들의 권위를 살려주기 위해서 6조 직계제 대신 영의정 제도를 채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장 대신들에게 힘을 돌려주는 것 처럼 보이기는 하겠지만 실제로는 힘은 왕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상이 될 것이다.





사신단이 오는 행렬에 맞추어 간자를 대명에 파견했다. 그들은 중원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조선에 전할 것이며 조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알려주게 될 것이다.
사신단의 분주한 행렬으로 인해 국경의 감시가 느슨해진날 밤. 그들은 양국의 국경 경비대가 술에 취해 골아떨어진 틈을 타서 압록강을 도하하였다.





대명의 사신단은 조정의 예상대로 조선의 북방경계 강화와 중원의 음운학자들이 조선 왕의 사람들과 자주 접촉한 것을 명분으로 과거 고구려 시절의 이야기까지 꺼내가며 조정을 압박했고, 정통제의 호주머니에 들어가지 않을 재화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어느때보다도 더 심해진 그들의 행패는 사관이 사족으로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고 적을 정도로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짐승을 연상케 하였다.


만약 정통제가 정상적으로 즉위하여 환관의 위세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면 이런 짓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었지만, 만약의 이야기를 해도 의미가 없었다.


사신단의 경로에 있는 백성들과 관리들은 겉으로는 그들에게 순종했으나 속으로는 분노를 품기 시작했다. 또한 이 탓에 북방 경계도 상당히 약화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신단이 한양에서 머물 무렵. 조선은 삼남도와 경기도권에 수영들을 설치하고 수군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원래 수영은 세조 시절에나 만들어질 것이었던 만큼 '이 도'의 수영은 그저 원래 존재했던 수군들을 나누어 관리하겠다는 수준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체계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수군의 확장 명분은 왜구가 정직하게 경상도만을 약탈하지 않고 남해와 동해를 우회하여 조선의 해안을 총체적으로 공격할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으나, 대마도 정벌 이후 그 기세가 약화되어가는 왜구가 그러한 시도를 해낼 가능성은 별로 없었지만, 여말선초 왜구의 만행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결정에 뭐라고 하지 못했다.


전라우수영의 병졸들은 함상 포격전 뿐만이 아니라 적의 배에 달라 붙어서 적 수군을 무력화 시키고 배를 빼앗는 훈련도 강도 높게 받기 시작했다.
원래 수군에 배정된 예산만으로는 이 모든 일을 해나갈 수 없었겠지만, 거기에 더해 내탕금의 일부도 사용되어서 간신히 그 훈련비용을 맞출 수 있었다.





전국의 조선소에서 전투용 조운선인 맹선들을 건조를 명하였다. 본격적으로 전투용으로 만들어져 한선의 끝을 보여준 판옥선은 아직 개발조차 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이 배들을 새로 만드는 터라 기존에 관선과 민간선박들이 뒤엉켜 규격이고 뭐고 없었던 조선의 선박 사정에서 벗어나 작정하고 군선을 목적으로 제작될 맹선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한편 조선은 통신사를 보내 기존과는 달리 아시카가와 지속적인 교류를 원한다는 사인을 보냈고, 조선과 관계를 개선하여 나쁠 것이 없었던 아시카가 막부는 기꺼이 조선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대명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쇼군직에 오른 요시마사 아시카가는 사치에 빠져 조선이 이렇게 이례적인 태도로 나오는 것에서 아무런 신호를 잡지 못하였고, 이것이 앞으로의 운명을 정해버렸다.





북방에서 비보가 날아들어왔다. 대명의 사신단이 요구한 대로 북방의 경계에서 힘을 뺀지 얼마 안 되어 엄청난 수의 여진족들이 두만강을 넘어 쳐들어 온 것이다.


많은 읍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식량들을 강탈 당하였다. 두만강 주변의 친 조선계 여진족들이 충격에 빠질 정도의 이 여진족들은 6진을 넘어 강계 인근까지 내려온 다음 다시 강을 넘어 사라져 버렸으며 수령들이 빠르게 대응한 덕에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북방 4도의 주민들을 분노케 하기에는 충분했다.


