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배재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 윤치호, 김지호,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 오긍선, 민족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여윤형(자퇴), 최초의 한국인 음악교사, 애국가 작사가로 거론되는 인물중 하나인 김인식.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아버지는 배재학당 설립, 아들은 배재대 학장, 딸은 이화여대 학장
1884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에 따라 1885년 4월 2일 한국에 입국하여 한국선교회 및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1887년 한국선교부 감리사로 있으면서 학교와 병원 등에 복음전도의 여러 사업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29일 서울에 벧엘 예배당(지금의 정동제일교회)을 설립했으며 1888년에는 H. G. 언더우드, G. H. 존스 등과 함께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벌였다. 1890년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를 창설하여 1892년 회장직을 맡는 등 성서번역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1895년에 월간지 〈한국휘보 The Korean Repository〉의 편집일을 맡았으며, 1897년에는 한국말로 된 최초의 종교신문인 〈죠션 크리스토인회〉를 창간하여 선교사업 외에 민족계몽운동에도 조력했다. 1902년(광무 6)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그가 탄 배와 일본 상선이 충돌하여 익사했다. 큰아들은 배재학교 교장을, 큰딸은 이화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아버지 H. G.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설립, 아들은 배재대 학장, 딸은 이화여대 학장. 딸 Alice R. 아펜젤러는 1939년 김활란 부교장에게 교장직을 넘겨주고 1940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김활란은 1936년 말부터 글과 강연을 통해 일제 학도병과 징용, 위안부 참여를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친일인사 명단에 두 번 오른 인물이다.
이화학당은 미국 북 감리교회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턴(1832~1909년)이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교육기관이다. 이화여전이 대학으로 승격된 1946년 김활란 교수가 초대 총장에 취임한 것을 두고는 친일 논란이 일었다.
[출처] 다음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4a2656a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4a2657a
대한제국 시절 이승만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뒤로 배재대학교, 배재중고등학교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 하월곡동 배재대학교 기공식 (1959년 11월)
배재대학교가 인서울 하지 못하게 된 이유
일제 감정기 일제 감정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이승만 시절 서울 하월곡동에 의대까지 포함된 배재대 건축 기공식을 갖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하야 사건으로 인해 배재대학교 서울 건립을 잠정으로 정지되게 된다. 지역적으로 1%에 불과한 서울에 대한민국 인구의 20%가 몰려있고 서울 경기에 한국 인구의 절반이 몰려있다. 서울지역 39곳과 경기·인천지역 27곳 등 총 66개 대학교가 있다. 많은 지방 대학들이 서울, 경기 지역에 캠퍼스를 지을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대학간 잡음이 엄청나다. 하지만 배재대학교는 인서울 대신 대전의 명품사학으로 태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강력한 수도권 팽창 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울지역에는 신규 대학의 설립은 물론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도 허가하지 않았다. 배재대학교는 서울에 대학 설립 논의가 꽤 오랫동안 오고 갔으나 시기를 놓쳐서 결국 인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수시, 정시... 그리고 논술 전형, 학생부(내신) 전형, 적성검사 전형, 면접 전형, 입학사정관제 전형...
돌리고.. 돌리고~~~ 돌려막기로 입시전형료만 막대하게 날리고 적당한거 걸리면 들어갈수 있는 무한경쟁 시대에 아직도 지잡대 타령질 해대고 있는가? 기억하시길.. 최근 입시경향에서 SKY는 서울경기인천 잡대의 약어일뿐.
요즘 수능은 수시, 정시와 다양한 전형방법으로 주사위 돌리기로 입학할 대학 지원후 담청되면 입학하는 주워 먹기 놀이인데.. 구석시 시대 학력고사 시절이나 점수로 대학을 나눌수 있지. 요즘 같은 수능 세대는 대학 서열화는 의미없는 짓이다.
오히려 대학의 환경이나 교육, 학생들 지원환경등을 언급 하는게 더 효율적이라고 본다.
[팩트체크] 진실은 편리하지 않아요.
... 해보지 않고 책상 위에 앉아서 고민만 하는 것은 청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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