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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자신들이 가진 성곽에 대해서 개수 및 개량을 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음

특히 수성전 중심의 전략 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더더욱 개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남한산성이 있었고, 남한산성은 수성전 중심 전략과 조선이 새롭게 대량으로 배치하기 시작한 화기 사용 개념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주요 요새 중 하나였다.

조선 측은 임진왜란 당시 기존의 요새들이 너무 쉽게 함락당했다는 전훈과 새로운 화약 병기의 도입으로 인한 일련의 군사적 변화를 받아들여 일본과 명나라의 축성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1606년 함경감사 이시발이 함흥읍성을 축성하면서 이러한 방어시설들을 부분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함. 

남한산성에도 부분적으로 시설이 일부 도입되었음. 무엇보다도 험준한 지형에 맞춰서 높은 성벽과 성문, 여장이 설치되면서 방어력을 최대한 높히는 쪽으로 갔지만 아직까지는 과도기적인 모습이 강했다. 포루나 옹성, 치성 등의 방어 시설은 추가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여진이 화기를 제대로 보유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

또한 남부의 일본군 역시 화포 운용을 잘 하지 못한다는 점 역시 한 몫을 했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청군과 교전을 할 때 조선군 포병들이 포루가 없어서 우마장에 화포를 배치하여 포격을 했다.

물론 여진이 청으로 국명을 개칭하고, 홍이포 등 대형화포류를 입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이 때문에 조선의 성곽은 고도로 강화되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됨.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한산성이 홍이포에 맞았다고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해당 요새야 조선에서도 1티어급 요새였으니 다른 요새들은 자칫하다가 그냥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던 모양.

청군도 청군 나름대로 고충을 겪었는데, 수성전에 있어서 조선군은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였고 특히 정묘호란에서 있었던 공성전-시가전을 거치면서 조선군의 저항이 맹렬하자 수성 병력이 적어도 함부로 때리지 말자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남한산성과 주요 요새들에 대한 보수 및 개축에 대해서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서 사사건건 방해를 해댔음.

오죽하면 병자호란 직후 남한산성을 보수하자 청 사신단이 길길이 날뛰면서 보수한 부분을 전부 허물라고 했을 정도이니 이 친구들도 화기로 단단히 무장된 요새 공략의 어려움을 확실하게 인지한 모양.

청 제국이 중원을 완전히 제압했고, 이후 조선이 청에 조총을 충분히 공여해주면서 이러한 제한 조치는 풀리긴 했다. 본격적으로 조선의 주요 요새들이 제대로 개축되는 것은 숙종 대부터인데, 관방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사업이 시작되었고 이 때 주요 요새들에 대한 개량이 시작됨.

또한 돌로 만든 석성들이 과연 대형화 되는 화포들의 포격에 제대로 견딜 수 있느냐, 라는 의문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어떠한 방식의 축성 방법이 화포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연구는 매우 활발하게 일어났고, 18세기 조선에서는 벽돌과 흙으로 된 성벽이 석성보다 포격을 잘 견딘다는 점을 인지하게 됨. 따라서 직접 성벽에 화포를 쏴서 내구력을 시험을 했음.

실제로 영조 19년에 강화도의 한 토성에서 시험을 해본 결과 기존의 석성보다 벽돌과 흙이 혼재된 성벽이 포격에 더 잘 견딘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후 북방 주요 방어라인의 성을 이렇게 개축시킴. 18세기에 들어서서 여러 성들은 이러한 기법으로 건설된 요새였고 그만큼 단단한 내구도를 갖게 됨.

화포로 성벽을 무너뜨리기 어려웠던 점은 조선이 주적으로 상정한 청군도 마찬가지였음. 1771년~1776년에 벌어진 금주 묘족의 대반란 사건 때 청군은 돌과 흙으로 구축한 성벽과 엄폐물을 활용하여 방어전을 벌이는 묘족 반군을 상대로 대규모 포병대를 투입했으나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

이러한 축성 방식의 변화는 화포를 중심으로 한 공성전에 대비한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이며 실제로 홍경래의 난 당시 정주성에 틀어박힌 반군을 상대로 진압군이 화포를 사용하여 제압을 하고자 했으나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방어력 하나는 확실하게 증명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괜히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인 땅굴을 활용하여 화약 1,800근을 묻고 성곽 밑을 터뜨려버려서 구멍을 내는 것을 선택한 게 아니지. 조선 후기의 축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가 가능한데, "화기 사용에 친화적이며, 대형 화포에 대한 충분한 방호력을 갖춘 축성 기법을 사용했다."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음.


출처

조선후기 조선군의 화기운용과 남한산성, 박재광
別破陣과 조선후기 大砲 운용, 李在廷
19세기 화약무기 발달과 騎兵의 변화, 최형국
17, 18세기 조선의 청 군사 기술 수용, 강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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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진의 대두 이후의 성문화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