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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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반도인과 일본인은 서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위치한 이웃 국가였지만, 민중의 사회상부터 국가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까지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사실상 왕으로서 존재하는 정이대장군과 천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도 국가적 상징물이자 옥새의 역활 밖에 못하는 덴노, 둘로 이루어져 있었고 본격적으로 일본에 대한 간접적 통제가 시작된 이래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조정의 관리는 없었다.
대한의 조정은 굳이 국가의 주권을 쥔 존재를 형식상으로라도 둘로 나누어 통제해야 할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 이해의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낳게 했다.
동군에 의한 합병은 과거 만주를 통합할 때에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서 그 이후 뒤처리에 엄청난 비용과 수고를 들었어야 했던 과거의 실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때 직접적으로 피를 봐 가면서 뒷수습을 했던 관료들은 더 이상 조정에 남아있지 않고 그저 서류에 있는 몇 줄 만으로 상황을 파악한 관료들은 일본을 이런 식으로 통제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천황을 대한의 황가에 편입하여 일본를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여겼고, 이선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일이 커졌다.
그들은 세부의 합병을 예로 들어 이선을 설득했는데, 세부야 사실상 그들의 전토를 대한이 떠먹여 준 것이나 다름 없어 세부의 백성들은 세부의 왕을 따르면서도 세부의 왕을 대한이 파견한 행정관 즈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선양으로 인한 합병에 진실로 저항한 곳은 세부의 수도이자 대한이 개입하기 전에 세부의 모든 국토였었던 작은 섬 하나밖에 없었었다.
그들은 잘못된 형세 판단으로 그들의 휴가와 휴일, 그리고 퇴근시간에 퇴근할 정당한 권리. 그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서류를 스스로 황제에게 들이밀고, 황제에게 도장을 찍도록 권유했다.
한편 중원의 남쪽에서는 대한이 중원의 통일을 반쯤 방기하고 국외의 원정을 계속 이어나가 마치 몽골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바람에 중국의 사대부들의 심경을 거스른 것으로 문제을 앓고 있었다. 대부분은 일을 도모하고자 하나 같이 따라올 자가 없고, 황제가 중원땅이 아닌 한양에 기거하는 바람에 암살도 녹록치 않아 손가락만 빨 뿐이었으나 편입된 지 얼마 안 된 지역에서는 얼마든지 반란을 도모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상황에서 반란을 도모해 봤자 전국적인 반란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짓밟힐 테지만 말이다.
왕실혼을 이용한 통합을 고려했다고 해서 바로 혼인관계가 성립되기엔 장애물도 많고 선례도 얼마 없어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처음은 권력자들에 의한 물밑다툼이 시작되었다.
힘을 가지고 있으나 중원과 일본에 동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어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일본에 대해서는 기존의 다이묘들을 구슬려서 통제하고 있던 대한이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다이묘들에게 대한이 직접적으로 그들에 대한 통제력을 얻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와중 난카이 해곡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일본의 관서와 사국지방에서 남해안에 접한 지역에 막대한 해일 피해가 발생했다. 대한의 조정은 이 비극에 대해 일본의 다이묘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라고 판단하여, 빠르게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인들을 통해 피해 규모를 추산하고 차후에 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해 주고는 대한 상인들로 하여금 대한 조정의 이름으로 구호품을 풀도록 하였다.
