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1927년의 통합과 재편성에 대해 보았습니다.

상하이 회담

이제 해는 1928년이 되었고 다시한번 연약한 휴전은 종국의 길에 올랐습니다.

1927년 봄부터 이어진 미약한 평화는 양측 모두에서 일련의 통합, 첩보, 재편성을 낳았습니다. 모든 이들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았고 언제 일어날지만이 문제였습니다.

1928년의 전체적인 상황

전쟁재개

그 문제의 답은 3월 초 산시가 청이 불법정부임을 선언하며 나왔습니다.

산시의 전쟁 참여는 놀라운 사건이 될 것으로 계획되어있었습니다. 우페이푸와 이제는 공식적으로는 제국군이 된 직예 군벌에게는 다행이게도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독일의 정보 요원들이 1925년에 이미 일본의 암호를 해독해낸 상태였습니다. 이제 일본과 장쭤린의 계획의 윤곽을 알아낸 우페이푸는 대담하고도 치명적인 일격에 이미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습니다.

봉천의 계획은 동쪽의 진포선과 서쪽의 경한선으로 중국 북부와 중부의 철도의 맥을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들의 점령은 우페이푸의 수치스러웠던 1924년의 패배에 결정적인 일이었고 그 일이 반복된다면 봉천은 중국 북부에서 손쉬운 승리를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봉천의 작전 계획의 단순화된 지도

독일 정보부의 도움으로 상황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우페이푸의 사적인 사령부인 뤄양과 정저우의 철로를 목표로 한 옌시산의 타격부대는 포위되어 소멸했습니다. 더욱 북쪽의 스먼(스좌장)에서 경한선을 끊으려는 시도 역시 실패했습니다. 봉천군이 북동쪽에서 완전히 동원되었을때에는 서쪽에서 벌어진 전쟁은 이미 거의 끝난 상태였습니다.

산둥의 장쭝창 군은 유일한 보급로에 대한 독일의 엄격한 통제에 의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탕지야오의 윈난 군은 남서부의 산맥과 평원에서 진창에 빠져버렸습니다. 산시와 만주에 갇히게 되면서 깜짝 행보는 효과가 없게 되었고 장쭤린과 옌시산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요소를 잡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에 공포에 질렸고 장쭤린에게 추가적인 지원을 보냈습니다. 독일 역시 이에 맞섰습니다. 4월에는 독일 파일럿이 탄 비행기가 베이징 상공에 나타났고 중국 군복을 입은 일본 사단이 산해관을 돌파하기 위한 시도에 나섰습니다. 전쟁을 그들의 측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두 열강은 계속해서 지원 정도를 올렸습니다.

1928년 여름의 상황

옥풍사변

쑨촨팡이 북방의 전쟁에 기여하며 중국 동부에서 대량의 징집이 일어나며 남아있는 군대의 병력의 질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여느 조심스러운 군벌들과 마찬가지로 쑨촨팡은 외부나 내부에서의 예기치 못한 위협에 대한 대비용으로 그의 병력 절반을 예비대로 남겨두었습니다. 허나 우페이푸와의 군벌 내부에서의 경쟁에 혈안이 되었기에 이 예비대는 대부분 주둔용 군대와 이선급 장교들 뿐이었습니다. 거의 훈련되지 않은 그들은 대부분 마적 출신이거나 방랑 용병대 출신이었고(둘 사이의 차이점은 거의 없습니다.) 중국 동부는 무정부 지대가 되었습니다. 진짜 마적, 국민당 잔당, "대도회"가 등장하며 상황은 악화되었죠. 7월이 되자 외국인들은 자주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마적들이 외국인들이 탄 열차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관계 당국에 전해졌습니다. 일본의 반응(최소한 공식적인 반응은)은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외교적, 군사적 연락망은 중국과 본토를 거의 완벽하게 잇고 있었고 상하이의 독일 정보 요원들은 그들이 이에 대해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일본 군이 도쿄의 승인 없이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옥풍여객의 승객들의 "구출 작전"의 일부로 주장하며 일본군은 빠르게 상하이 주변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무장을 가볍게 한 상태이긴 했지만 수시간 내에 놀란 중국과 독일 군은 일본 해병대와 사격전을 치뤘고 양측이 상황에 들어간지 48시간 동안 문제는 더욱더 격해지며 난징, 베를린과 도쿄의 당국자들은 필사적으로 전쟁을 피하는데 노력했습니다.

