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서 ‘대한제국과 교육:배재학당에 펼쳐진 고종의 꿈’ 기획전이 열린 가운데 곽명근(왼쪽 네 번째) 학교법인 배재학당 이사장, 김영호(왼쪽 다섯 번째) 배재대 총장 등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근대 고등교육을 구현하려는 고종(高宗) 황제의 꿈이 120년 만에 화려하게 깨어났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제1기획전시실에서 대한제국과 교육-배재학당에 펼쳐진 ‘고종의 꿈’ 기획전이 내년 10월말까지 이어지며 120년 전 근대교육의 시대상과 열망을 전한다. 전시는 120년 전 고종이 부국강병을 꿈꾸며 쏟은 교육열에 집중했다.
고종은 1897년 부국강병과 근대국가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등극했다. ‘교육은 개화의 근본이다.(고종실록 권 33)’라며 교육 열망을 비친 고종은 ‘교육의 성취를 보지 못하니 마음이 적막하여 밤중에도 잠들지 못하고 있다.(고종실록 권 44)’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획전는 미디어 아트에 사진 53건과 사료 24건을 삽입해 고종의 근대 고등교육 열망을 재조명했다. 배재학당 본관 교사 타입캡슐에서 발견된 동전모음과 국민소학독본 등 새로운 전시물 6건을 선보였다.
특히 120년 전 고종이 부국강병을 꿈꾸며 쏟은 교육열에 집중했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에서 고종의 교육 구상이 구현된 점도 다뤘다. 전시는 배재학당이 중등교육 뿐 아니라 배재대학 이란 고등교육기관도 포함된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고종은 1897년 부국강병과 근대국가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등극했다. 교육은 개화의 근본이다(고종실록 권 33)라며 교육 열망을 비친 고종은 교육의 성취를 보지 못하니 마음이 적막하여 밤중에도 잠들지 못하고 있다(고종실록 권 44)로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배재학당과 조선정부가 학생교육을 합의한 ‘배재학당합동(培材學堂合同ㆍ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887~1890년 아펜젤러 교사 부부 앨범(배재학당역사박물관 소장), 1907년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게재된 배재학당 개학광고(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등이 미디어 아트로 구현됐다.
주요 전시물은 당시 고종의 근대 고등교육 열망을 담은 역사적 소장물이 주를 이뤘다. 배재학당과 조선정부가 학생교육을 합의한 배재학당합동, 1887~1890년 아펜젤러 교사 부부 앨범, 1907년 황성신문에 게재된 배재학당 개학광고 등이 미디어 아트로 구현됐다.
김종헌 배재학당역사박물관장은 “열렬한 향학열로 부국강병을 이루려던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2주갑(120년)이 되는 해에 뜻깊은 전시를 열게 돼 감격스럽다”며 “전시를 통해 고종이 배재학당을 통해 구현하려던 교육의 의미를 되새기기 바란다”고 기획전 취지를 설명했다.
한편 이번 전시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서 2018년 10월말까지 이어지며 120년 전 근대교육의 시대상과 열망을 전한다.
'배재대학교'라는 이름은 고종 황제가 하사한 '배재학당'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은 1885년 3월 미국 감리교 선교회의 선교사였던 아펜젤러(H.G. Appenzeller)가 설립하였으며, 초대 학당장은 설립자인 아펜젤러이다. 1895년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로 구성된 배재대학부를 설치하였다. 이듬해 서재필이 지도하는 학생회인 배재협성회가 조직되었다. 1896년 배재학당 내에서 <독립신문>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창간하였다.
배재학당 출신으로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1895년 졸) 박사를 비롯해 독립운동가 신흥우 박사,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의학의 선구자 오긍선 박사,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민족시인 소월 김정식, 나도향 등이 대표적이다. 서재필, 윤치호 등은 배재학당의 교사로 활동했다.
1958년 재단법인 배재학당이 인가를 받았으며 이듬해 서울 하월곡동에서 배재대학 기공식을 열었으나 건물을 짓던 중 4·19 혁명으로 무산되었다. 1965년 4월 학교법인 대전보육학원이 인가를 받았다. 1971년 12월 대전보육초급대학이 대전여자초급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다. 1977년 10월 학교법인 배재학당과 대전보육학원이 합병하였으며, 이듬해 대전여자초급대학은 배재실업전문대학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었다. 1980년 12월 10개 학과, 400명으로 배재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85년 배재학당 창립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1989년 백산관, 1990년 소월관, 1991년 김옥균관, 서재필관을 잇달아 준공했다.
1992년 종합대학교인 배재대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93년 2월 주시경 기념 도서관을 준공했다. 2005년 예술관, 국제교류관을 준공하고, 중앙도서관 족보자료실을 개관했다. 2010년 아펜젤러기념관 및 하워드기념관을 준공했다. 2012년 4월 한류문화산업대학원을 신설했다.
배재대학교가 인서울 하지 못하게 된 이유
일제 감정기 일제 감정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이승만 시절 서울 하월곡동에 의대까지 포함된 배재대 건축 기공식을 갖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하야 사건으로 인해 배재대학교 서울 건립을 잠정으로 정지되게 된다. 지역적으로 1%에 불과한 서울에 대한민국 인구의 20%가 몰려있고 서울 경기에 한국 인구의 절반이 몰려있다. 서울지역 39곳과 경기·인천지역 27곳 등 총 66개 대학교가 있다. 많은 지방 대학들이 서울, 경기 지역에 캠퍼스를 지을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대학간 잡음이 엄청나다. 하지만 배재대학교는 인서울 대신 대전의 명품사학으로 태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강력한 수도권 팽창 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울지역에는 신규 대학의 설립은 물론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도 허가하지 않았다. 배재대학교는 서울에 대학 설립 논의가 꽤 오랫동안 오고 갔으나 시기를 놓쳐서 결국 인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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