이것을 일본의 다이묘들의 협력으로 해결 할 수 있었든 없었든, 대한이 그들에게 지원을 해 줬다는 사실만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조정에서 직접적으로 물자를 지원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판단이 되자 마자 바로 상인들에게 기별을 넣어 협조를 요청했다는 것에서 현재 대한의 정부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 자신은 여전히 대한이 전통적 유학 국가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사회 변화를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낸 것이 1600년 8월 26일 있었던 족보매매 사건이었다. 대한은 양천제였지만 최근의 사회변화, 특히 상인들의 성장으로 인해 사회에 부의 순환이 활성화 되자 천민 역시 기회를 볼 수 있는 눈과 재능, 그리고 운이 따라준다면 적지않은 돈을 벌어 납속면천을 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험난한 바다를 건너 향료를 가져오거나 대한과 중원, 그리고 일본의 산물들을 희망봉 까지 운송해 서역인들에게 팔아치우는 대원정의 경우에는 사실상 살아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납속면천은 기본으로 하고 그 외의 부산물 또한 보장되었었다. 그러던 중 천민 출신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가 막대한 돈을 번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가 단순히 납속을 통한 면천만 했다면 관료들도 별 말 안 했을 텐데, 문제는 그가 면천을 한 이후 재산 운용의 실패로 곤궁한 삶을 살던 양반의 호적을 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연히 이 소식이 알려지자 마자 구 관료계층은 노발대발 하며 그 천민을 체포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일단 유학을 공부한 신흥 관료 계층도 다르지 않았으나, 그들은 구 관료 계층이 주장하는 처벌과 그 후속 조치가 너무 가혹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 이선은 이들의 갈등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으니, 논쟁이 멈추지를 않았다.
조정의 오랜 논쟁 끝에 대신들이 기회만 되면 같은 주제로 계속 떠드는 것에 완전히 질린 이선이 둘의 제안을 절충한 처벌을 명령하면서 상황은 일단 끝나게 되었다. 신흥 관료 계층이야 일단 처벌은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이 만족해 했으나, 그 천민이 면천 된 상태로, 더욱이 호적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관아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말에 구 관료 계층은 그다지 편한 감정을 가지지 못했다.
아무리 그 양반이 제사도 제대로 지내기 힘들 정도로 경제적으로 몰락했다고 해도, 그 천민이 고인을 더 잘 모실수 있다고는 해도 해도 될 일이 있고 하면 안 될 일이 있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구식 관료들도 전대 황제의 신하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신진 관료들과 다를 바가 업었다. 이것은 어느 한 쪽의 문제라기 보다는 미친듯이 시간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대한의 상황에 의한 사회적 문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1601년. 아직까지 대한은 본격적으로 후아이나푸티나 화산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받지는 않았으나, 유럽은 서서히 이상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탓에 구라파에 대한의 상인이 침투할 틈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구라파 상인들의 온갖 방해를 뚫고 구라파에 당도한 대한 상인들은 그곳의 지도를 구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기근이 이번 해에는 대한에까지 영향이 미칠 것 같다는 보고서를 함께 작성하여 보내니 대한의 조정은 바쁘게 기근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다. 이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니 결국에는 조선 초 부터 내려온 환곡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기를 바래야 하겠지만 말이다.
현재 여유가 있는 유럽의 강국들은 모두 서쪽의 대륙을 개척하고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과거의 전쟁 이후 그들의 영토를 대륙과 섬으로 확장하고 서쪽의 대륙 개척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이 두 국가의 사이가 원체 나쁘고, 프랑스는 신대륙 개척에 더해 구라파의 정세에도 깊은 관심을 내 보이고 있어 정신이 없는 상태라고 하였다.
네덜란드라는 국가가 종교의 자유라는 기치를 들고 일어나 그들의 옛 주인에게 반기를 들었고, 지금은 휴전 중이지만 전운이 끊이질 않는다고 하였다. 남쪽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은 아메리카 개척의 첫 발을 끊은 국가 답게 서쪽 대륙 개척에 온 힘을 다하고 있지만 그라나다라는 과거 그 땅에 있었던 회교 국가가 그 땅으로 넘어가 살아남았고, 번성한 탓에 개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나폴리가 이탈리아 통일에 거의 도달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 동쪽으로는 상황이 많이 복잡한데, 보고서를 받아든 예조에서는 보고자의 얼굴과 보고서를 여러번 번갈아 보면서 진심으로, 이걸 사실이라고 보고했냐고 되물었다는 말도 나왔다. 신성로마제국의 보헤미아 왕국이 회교국가인 오스만과 손잡고 헝가리의 뒤통수를 날려버리고 체급이 급격히 올라간 탓에 한때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합스부르크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위에서 끌어내리고 그들 자신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위에 올랐다고 한다.
