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대학교

대학을 한 나라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으로 본다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현존하는' 이라는 문구를 삽입해도 1398년 설립한 성균관대학교가 있고 서구의 대학제도를 기준으로 봐도 1855년에 설립된 가톨릭대학교가 있다. 정부에서 '대학' 인가를 받은 것으로 보면 1905년의 숭실대학교이며 요즘과 같은 학위 시스템을 갖춘 최초의 대학은 1924년의 경성제국대학이다. 해방 이후 최초의 대학은 국민대학교이며 해방 이후 최초의 4년제 대학은 단국대학교이다.



배재학당 출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 윤치호, 김지호,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 오긍선, 민족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여윤형(자퇴),



[팩트체크] 대한제국 시절 이승만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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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H. G.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설립, 아들은 배재대 학장, 딸은 이화여대 학장. 딸 Alice R. 아펜젤러는 1939년 김활란 부교장에게 교장직을 넘겨주고 1940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김활란은 1936년 말부터 글과 강연을 통해 일제 학도병과 징용, 위안부 참여를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친일인사 명단에 두 번 오른 인물이다.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지청천은 생도 300여 명을 이끌고 백두산 지역의 안도현에서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였고, 김좌진 부대를 뒤따라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하였다. 광복 후인 1947년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이을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하였고, 1949년 신흥초급대학이 되었으나 6·25전쟁 때 조영식이 인수하여 경희대학교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