당장 이 시기에는 고구마도 감자도 없이 기존의 농업방식 만으로 빈곤하게 사는 사람들의 땅이었던 것이다. 당장은 살아남았지만 이래서야 정부의 대규모 식량 지원이 없다면 살아남았다는 희망을 가지기 어려웠다.


이는 조선이 북방 경계에 다시 힘을 쏟을 수 있게 하기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이 정체 불명의 여진족들은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북방 정책에 큰 도움이 된 다음 홀연히 사라져 버렸고, 인근 여진 부락은 그들과의 관계성을 철저하게 부인했다.




이에 '이 도'는 무관들 중에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는 진덕형을 임용하여 전체 육군의 관리를 맞기고 육군의 체질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또한 세자였던 '이 향'을 북방으로 파견하여 민중들을 달래려 하였다. 실제로 그가 할 일은 많지 않았지만 조정에서 세자까지 보내어 위문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조정이 이 일을 가볍게 보지 않을 것이란 신호가 될 것이다.





또한 무과를 한번 더 치뤄서 전국에서 뛰어난 장군을 찾으려 하였다. 이 예외적으로 치뤄진 무과는 문관들의 불평을 사게 될 터였지만, 당장 북방에서 일어난 사달은 그들의 입을 막기에 충분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조선과는 별로 연관이 없는 길림의 여진족들에 사신을 보내어 그들과의 관개를 개선하였다. 명분으로는 이이제이. 조선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그들이 조선을 공격했을 리가 없으므로 그들과 친하여 조선 주변에 있을 그 정체모를 여진족들을 견제하는데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들이 많았지만 당장 전시체제에 들어간 조정에서, 태조와 태종의 기억을 떠올리는 신하들이 정면으로 반박하기에는 목이 아까웠다. 아무리 문을 무기로 쓰는 왕이라고 할 지라도 예외적인 상황에서 예외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 자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렇다고 이게 유학적으로 크게 엇나간 일이냐면 그것도 아니라 애민정신에 기초한 복수전과 방어전인 만큼 명분으로도 크게 밀리진 않았다. 그리고 어중간한 명분으로 '이 도'를 막기에는 조정의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조선이 이렇게 여진족들과의 갈등이 격렬해져가고, 압록-두만강 인근의 여진족들이 진짜로 조선이 칼을 뽑아들었다고 판단하여 빠르게 자진납세하면서 주변 부락들을 팔아먹고 있을 때, 중원에서 변이 생겼다고 간자들이 알려왔다.


오이라트를 위시한 유목 부족들과 대명의 무역에서 발생한 갈등으로 대명의 환관이자 간신배인 왕진이 유목민들과의 무역을 제한하고, 이에 오이라트에서 에센 타이시가 군사를 일으켜 산시성을 공격하여 대동이 함락되자 왕진이 정통제를 농락하여 황제 친정으로서 오이라트와의 전쟁에 돌입하였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의 신하들을 이 사태로서 조선이 여진인들에게 조선의 영향력을 투사하기 절호의 기회라 여기기 시작했으나, '이 도'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토목의 변으로 대명은 황제가 사로잡히고 북경에서 공성전이 벌어지는 치명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었다. 이에 남경으로의 천도까지 진지하게 논의될 상황으로 몰렸으나 경태제의 옹립과 오이라트의 전술 실패로 최후의 북경 공략에 실패하고 오이라트는 초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만약, 대명이 가장 어려운 이 시기에 조선이 이 전쟁의 원인을 대명에게 있다고 선언하고 그들의 천명을 부정하게 된다면. 정통제가 사로잡히는 그 순간 조선군이 대명의 외통수를 쳐서 북경을 공성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반도와 중원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으로 비화될 것이 분명했다. 대명이 찢어지든 조선이 대명령 조선반도가 되든, 둘 중 하나가 될 공산이 컸고, 후자의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지금 이렇게 하는 것 말고 다른 수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명은, 중원 천자의 존재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조선의 선택지를 압도적으로 제약하고 있었기에, 조선이 살아남으려면 대명은 죽어야만 한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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