또한 그들의 체급을 이용하여 고등재판소의 개혁을 강제하였다고 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외부인인 대한의 상인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회교와 동맹하여 기독교 국가의 등에 칼을 찌른 보헤미아는 어떻게 보면 카톨릭의 배신자나 다름없었으나, 어째서인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들은 독실한 카톨릭 교도를 자처하며 제국내에서 부는 종교개혁의 바람을 힘으로 압박하면서 카톨릭 신앙을 강요하고 있다고 한다. 압도적인 체급차이로 신교도들은 눌려서 기회를 살필 수 밖에 없었고, 대다수의 재후들은 보헤미아의 신교도 탄압에 저항할 의지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보헤미아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이 모든 일들은 하면서도 회교도인 오스만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동쪽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러시아가 있었다. 이 두 국가는 사이가 나쁜데다가 러시아의 수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지척에 위치해 있어 이 국가가 있는 한 러시아는 대한에 대해서 함부로 적대적인 행동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첨언이 담겨 있었다. 다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역이 이상하여 예조의 관리가 리투아니아-폴란드가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맞냐고 몇 번을 물어보나, 그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맞다고 하였다.
실로 구라파의 사정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대한은 한반도에서의 기근대비와 동시에 인도네시아에서 향료 재배 이외에 따로 농사를 지을 것을 권하였다. 이를 위해서 보조금 또한 충분히 내 줄수 있음을 시사했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인도네시아의 환경에서는 일년에 삼모작에서 사모작까지 가능하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쌀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브루나이에게 또다시 전쟁을 선언했다. 이것은 보르네오 섬을 완전히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하였지만, 파사이를 노린 것이기도 하다. 파사이는 자신들이 회교도 국가라는 것을 이용하여 저 멀리 구라파에 있는 맘루크와 튀니스와 동맹을 맺어 놓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대한이 천축국으로 가는 항로를 완전히 안정화 시키기 위해서는 파사이가 있는 해협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는데, 파사이를 직접 공격했다가는 대한으로서도 감당하기 힘들만큼 전쟁이 길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브루나이를 공격하면서 파사이와는 싸우고 싶지 않다는 뜻을 표시하며 맘루크와 튀니스가 이번 전쟁에 끼어들 요인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외교적 수완을 다했다.
대한의 조정이 여러곳에서 확장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완전한 자치에 가까운 재량을 부여받은 지방관들은 아무래도 그들 자신이 왕이라도 된 듯이 행동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가진 무력이 형편없고 그들이 그 지역을 통제하는 정당성이 대한 조정으로 부터 나오고 있기 때문에 반기를 들어봤자 제대로 병력도 모으지 못하고 토벌될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만 그들의 오만함은 대한의 유화적인 정책과 전혀 들어맞지 않았고, 이 불협화음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들, 그리고 대한이 일정한 정책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임으로 발생한 우유부단하다는 오해들이 지방과 한반도의 관계를 이간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고받은 이선은 곧장 대신들을 불러 이 상황에 대한 해결책과 동시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요구했으며 또한, 이를 위해서 비용을 아끼지 말 것이라고 덪붙였다.
대신들은 중앙이 손해를 봐야 하기는 하지만 지방관들의 통제를 용이하게 할 정책들을 만들었으며, 이를 황제에게 보여주었다. 이선은 그들이 만들어낸 많은 정책 중에서 필요한 것만을 골라 선택했으니, 이것으로 어쨌든 급한 불은 꺼질 것이다.
한국군이 브루나이의 수도를 공격하고 있는 동안 브루나이군은 산적들이 득실대고 인간에게 적대적인 환경인 남쪽의 정글지역을 이동하여 대한이 소유한 보르네오 섬의 후방을 공격하였다. 다행이 지금 한국군의 보급 거점은 북쪽의 제설톤이었기 때문에 당장은 문제가 없지만, 후방을 공격당했다는 점은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릴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대한의 장군들은 이 사실을 숨기고 적 수도의 공성을 강행하였다.
