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단 자체는 전쟁 초기부터 폭탄을 두들겨 맞았지만, 정작 공방전 자체는 11월 3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기존 계획에서 크게 변경되었다.
본래 이라크 군은 아바단을 신속하게 점령하여 사트 알 아랍을 완전히 자신의 손에 넣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호람샤르 전투에서 지나치게 시간을 끌어버린 탓에 이라크는 아바단을 점령하는 것이 아닌,
아바단에 주둔하고 있는 이란군을 포위하여 본토에서 격리시키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한다.
어찌됬던 이라크 군이 11월 3일 아바단에 도착하였으나, 도착하기가 무섭게 이란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고는 퇴각하였다.
이에 이라크 군은 4500의 병력과 200대의 전차를 증파하였고, 도시는 이란 혁명 수비대의 응전에도 불구하고 포위되었다.
그러나 이라크군의 공세는 거기까지였다. 포위는 가능하였지만, 도시를 함락시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였다.
호람샤르가 이라크 군에게 신명나게 두들겨 맞는 동안 아바단은 도시 방어에 충분한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란군의 상황이 좋다는 이야기는 결단코 아니었다. 삼면으로 포위된 도시의 유일한 보급로는 야음을 틈탄 수상운송, 그리고 헬리콥터였다.
때문에 이란은 이라크의 철통 같은 포위를 풀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과감하게 결단내린다.
그리고 이것이 이란-이라크 전쟁 최대의 기갑전이라 평가되는 작전명 나스르다.
※작전명 나스르(승리)
이 작전은 꽤나 특이하게도 기존에 이란 정규군과 혁명수비대가 혼재되었던 여러 전투와는 달리 철저하게 이란 정규군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어째서냐면 이란 정규군과 이란 혁명 수비대는 골 때리게도 최고 책임자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란 육군의 (형식상)최고통수권자는 이란의 대통령이었던 아볼하산 바니사드르, 혁명수비대는 총리이자 이란 문화혁명의 총책임자였던 모하마드 알리 라자였다.
이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아볼하산 바니사드르
후대에 세속주의의 마지막 수호자라 평가되었던 인물과.
이란 문화혁명의 총책임자였던 모하마드 알리 라자이 총리.
이 둘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설명이 필요한가?
당시 바니사드르는 라자이 총리로 대표되는 이슬람 공화국당(IRP)와 치열한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쟁 속에서 대통령은 정규군을, IRP는 혁명 수비대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바니사드르가 혁명 수비대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작전이 성공할 경우의 공로를 독식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무려 330대의 전차를 모았다.
그리고 그 모두 세계적인 기준에서 보면 유행의 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M60과 치프틴 전차였다.
이라크의 숫적 주력이 T-62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것이었다.
작전 목표는 후제스탄을 회복하고 아바단의 포위를 풀며 이라크 육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다는 것이었다.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는 제 13 기갑사단, 제 92 기갑사단, 제 55 공수여단으로 총 3개 부대.
구체적인 내용은 먼저 카르케 강을 횡단한 후, 앤딤식, 수산게르드와 아바즈의 포위를 돌파한 뒤, 카룬 강 서안을 따라 아바단 북쪽으로 진공하면
거기에 발을 맞춰 아바단에 포위되어 있던 군대가 진출하여 이라크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류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인 천왕성 작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성공만 한다면 이라크 육군을 공중분해 시킬 수도 있었다.
다만 이 작전에 따르는 난제가 한 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 이란군의 발목을 잡았다.
첫번째 이유로 이 작전이 좀 지나치게 원대했다는 점이었다.
저 검은 선이 예상 진공로였는데, 저런 식으로 나간다면 아바단의 이라크 군을 포위섬멸한다는 건 그야말로 헛소리에 불과하였다.
당장 엔딤식, 데즈풀, 수상게르드, 아바즈에 주둔한 이라크 군과 전투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 모두를 승리한다 하더라도,
아바단에 도착했을 때 이란군이 공세종말점을 한참은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그게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 작전을 수행할 장교진들이 하나같이 개판 of 개판이었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고위장교들의 대부분은 처형되거나, 수감되거나, 해외로 도망쳤고
남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제병협동 작전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무엇보다 기동작전은 샤가 다스리던 시절에도 이란군의 고질적인 약점으로 손꼽혔는데, 그 때보다 더 나빠진 상황에선 오죽하겠는가.
세번째로 전차를 호위할 보병병력이 태부족이었다.
기존 이란의 보병사단은 혁명을 거치면서 대부분 해체되었고, 그 빈 자리를 혁명수비대가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 작전은 바니사드르가 정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총리가 지지하는 혁명수비대를 빼버렸다고 앞서 설명한바 있다.
때문에 제 55 공수 여단이 전차를 호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네번째로 그 전차 수도 적었다.
물론 작전에 동원된 전차는 총 330대였기에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방어측에 대한 공자의 병력 비율 1:3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렇다면 헬기를 동원하면 되지 않겠느냐 묻겠지만….
