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도 한잔 하고 애써 잊어두고 한구석에 처박아둔 기억이 갑작스레 떠올라 몇 자 적어본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공부에 별다른 뜻이 없었다. 중학시절에는 곧잘 했지만 그건 단순히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나열한 문제와 정답을 적당히 외웠던 것뿐, 결코 내가 머리가 좋거나 이해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진학 이후 처음으로 치른 모의고사는 그럭저럭 점수가 나왔지만, 갈수록 떨어지는 점수에 나는 별달리 개의치 않았고 이후에는 공부에 거의 뜻을 두지 않았다. 그냥 수업시간에만 충실하고 남들 하는 대로 야자시간에 적당히 문제집을 푸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열심히' 하지 않았던 탓인지 고3 수능을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점수를 받아버렸고 그렇게 원서를 쓰면서 담임의 한숨 섞인 시선과 함께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대학에 지원하게 되었다


사실 그때 내가 받은 점수로는 억지로라도 넣으면 경기권 정도는 간신히 넣어 볼 점수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모험보다는 안전함을 추구했다. 그리고 어차피 서울권이 아니면 다 거기서 거기라는, 어차피 자기 점수로는 경기권도 감사해야 할 녀석들 사이에서 그런 웃긴 분위기가 팽배해 나는 떨어질 바에야 소위 말하는 지잡대에 안전빵으로 원서를 넣었다.


당연히 붙었고, 부모님은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를 해주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어쩐지 미안했다. 부모님은 나의 입시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보통 부모들이 인터넷을 뒤지고 지인들을 통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심지어 입시 컨설팅이라는, 당시에는 생소한 그런 곳에 거액을 줘가며 이미 나온 점수를 어떻게든 쥐어짜내는 일도 있었지만 나의 부모님은 그러지 않았다.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사고 안 치는 당신들의 아들이 어련히 잘 할 거라 믿었고, 내가 이름도 모르는 대학에 지원했고 붙었다는 말에도 실망한 기색은 전혀 내비치지 않고 그날 나를 고깃집에 데려가 한우를 먹이셨다.


그날 고기는 유난히 잘 들어갔다. 나는 그딴 대학밖에 못 간 나를 부끄러워하기보다 눈앞의 한우에 집중했다. 철이 없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게도 그날 한우가 왜 그리 맛있었는지 참 야속했다. 그렇게 고기를 먹고 있는데 문자로 합격증을 확인하라는 메시지가 왔다. xx대학 인문계열 국문학과. 남들은 저 대학 입학 하나 하려고 목숨 걸고 고등학교 3년을 보냈다지만, 나에게는 그런 치열함이 없었다. 나는 그저 물 흐르듯이 여기까지 왔다. 그런 나에게 부끄러움은 없었다. 스스로 그때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또한 나는 국문학이란 학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아, 그저 가서 문학 시간에 배우던 걸 좀 더 많이 배우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OT날이 다가왔다. 꼴에 대학생이라고 그때는 기뻐했다. 설레서 잠도 조금 설쳤고 덕분에 부랴부랴 짐을 챙겨 간신히 집결지로 향했다. 1분인가 늦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빠르게 뛰어왔다. 버스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반겨준 것은 선배로 추측되는 사람의 싸늘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내가 잘못 들은 것인지 뒤쪽에서는 나지막한 욕설도 들려왔다. 그렇게 버스에 올라 거진 꽉 차 있던 자리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OT장소는 강원도였고, 세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끝에 허름한 리조트와 마주했다. 매우 허름했고 어떻게 건축허가를 내줬나 싶을 만큼 엉성한 건물이었다. 그래도 갖출 건 갖췄는지 선배 하나가 신이 나서 레크레이션장이 있고 식당고 있고 놀거리도 많다며 떠들어댔다.


그렇게 숙소를 배정받고, 처음으로 시작한 행사는 놀랍게도 얼차려였다. 강당에 우리들을 모아두더니 약 50명 정도의 선배들이 둘러싸고 군기를 잡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게 군기였다. 군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사를 안 하냐부터 시작해 적당한 욕설까지 퍼부으며 이제 갓 스무살, 아직 교복냄새가 진득히 남은 애들이 잔뜩 쫄아 덜덜거렸고 그게 우리와 선배들의 첫 만남이었다


오티는 이후 하루에 한 번의 집합을 거치고 강제적인 장기자랑, 온갖 술과 이물질을 섞은 사발식을 수행한 후에야 끝이 났다 나는 거기서 뭔가 앞으로의 대학생활이 막막할 것이란 것을 짐작했다