이개월 후 대한은 브루나이의 수도를 점령하였고, 그 이후 병사들에게 브루나이 군이 대한의 후방을 공격했으며 이를 처리하기 위해 병사들을 둘로 갈라 한쪽은 북쪽으로 다른 한쪽은 개척되지 않은 남쪽을 통해 이동할 것이라 말하였다.
이에 많은 병사들이 혼란스러워 했으나, 이미 그들은 적의 수도가 함락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이후였다. 아무래도 정신적 충격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남쪽을 통해 우회하는 병력을 인솔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지휘관중 한 명을 임시 승진시키기로 했는데 여기에 두용산이 걸렸다.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전투에서 여러가지로 부족한 면을 보여주었지만 행군에 대해서는 정말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적의 숫자가 적고 남쪽으로 내려갈 부대는 본군이 도착할 때 까지 시간만 지역시키면 된다는 시각에서 그 보다 남쪽으로 우회할 군대를 맞길 인재는 없었다.
쿠칭에서 한국군은 브루나이군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달려들어 그들을 격멸하는데 성공했다. 만 삼천명의 적을 분쇄하는데 아군은 이천명 정도가 죽거나 다친 대승이었으며, 이 전투로 사실상 브루나이는 탈락했다고 할 수 있었다.
대하는 그 길로 수군을 불러 파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상륙을 시도했다.
파사이는 북에서 내려온 아유타야에 의해 사실상 패배하고 있었으며 고작해야 해상 봉쇄만을 믿고 대한에게 양도한 도시를 점거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대한은 파사이의 이러한 행보를 용납할 수 없었고, 북쪽의 한인 마을을 탈환하기 위해 한국군을 북상시켰다.
이를 좌시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일단 한국군과 맞붙기는 했으나, 인쇄술의 상용화 이후 기술 발달에 가속도가 붙은 대한의 정병들을 파사이의 군대가 이길 수 없었다.
북부지방에서 파사이의 군대가 패배함으로서 사실상 전쟁은 끝나고 이제 양국은 휴전 협상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한의 외교관에게 영국의 퇴역 장교의 이름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이 퇴역 장교는 나이나 질병, 신체적 손실에 따른 퇴역이 아닌 정치적 이유로 인해서 자신이 퇴역되었음을 알려왔으며,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인해 생계가 매우 어려워졌으며 사실상 영국령 동인도에 고립되었다고 하였다.
그를 고용한다면 저 멀리 구라파의 정세를 현지인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을 수도 있었고, 서구의 병법들 중 쓸만한 것을 가져와서 부족한 부분을 개선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 장교가 요구하는 비용이 막대하여 관료들이 고민하였으나, 이선이 그의 고용에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함으로서 그는 대한의 장교로서 대한의 군사체계를 개선하게 되었다.
물론 영길리는 대한의 이 선택에 불만스러워 했으나, 불만이 있다고 희망봉 항로를 이용하지 않을 것도 아니라서 당장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유럽의 해적이자 인성질 끝판왕인 영길리가 아니었고, 향신료 무역은 곧 돈이 되는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 향료제도에 구라파의 국가들 보다는 직접적으로 행정력을 투사하는 국가와 척을 지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이 은연중의 외교적 마찰과는 별개로 대한의 상인들과 이제 막 인도네시아에 첫 발을 내딛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마찰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회적으로 상인들에 대해 갖는 시각이 다르고, 정부가 상인들과 법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며, 상인들의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네덜란드에 의한 암보니아 학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대한의 상인들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개똥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들기 위한 정성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고, 이는 곧 영국 동인도 회사의 적자로 이어졌다.
