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전간기


지난주에는 봉천의 장쑤 침공과 우페이푸의 권력 회복을 보았습니다.


1927년 3월에 조인된 산해관 휴전이 오래가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후의 몇달간은 일련의 통합과 재편과 재무장의 일련이 일어나며 중국과 열강들은 작년의 드라마틱한 변화에 적응해갔습니다. 전쟁의 기운이 희미해져갔지만 이 시기의 사건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배권의 통합


독일과 일본이 휴전을 종용한 까닭은 매우 비슷했습니다. 우페이푸의 북 직예 군은 빠른 북진으로 너무 지쳐있었고 남쪽의 쑨촨팡의 남 직예 군은 북벌의 잔당을 쓸어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양쪽 모두 북쪽에서 싸우려고 남쪽을 혼란상태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우페이푸의 드라마티컬한 권력복귀는 추가적인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상관과 부하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할지는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우페이푸는 나이, 정치적 명망, 북경 정부의 점유를 들어 그의 후배의 복종을 요구했지만 쑨촨팡의 군사적 힘과 협력이 되찾은 정권의 유지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의 외교적인 접근이 더해지며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지요.


우페이푸가 추가적인 조계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자 독일인들은 더 수용적인 태도의 쑨촨팡 쪽으로 선회했습니다. 우페이푸는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독일의 물질적 지원으로 입지가 더욱 강해진 쑨촨팡을 처벌할 수는 없었습니다. 독일인들은 그렇게 전체적인 직예 군벌을 약화시키지 않고도 그들이 원하던 조계를 얻는 길을 찾았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상황은 정말로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장쭤린의 장성 남쪽으로의 공격이 만주의 개발을 위협하고 장쭤린이 이미 느슨해진 목줄을 완전히 끊을 것을 걱정했지만 이런 걱정들은 반독일 정서의 물결에 쓸려나가버렸습니다. 독일이 점유한 중국 내 지역들은 산둥 조계지를 탈환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일본의 만주에서의 직위를 직접적으로 위협했습니다. 이미 만주에 대한 위협은 조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본토에 대한 간접적인 위협으로 간주되었기에 일본인들은 빠르게 봉천 군벌을 지원했습니다.



1927년의 상황




새로운 접근


다시 한번 만주에 갇히고 경제는 과부하되고 장성 남부에 믿을만한 동맹이 사라진 장쭤린은 그가 새로운 접근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산해관으로 혼자서 돌격하는 것은 새로운 학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고 산둥의 장쭝창은 고립되어 허약해져갔습니다. 이전에는 이런 종류의 문제는 국민당과 안휘 군벌의 잔존 멤버들과의 동맹으로 해결되었지만 이러한 세력들은 오래전에 패배했고 쑨촨팡은 남쪽으로 자신의 지배권을 확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봉천과 일본은 이전에 없었던 세력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직예 군벌이 중국 본토의 지배권을 확립해나가자 막후전이 시작되어 봉천과 일본의 요원들이 독일과 직예의 요원들과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어디까지가 그 전쟁의 일부였는지는 모호하지만 북부와 중부의 중국에서 수백명의 관료가 뇌물을 받았고, 위협받았고, 암살당했습니다. 음모와 모의의 소문이 퍼지고 진실과 거짓이 섞이며 장군들과 정치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돌아섰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봉천과 일본이 상대적으로 실패했습니다. 몇몇 군벌들이 그들 스스로의 지역 맹주로서의 야망을 지키기 위해 직예가 나뉘길 원하며 봉천에 공감하기는 했지만 저멀리 윈난의 탕지야오만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들이 이용하고자 했던 북직예와 남직예 사이의 균열은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접촉이 나왔습니다.




옌시산, 중립을 깨다


산시성장 옌시산은 걱정이 커져갔습니다. 그는 우페이푸가 베이징을 재탈환하고 직예가 중국 본토를 그 어느때보다 강력하게 지배하게 될 것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10년간 유지되던 산시의 중립은 명백하게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펑위샹의 '국민군'에 피난처를 제공한 일은 여기에 더한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옌시산은 펑위샹의 군을 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쓰고 시의적절한 순간에 적들에게 출격시키려고 했지만 이제는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우페이푸의 베이징에서의 배반으로 그에게 치욕을 안겨주었고 완전한 패배직전에 몰리게 만든 펑위샹에 대한 증오는 막대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옌시산이 장쭤린에게 기울게 만들었고 이 재편성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산시성은 우페이푸의 사령부인 뤄양과 지근거리였고 그 근교에는 중국 서부의 철도 체계의 핵심지인 정저우가 위치해 있었습니다. 장쭝창이 이미 동부의 진포선을 막고 있으니 옌시산이 정저우를 점령한다면 북부와 남부는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쑨촨팡의 증원군은 절대로 우페이푸의 전선에 올수 없을 것이었고 봉천은 산해관을 돌파할 기회를 잡게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 요원들은 옌시산에 접촉했고 그는 핵심적 역할을 맡는데에 동의했습니다.




장쭝창의 난처


한편, 동부의 장쭝창은 난처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산둥에 고립되어서 그의 유일한 식량과 탄약의 출처는 독일 점유하의 칭다오로부터만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농민들로부터 식량을, 지난에서 생산되는 탄약을 징발해왔지만 양쪽 다 지역에 주둔중인 봉천군을 모두 충족시키에는 부족했습니다. 장쭤린의 뛰어난 보급망은 이전까지는 높은 밀도의 병력을 주둔할수 있게 했지만 그게 사라지면서 병력의 밀도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독일인들은 칭다오를 통한 보급품의 이동을 빠르게 알아챘고 장쭝창이 앞으로 전투에 참여한다면 이를 차단할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이 문제에서는 별수가 없었기에 장쭝창은 이를 받아들이고 중립을 약속했습니다.




계획


계획은 중국의 북부와 중부를 연결하는 남북의 진포선과 경한선을 멈춰서 1924년의 우페이푸의 패배의 전략적 요소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남북이 단절되면 봉천군이 다시한번 화북평야를 휩쓸고 이번에는 우페이푸가 회복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입지를 잡게되고 몇년만 더 싸우면 장쭤린은 다시 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봉천에게는 불행하게도 상황은 계획된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봉천의 계획의 종합적인 조망. 주요 철로들이 강조되어있음





맺는 말


여러 사정으로 지난 금요일에는 업데이트를 하지 못했습니다. 또 길이를 생각해본 결과 progress report를 분리해서 minor monday를 내고 금요일에 정상적으로 report가 나갈 것입니다. 전간기는 다른 report에 비해 특별히 흥미있는 시기는 아니지만 여러분이 즐기셨으면 합니다.


Merry Christmas and Happy Holidays,


-Fl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