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감정기 일제 감정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배재학당 출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 윤치호, 김지호,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 오긍선, 민족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여윤형(자퇴), 최초의 한국인 음악교사, 애국가 작사가로 거론되는 인물중 하나인 김인식.
대한제국 시절 이승만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뒤로 배재대학교, 배재중고등학교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 하월곡동 배재대학교 기공식 (1959년 11월)
배재대학교가 인서울 하지 못하게 된 이유
일제 감정기 일제 감정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고려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 일간지에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되어 건국훈장이 박탈 되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 윤치호, 김지호,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 오긍선, 민족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여윤형(자퇴), 최초의 한국인 음악교사, 애국가 작사가로 거론되는 인물중 하나인 김인식.
이승만 시절 서울 하월곡동에 의대까지 포함된 배재대 건축 기공식을 갖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하야 사건으로 인해 배재대학교 서울 건립을 잠정으로 정지되게 된다. 지역적으로 1%에 불과한 서울에 대한민국 인구의 20%가 몰려있고 서울 경기에 한국 인구의 절반이 몰려있다. 서울지역 39곳과 경기·인천지역 27곳 등 총 66개 대학교가 있다. 많은 지방 대학들이 서울, 경기 지역에 캠퍼스를 지을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대학간 잡음이 엄청나다. 하지만 배재대학교는 인서울 대신 대전의 명품사학으로 태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강력한 수도권 팽창 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울지역에는 신규 대학의 설립은 물론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도 허가하지 않았다. 배재대학교는 서울에 대학 설립 논의가 꽤 오랫동안 오고 갔으나 시기를 놓쳐서 결국 인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1885년 미국 감리회 소속 H.G.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배재학당
1. ‘배재’는 나라의 재목이 될 인물을 가르치라는 뜻이 담겨 있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 이 현판이 고종황제를 통해 한자로 쓰인 것이다. 아펜젤러는 ‘배재(培 pei, 材 cai)’의 발음을 그대로 영문으로 표기해 썼고, 결국 ‘Pai Chai College’가 탄생했다. 아펜젤러는 ‘배재(培 pei, 材 cai)’의 발음을 그대로 영문으로 표기해 썼고, 결국 ‘Pai Chai College’가 탄생했다.
2. 배재대 측은 2005년 대학 디자인 표준화작업인 UI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옛 명칭을 그대로 사용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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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3%의 염분때문에 썩지않는다.
이런 3%에 속하는 사람들 덕분에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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