오티 이후 선배들이 짜 준 시간표대로 나와 내 동기들은 수업을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그때 그 누구도 선배들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초반이라 그럴까. 심지어 우리 동기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심지어 군대까지 다녀왔던 형도 선배들의 그런 행태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참 바보같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들지 못했다. 그땐 절박했으니까. 우리 중 대다수는 재수라는 어려운 길을 포기하고 여기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생활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집합이 걸렸다. 여지없이 얼차려가 시작되었고 심할 경우 폭력도 사용되었다. 한번은 동기 하나가 작정하고 집합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후 오는 연락을 모두 무시하다 꼭지가 돈 선배 하나가 그 동기의 자취방에 가서 난동을 피우고 결국 집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 그 녀석은 무자비하게 맞았다. 그리고 또 다시, 그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반발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모두가 집합에 참여했다. 그때 맞은 동기는 퉁퉁 부은 얼굴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집합에 참여해 남들과 함께 얼차려를 받았다. 나는 그 애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소름끼치게도 동기들 대부분이 저 놈 때문에 얼차려가 더 빡세졌다고 뒤에서 욕했다. 앞에서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놈들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흐르고 중간고사를 맞이하고, 나는 만족할 성적이 나왔다. 이상했다. 나는 한 게 없는데. 그저 수업시간에 잘 들었을 뿐인데. 다시 돌아보니 강의시간에는 태반이 엎드려 잠들어 있었고 몇몇만 교수님을 보고 있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어쩌면 나는 그때 어렴풋이 점점 늙어가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흰머리는 내가 모르는 사이 훌쩍 늘어났고, 그 기점은 정말 우연한 순간에 찾아왔는데 나는 학기 도중 잠시 집으로 올라왔을 때 염색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기폭제가 되었다. 점점 잦은 집합은 일주일에 세 번 꼴로 늘어났고 우리는 그때마다 두세 시간씩 땀에 절어 빈 강의실을 걸어나와야 했다. 그러나 그때도 누구 하나 반발하지 않았다. 어쩔 때는 우리가 정말 잘못해서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선배들은 항상 잘하자, 응? 이란 말로 끝맺었고 이후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선배들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주며 '다 너희 위해서 그런 거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웃기게도 따뜻함이라도 느꼈는지 우는 애들도 있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다. 우리는 이문열과 황석영, 안정효와 제정 러시아의 소설들을 읽으며 독재정치와 왕정을 곱씹으며 되짚는데 어째서 저런 폭력과 부당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못 꺼내는가?


그러다 일이 터졌다. 기말고사가 끝날 무렵, 선배들이 또 한번 우리를 불렀다. 방학 동안 풀어지지 말라는 의도였다. 선배들에게 방학 기간의 활동을 보고하라는 요지의 내용을 전달하고 또 한번 얼차려가 시작되었다. 어김없이 땀이 흘러내리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러다 그때 내 안에서 뭔가가 퍽, 하고 터졌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아직도 기억난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선배 하나가 비웃음 섞인 탄식을 흘리던 모습을.


나는 그때 아무 말 없이 걸어나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여기서 나가야겠다, 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때 강의실 밖으로 나가는 문이 하나의 탈출구처럼 느껴졌다. 폭력과 선배들의 집합, 얼차려로부터의 탈출구가 아니라, 현재 내가 사는 삶의 탈출구.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잡았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뿌리쳤다. 뭔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고 나는 그 길로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천만다행인지 그때 강의실 밖 복도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 선배들은 그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나를 더 이상 붙잡지 않았던 것 같다


집에 가면서부터 전화통에 불이 났다. 나는 동기들이 새벽까지 얼차려를 받는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처음으로 '우리'들의 잘못이 아닌 '선배'들의 잘못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밤을 보내고 나는 결심을 내렸다. 선배들의 욕설 섞인 문자와 단톡방에서 날 욕하는 모습들을 보고 자퇴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에 일어난 부모님께 지금까지의 일을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놀랍게도 이해해주셨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다시 공부하겠다는 나의 확실한 다짐이 깔려 있었다. 수능까지는 고작 6개월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아들이 멀쩡히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수능을 치르겠다고 했지만 부모님은 이해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남은 시간 동안 학교에 가서 자퇴서를 제출했다. 가는 길에 선배 몇몇과 동기들을 마주쳤지만 그들의 시비와 비아냥에 나는 맞섰다. 자퇴라는 말이 나오자 그들은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학과장의 간곡한 설득에도 나는 확고하게 내 의치를 내비치고 자퇴서를 제출한 후, 처리가 된 것을 확인한 뒤 집으로 왔다. 그 이후부터는 정말 공부의 연속이었다. 갑작스레 다시 수능 공부를 시작하려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수능을 치렀다


그리고 수원대를 왔다 씨발


지잡에서 준지잡으로 온 것이지만 부모님은 기뻐했고... 어쨌든 나는 사람구실도 못 하던 놈에서 그래도 사람 코스프레라도 하는 놈이 되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도 하지 않았고 현재의 내 동기들에게도 하지 않았다. 너무 부끄럽다는 기억 때문일까. 사실 그 지랄을 떨고 자퇴해서 온 게 여기밖에 안 된다는 자격지심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왔고 현재까지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


뭐라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옛 생각이 나서 써 본다. 밤에 쓰던 게 깜빡 잠들어서 낮에 올린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