저 정신 나간 거리를 어떻게 헬기가 호위하겠는가.
마지막으로 지형이 이라크 군에게 너무 유리했다.
기본적으로 방어자 입장이었거니와 데즈풀과 수상게르드 사이는 늪지대였다.
때문에 이란군의 기동로는 포장도로로 제한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나 잡아잡슈라는 소리나 진베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이란군에게는 불가능한 헬기 지원을 무제한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란군 내에서도 반발이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작전은 1981년 1월 5일 강행되었다.
300여대의 전차가 카르케 강을 도강하는 것 자체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어진 엔딤식 전투에서도 이라크 군은 기습적인 대규모 기갑부대의 공격에 기겁하고는 즉각적으로 퇴각하였다.
무엇보다 수산게르드를 탈환함으로써 이란군의 승리가 가까워진 듯 했다.
그러나 이란군의 성공은 거기까지였다. 이라크의 정찰기가 포장도로에서 일렬로 기동하는 이란군을 포착한 것이다.
이라크 군은 이란군의 대규모 공세에 발빠르게 대응하였다.
이라크 군은 먼저 수산게르드 남쪽에 군을 집결시키고는 늪지에 포탑만 남기고는 T-62의 차체를 파묻어버렸다.
그리고는 부대에 명을 내려 이란군을 유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군을 철수시키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란군은 정찰 소흘로 인해 이러한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1월 6일 이는 대재앙으로 이란군에게 다가온다.
1월 6일. 이란군의 행렬이 이라크의 화망에 제대로 걸려들었고, 욤 키부르 이후 최대의 기갑전, 아니 학살이 전개되었다.
이라크의 T-62는 도로 양면에서 이란군의 행렬을 향해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고, 이란의 전차들은 제대로 된 반격도 못하고 녹아내렸다.
몇몇 전차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하는 식으로 적에게 돌격하였으나 비가 내려 질척해진 땅으로 인해 진격은 돈좌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서 고철이 되었다.
이미 작전 성공은 쓰레기 통으로 들어갔으나 이란군은 어떻게든 적을 돌파하기 위해 후속부대를 투입했다. 물론 결과는 똑같았다.
이란 육군 항공대는 자살행위임을 알면서도 아군에게 쏟아지는 적의 화망을 어떻게든 줄여보기 위해 출격하여 적 전차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던 것은 이라크 군의 맨패즈와 이라크 공군이었고 그렇게 코브라는 우수수 떨어졌다.
결국 이란군은 작전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음을 인정하고는 이란군에 총퇴각을 명령하였으나 이라크 공군은 이미 카르케 강의 부교를 끊어버린 뒤였다.
이란 공병의 필사적인 사투 끝에 부교가 복구되었고, 남은 이란군은 간신히 강을 건너 퇴각하였다.
이 상황에서 이라크 군의 단점이 드러났는데, 이라크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완전히 전멸시킬 수 있었음에도
중앙에서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격을 멈췄다.
그러나 전후결과를 보면 완전히 전멸되지 않은 결과가 이 정도였다.
작전에 동원된 330대의 전차 중 214대가 파괴 혹은 노획되었으며 수많은 공격헬기가 격추되었다.
이란군은 400명이 전사했다고 하였지만, 여기서는 이라크 군의 주장인 엄청난 손실을 믿는게 좋을 것이다.
반면에 이라크의 손해는 경이적일 정도로 적었으니 45대의 전차, 50대의 IFV, 4대의 헬리콥터를 손실하였고
44명(이라크 주장이긴 한데 차량 손실을 보면 딱 봐도 구라)이 전사하였다.
무엇보다 이라크는 서구와 걸프왕정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저정도 손해는 충분히 벌충할 수 있었지만,
기갑전력의 13%를 날려먹은 이란은 서구권과 동구권의 위 아더 월드 경제제재로 보충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이 작전의 실패로 바니사드르의 정치 인생은 쫑나버렸다.
그의 국민적 지지도는 시궁창에 쳐박혔고 이란군의 위상 역시 골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의 정적이었던 IRP와 라자이 총리는 정확히 이 때를 노리고 그를 탄핵하였으며,
의외로 둘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호메이니는 마침내 라자이의 손을 들었다.
그의 탄핵은 그나마 형식적으로 지켜지던 이란 민주주의의 종말을 의미하였으며,
종전에 이르기까지 7년간 이란은 IRP가 다스리는 일당독재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바니사드르가 축출되면서 이란의 정치투쟁은 막을 내렸다.
IRP의 통치 아래 이란군과 혁명수비대는 드디어 지휘권이 일원화 되었다.
드디어 이란군의 대반격을 위한 첫 번째 발자국을 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아바단은 포위 상태에 있었다.
개추
결과적으로 호메이니 좋은일 해준거네...
호메이니 병신새끼 숙청좀 제대로 하지
저딴 새끼에게 권좌빼앗긴 샤한샤가 더 병신새끼가 아닐까요?
팩트)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