더욱이 대한이 브루나이-파사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인해서 말라카 해협의 양 끝의 통제권을 쥐게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하필이면 대한과 아유타야가 동맹 관계에 있는 바람에 이 작은 해협의 출구와 입구가 모두 대한의 영향력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중간에서 어떻게 항로를 우회하든 어디론가 나와야 하는 이상 서양의 상인들은 반드시 대한의 영역에 노출되는 상황이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조정은 구라파의 동인도 회사를 엿먹여보자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파사이의 숨통을 끊기 위해 동맹을 파기시키는 김에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한다는 감각으로 벌인 일이라서 영국 동인도회사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만 브루나이와의 전쟁은 잔당 처리라는 귀찮은 문제 때문에 정체되었다. 대한은 푸아이나푸티나의 분화에 의한 기근의 충격을 환곡제도와 인도네시아와 강남의 우월한 생산력으로 어떻게든 버텨낸 것을 계기로 더욱 많은 식량 생산지를 원하게 되었다. 일년 사모작 같은 것을 한 번 맛본 이상 일년 이모작 정도가 한계인 한반도의 농업 사정이 마음에 찰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가지고 있는 땅에서 농업을 장려하자니 강남에서는 기존의 강남 지주와의 힘싸움 때문에 자원을 끌어오는 것이 힘들었다. 강남 지주는 전통적으로 화북왕조의 통치에 개겨온 것으로 유명했고, 더욱이 대한은 화북왕조 조차도 아닌 한반도 왕조이며 수도도 한반도에 있었다.
그렇다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지금까지의 전비를 충당하고자 상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동안 쓸 만한 땅에는 상업작물이 많이 심어져 더 이상 논 농사를 확장하려 했다가는 상인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여 상인들이 반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이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천축국의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이야기이다. 이를 위해서 히말라야 산맥을 너머 천축국을 공격해야 하는데, 천축의 국가들이 미친놈 아니면 히말라야를 넘어 공격해 들어올 리 없다고 단정할 만큼 험한 산세였다. 물론 어떻게든 바다를 뚫어놓으면 말라카 해협을 통해 대한과 이어지므로 상황은 그나마 나아지지만, 그 다음에 천축에 있는 각 국가들이 뭉쳐 반격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지배적이었다. 다만, 전쟁에서 패한다고 해도, 히말라야 산맥이 오히려 방어막이 되어 천축의 세력이 히말라야 너머로 올 수 없다는 점과 인도 역시 막대한 곡창지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일단 한 번 들이박아보기로 하였다.
동북과 동남을 통틀어 동아시아에서는 더 이상 대한의 적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전쟁에서 한 번 패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측 또한 무모한 인도원정에 한가지 이유가 되었지만 말이다. 이를 위해서 대한은 그들의 군사를 히말라야를 넘게 하였으며, 한 번에 많은 군대를 몰아서 보냈다가는 보급 문제 때문에 피를 볼 가능성이 있어서 그들을 충분히 쪼개어 시간을 들여 배치하기로 하였다.
1605년. 회교가 대한의 유교에 조화되는데 성공하였다. 회교의 조화 성공은 유학자들과 함께 대한에 융화된 온갖 소수 종교들의 공통된 승리였으며, 기독교 종파들은 이를 십자군의 승리라고까지 하며 칭송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조화된 회교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둘의 충돌을 막기 위해 포졸들이 다수 동원되어야 했다. 어떻게든 조화해 냈다고 숨을 돌리려는 찰나 문제가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형국이었다.
이 조화는 아무래도 회교의 성도와는 많이 떨어진 인도네시아여서 가능했다는 말들이 나왔는데, 대한이 계속해서 서쪽으로 나아가 천축국의 이슬람교도와 맞닥들였을때, 그들 이단을 앞세워 진격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다만, 천축은 회교를 국교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민중들은 회교 보다는 전통적 종교인 힌두교를 더 믿는다는 말들도 있어서 직접 해 보기 전에는 도저히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다만 이 결과로서 인도네시아의 통제력이 강화되고, 인도네시아에서의 상업활동이 더욱 원활하게 변해 상인들로 부터 징수하는 세금이 늘어났다는 것 정도만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었다.
