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국은 현도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약수가 있으며, 땅의 둘레가 2천 리인데, 호(戶)는 8만이고,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있으며, 땅은 5곡에 마땅하다.


(중략)


무제(서진 무제) 때에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太康) 6년(285) 때에 모용외(慕容廆)에게 습파(襲破)당한 바가 되어, 그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였고, (의려의)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지켰다. 황제가 조를 내리기를, "부여왕은 세세로 충효를 지켜 왔는데, 못된 오랑캐들에게 멸망당한 바가 되었으니 심히 가엾게 생각한다. 만일 그 남은 무리 중에 족히 나라를 회복할 자라면, 마땅히 이를 위해 방계를 세우고, (나라를) 존립(存立)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하지 않아 빠르게 대처함을 잃었다 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듬해(286),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감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금 남은 사람[見人]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옛 나라를 회복할 것을 구하며, 이에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감은 상열(上列)하고, 독우(督郵) 가심(賈沈)을 보내 군사로서 (부여 사람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모용외[廆] 또한 길에서 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감과 더불어 싸웠다가 크게 패하였다. 모용외의 무리가 물러나자 의라는 다시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에 늘 모영외가 그 종인(種人)들을 노략질하고는, 중국에 팔았다. 황제가 이를 가엾게 여기니, 또 조를 내려 관청의 재물로써 (팔려온 부여 사람들을) 속환하게 하였고,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부여의 인구의 거래를 금하였다.



진서 동이전 부여조


번역 출처: https://blog.naver.com/superman2208/220243399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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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부여가 모용외에게 털리자, 서진 무제(사마염)께서 호동이교위 선우영이 부여를 구하지 않았다고 파면하고

2. 모용외로부터 부여를 구하여 나라를 회복시키고

3.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중국으로 인신매매 당한 부여인들을 속환시킴








조선에게 만력제가 있다면, 부여에겐 염사마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