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이사벨라 비숍은 1894년 조선에 처음 온 뒤 4년 동안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4차례에 걸쳐 조선 곳곳을 답사했다. 명성황후와 고종황제를 알현했고 제정러시아의 조선인 이민자들도 만났으며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체험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담겨 있다. 이사벨라 비숍이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은 서구인이 쓴 한국 관련 저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책으로 방대한 주제와 자료,생생한 현장감과 실증성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개화기 연구의 필독서로 인정받고 있다.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당시 한국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국은 양반 계급의 착취,관공서의 가혹한 세금,총체적인 정의의 부재,모든 벌이의 불안정,비개혁적인 정책 수행,음모로 물든 고위 공직자의 약탈 행위,하찮은 후궁들과 궁전에 한거하면서 쇠약해진 군주,널리 퍼져 있으며 민중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미신,그리고 자원 없고 음울한 더러움의 사태에 처해 있다." 189쪽.


그녀는 당시 한국 상황을 기술한 것을 보면 암울한 구석이 가득하다. 그만큼 조선말 대한민국의 암울했던 사회상을 추측할수 있다. 이사벨라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국은 도로 등 인프라가 거의 없고 어업 광업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 곳곳에서 양반과 관료들의 착취에 대해 지나치리 만큼 자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반 백성들의 일하려는 욕구,잘 살려는 욕구를 좌절시킨다고 썼다. 그것은 조선말 암울했던 대한민국 상황을 잘 표현해 주는 것이며 부패한 관료 체계에 대한 일침이다. 구한 말 당시 우리나라가 상시적인 부패와 계급구조와 사회적 인프라 부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녀가 바라본 당시 구한말 교육 체계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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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조선의 교육은 애국자나 사상가나 정직한 사람을 산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교육은 그렇게 수행되어 왔다. 흔히 서당에서 학생들은 방바닥에 앉아 그들 앞에 한문책을 펴놓고 몸을 좌우와 앞뒤로 흔들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중국의 고전에서 선정된 과목을 가장 크고 가장 시끄러운 소리로 읽고 암송한다. 이러한 교육은 사고력을 발전시키거나 그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도록 하지는 못한다. 371쪽

###2.
""의심할 나위도 없이 조선에서 가장 교육적, 도덕적,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지금도 행사하고 있는 학교는 배재대학이다." 388쪽

그런데 그런 그녀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뜻박의 정반대의 가치와 평가를 보내는 문구를 발견할수 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서당 중심의 당시 교육과 확연히 다른 배재학당 교육은 차이점을 갖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16년 전(1897년) 조선반도를 둘러보고 "배재대학(배재학당)에는 국한문과가 있어서 고전을 가르치고 있다. 서재필 박사 등이 역사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한국어로 알려 학생들 사이에 애국심이 일고 있다"고 썼다.

실제 배재학당 내에서 한글로 새긴 < 독립신문 > 이 발간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회라 불리는 협성회를 조직했다. 배재학생들은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 적극 가담해 토론하며 민주주의를 훈련하고 민중들을 각성시켰다. 일본이 본격적인 식민교육정책을 준비하던 1909년에도 국어독본과 작문은 배재학당의 주요 과목이었다. 

국민시가 된 < 진달래꽃 > 을 쓴 김소월, 시인 박팔양, 당대 현실 문제를 파헤친 소설가 나도향(벙어리 삼룡이 저자), 소설가 방인근 등이 모두 배재 출신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배재학생들이 3.1운동에 앞장서고 광주학생의거 당시 배재선배학생들이 서울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주시경 선생 등의 자주적 교육정신으로 각성되고 성장한 때문임은 물론이다.


이사벨라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구한말 한국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필연적으로 가난한 국가는 아니다. 조선의 자원은 고갈된 것이 아니라 미개발 상태이다. 성공적 경작을 위한 조선의 능력은 거의 개발되지 않았다. 기후는 멋지고, 강수량은 풍부하며, 토양은 비옥하다. 언덕과 골짜기는 석탄, 철, 구리, 아연, 금을 매장하고 있다. 1,740마일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어장은 국부의 원천일 것이다. 조선에는 근면하고 호의적인 민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p.423쪽.

"이제 조선을 떠나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처음 조선에서 느꼈던 혐오감은 애정에 가까운 관심으로 바뀌었다" 라고 하면서 조선을 떠납니다.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마지막 문단에서 느껴지는 그녀가 바라보는 대한민국 상황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됩니까?  그녀는 기본적으로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지 구한말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황을 가감없이 정확하게 전반부에 표현하고 있을뿐입니다.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고등학당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배재학당은 한국 최조의 근대신 중등교육기관으로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고종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1909년 배재고등학당으로 인가되었다. 이후 일제 탄압으로 YMCA 안에서 잠시 명맥만 유지하다가 1925년 일제에 의하여 대학과정은 폐지되었고 1937년 배재중학교(6년)로 개칭하였다. 해방 이후에 1951년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하였고, 1958년 학교법인 배재학당의 인가를 받았다.


... 대학부 그리고 대학교. 어차피 돌고돌아 배재대학교.


"의심할 나위도 없이 조선에서 가장 교육적, 도덕적,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지금도 행사하고 있는 학교는 배재대학이다." 

-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388쪽.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