1601년 이후 대한의 상인들이 다시 구라파의 땅을 직접 밟는 일은 없었지만, 간간히 구라파의 소식들은 들어왔고, 그때 구라파의 땅을 밟은 상인이 가져온 정보와 새로이 들어오는 소문들을 취합하여 구라파의 전황을 추정이나마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이라는 나라에 새로운 국가가 가입하였다고 한다. 네덜란드가 전쟁 중이라고 하였으므로, 아마도 이 국가는 옛 주인인 스페인 즈음이라고 예상했으나 상인들의 말로는 스페인은 아니고 다른 어떤 국가라 하는데,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국명이라 상인들은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소식으로는 과거 대기근으로 인해 러시아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죽어나갔는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타국의 상인들 조차 입에 오르내릴 정도의 대기근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건제한 지금 러시아의 선제공격의 가능성은 사실상 접어둬도 될 것 같았다.
1606년. 브루나이의 잔당들이 항복함으로서 대한은 보르네오 섬을 완전히 대한의 통제하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점령지에 있는 회교도들은 대한이 정성을 들여서 조화한 회교에 질색을 했지만, 일단은 믿는 척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선지자께서 위급한 상황에서의 위장 개종은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셨으니, 당분간은 고개를 숙이고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의 구황작물로서의 가치에 대한 오랜 실험이 끝나고 고구마와 감자가 구황작물 겸 북방의 혹한의 땅에 심기 좋은 작물이라는 결론이 나오자, 조정은 망설이지 않고 스스로를 한(韓)인이라 생각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사민정책을 유도했다.
지금에 와서 강제로 북방의 땅에 보내봤자 잠깐 한눈 파는 사이에 도망칠 뿐이다. 그리고 만주는 그러한 도망자들을 찾거나 감시하기에는 너무 넓고 혹독한 땅인데다가 중원과 연결되어 있기까지 하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북방의 땅을 개척한 사람들에게 많은 자치권을 약속해주고 지원을 약속해주며 힘겨운 삶을 사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북방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싣도록 하였다.
한편 지금의 대한에 어떤 식으로든 불만이 있는 사람이 정부의 통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북방의 삶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짐으로서, 정부의 통제가 잘 미치는 간도-한반도 지방은 오히려 지방 통제가 강화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대기근의 여파로 러시아의 동방 확장이 주춤할 것이라 여겼지만, 러시아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물론 이 기근의 여파로 러시아가 힘이 빠져 많은 유목민 국가들이 살아남기는 하였으나, 러시아는 백인 카칸의 권위를 이용해 지나가는 길에 있는 유목민들을 끌어들여 이용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힘이 빠져 주저앉을 것이라는 상인들과 예조의 예측은 너무 희망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전쟁을 벌일 기력까지는 없을 테지만, 나쁜 소식은 나쁜 소식이었다.
북방의 위협이 여전하다고 판단된 대한은 남쪽의 세력 균형을 맞춰둘 필요성이 생겼다. 당장 대한은 아유타야와 친하고 란 쌍과 적대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란쌍이 크메르를 집어삼킬 경우 아무래도 아유타야만으로는 불안해질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대한은 크메르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대한은 크메르의 방어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은 없었지만 대한이 동맹이라면 적국이 크메르를 공격하기 전에 한 번 쯤은 다시 생각해 볼 것이 분명했다. 크메르 역시 그 점을 눈여겨보고 대한의 직접적인 지원이 없더라도 이 손을 잡기로 하였다.
대한의 해양세력이 더욱 강대화됨에 따라 대한의 정부는 바다를 주 업으로 삼는 상인들을 옭아멜 새로운 법을 고안해야 했다.
이는 대한이 상인들을 우대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통제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나온 발상이었다. 대한의 정부는 해양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다를 떠다니는 항해자들이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수칙들과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명시해둔 법전을 새로이 만들어 항해자들에게 주었다.. 이를 뱃사람들이 지키게 하기 위해선 고생이 필요하겠지만, 이로서 적어도 서로가 서로에게 칼 대신 말로서 싸울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게 될 것이라 희망했다.
이 해양법은 유럽에서 제정될 해양법과 이름은 같지만 근본 사상에서부터 차이가 있는 전혀 다른 법안이었다.