미국이 중재에 나서며 해결책이 도입되었습니다. 중국의 세력이 중국 어디에서 싸우든간에 상하이 주변 지역에서는 휴전하도록 합의했습니다.

상하이 회담

미국의 중재는 대가를 치뤘습니다. 문호개방정책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독일과 일본이 점차 이를 침해하려 위협해오고 무역을 위해 안정적인 중국을 원했던 미국은 당면한 위기의 해결책을 넘어서 중국을 분열시키는 열강들의 분쟁에 대한 영구적인 해결책을 주장했습니다.

최초의 대화의 결과로 미국 중재하에 중국과 조약을 맺은 모든 해외 열강이 참여하는 회담이 상하이에서 열리게 되었고 주요국은 독일, 일본, 미국이었습니다. 대화는 독일과 일본이 "적법한 영국 정부의 대표성"이 부족함을 들어 캐나다 사절단의 참여를 거부하자 미국 대표 쿠엔틴 루즈벨트가 "입회인 역할"로 참여하게 제안하면서 거의 끝맺게 되었습니다. 회담의 첫 제안자인 워싱턴의 쿠엔틴은 그의 아버지가 30년 전에 했던 것처럼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의 며칠 동안 미국이 모든 나라가 중국과 동등하게 무역할 수 있게 하는 "문호개방정책"을 강하게 주장함에 따라 회담은 중국과 국제 세력들 간의 종합적인 관계 재설정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조계들에 대한 국제적 위임이 결정되었고 이는 더이상의 국제적 고립을 피하고자 했던 일본, 더이상의 중대한 군사적 결정 없이 중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던 독일, 군사적 모험을 원하지 않는 대중의 반발에도 그들의 위치를 지키고자 했던 미국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소위 "공사관 도시"로 칭해지는 새로운 국제 위임령이 이미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공표된 베이징의 공사관 구역을 본따 탄생했고 점차 이전의 상하이의 "국제 거류지"의 확장되고 수정된 형태로 되어갔습니다. 각 도시들은 역사적인 각 국가의 구역을 유지하되 공동 총독이나 지역의 지방자치회에 의해 통치되게 되었고 이론적으로는 각국의 이익을 대표하는 "영사관 의회"에 종속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조약의 핵심은 "중립 지대"의 설정으로 출입 금지 구역으로 정의 될 수 있는 지역으로 새롭게 위임된 해안 주변지역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국제 도시의 안전을 위해 중국의 병사들은 무장하에 그 지역을 지나갈 수 없었으며 군벌들이 도시의 전략적 가치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상하이와 톈진이라는 중심 지대를 점령하지 못하기 된다면 중국의 전쟁은 연료 없는 불꽃과 같이 꺼지게 될 터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열강들은 중국에서 진행 중이던 전쟁을 끝내는 것에 동의했으며 양측이 정전협정을 맺도록 했고 산시와 윈난 군벌은 베이징의 청 정부를 인정했습니다. 봉천 군벌은 예외적으로 정전 협정은 조인했으나 일본의 강요로 청을 적법함을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대로 곧 몰락한 북양 공화정부의 잔존자들로 구성된 경쟁적인 정부를 구성했습니다.

냉각된 분쟁

외부의 관전자에게는 내전의 시대와 열강들의 경쟁기는 친선과 협력으로 종결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표면 아래에서는 독일과 일본 사이의 불신이 커져갈 뿐이었습니다.

이념과 첩보의 잔혹한 전쟁이 상하이의 네온사인과 고대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굽이치는 철도 밑으로 벌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통일을, 다른 이들은 아시아의 형제들을, 또다른 이들은 혁명을 부르짖습니다. 온 중국에서 적개심의 시대는 억눌러진 것일 뿐, 사라지지 않았고 이 깊은 분열은 통일이라는 개념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판돈이 최고조에 달했고 필연적으로 올 다음 전쟁이 일어난다면 중국의 운명은 다시 한번 완전히 결정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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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주간의 여정에 따라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설정 중심의 Progress Reports이며 Minor Monday로는 1928년부터 36년 까지의 우리의 게임 플레이 중심 Progress Reports의 많은 깨알같은 차이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상황을 설명할 것입니다. 또한 Minor Mondays 에 흥미로운 인물들이나 군벌 시대의 사건들도 소개하고 싶지만 시간이 충분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다음에 뵙지요.

-Fl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