외양을 탐험하면 할수록, 전쟁이 계속해서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대한은 더욱 더 강한 철과 더 많은 철을 만들어낼 기술을 필요로하게 되었다. 이 필요성으로 인해 한 몫 잡으려는 상인들은 장인들에게 투자해 제련 공정을 고도화하는 방법을 찾았고, 어떤 이들은 유럽의 제련 과정을 훔쳐오고자 하였다.
어느쪽이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상인이 고도의 제련 기술을 대한에 가져오는데 성공하였고, 이 기술을 수많은 상인들이 유출시켜보려고 달려든 결과 조각난 파편들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제련 기술이 민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 조각들을 한데 모아서 철의 품질을 높으려는 장인들과 상인들의 노력은 계속해서 이어지기 시작했으며, 이 조각들을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모아보기 위해서 저자의 국적에 상관없이 그 책이 미신적인 종류인지에 상관없이 온갖 종류의 서적들을 모아서 일일이 시험해 보기 시작했다.
제련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한의 조정에서는 규격의 통일을 시도할 여유가 생겼다. 지금까지의 전훈에서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 병사들이 각자 챙긴 무기의 규격이 달라 처음에 지참한 무기를 손망실했을때 전투력이 본래의 수준에 도달하는데 시간이 걸리며 보급 문제 역시 번거로워지고 위험해 진다는 것이었으니까.
차라리 모두가 같은 무기를 쓴다면 애용하던 무기가 손망실 되었어도 같은 종류의 물품으로 보급받을 수 있게 될 거이다. 물론 이래도 지금까지 쓰던 물건과 손맛이 다르다는 베테랑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완전히 새로운 물품을 보급받는 상황보다는 나을 것이고, 전쟁에 쓰이는 대부분의 병사는 그러한 손맛의 차이를 모를 징집병일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서력으로 치면 1607년 신정에 대한은 천축으로의 첫 진격을 시작했다. 한국군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 전쟁으로 바다와 길을 이어 비효율적인 히말라야를 통한 보급 대신 말라카 해협을 통해 보급받으며 싸우는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벵갈은 두개의 동맹국가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행이도 이 두 국가는 얼마전 인도 통일을 걸고 비자야나가르 왕국과 전쟁을 벌이고 또한 패배함으로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때문에 대한은 굳이 도와주겠다는 아유타야의 도움 없이 혼자서 진격해 보기로 하였다. 최악의 경우 병사들은 바다로 후퇴하라고 일러두었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의 수군이 그들을 태우고 말라카 해협으로 탈출할 것이다.
히말라야 산맥은 퇴각로로 쓰기에는 절대로 좋은 지형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일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대한은 인도로의 첫 관문에 발을 내딛었다. 대한의 장병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 관문만은 반드시 뚫어야 했다. 아니면 저 혹한과 거친 땅을 지나 대한의 영토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패주로로 저곳은 사지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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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아니라 그냥 좋아하는 작가들 문체 흉내내면서 해 보고 있는거임 아무래도 그 편이 읽기 편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이제 검색해도 국명이나 지명 음차한 부분 안나오는 부분이 생기니까 다음화 부터는 그냥 지금 쓰는 명칭으로 통일함. 작중내로는 뭐 한글 정착했고 유럽하고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까 굳이 음차명 쓸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연재추
ㅇㅈㅊ
이거 쓰는데 얼마나 걸림?
한 시간에서 네시간정도. 상황따라서 글쓰는 속도 편차 심함 - dc App
오홍 연재추
연재추
ㅆㅅㅌㅊ
대체역사소설 오져따리
님글 넘 재밌는데 퍼가거나 다른곳에 소개해도 됨?
문제없음. 재미 있었다니 오히련 내가 고맙지. - dc App
지도 스킨 이쁘다 ; 굳굳!
대단...선추천 후정독
경국대전에 추가하는것보다는 속대전이나 대전통편처럼 새로 만들어서 추가 하는게 맞을거임
ㅇㅇ. 수정함.
연재 개추
근성추다 진짜
보헤미아 알파고 쩌네
필력좋다 꿀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