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박사졸업


세상이 아름다움. 12월에 영하 20도를 찍는 날씨지만 아름답고 세상이 따스하게 느껴짐. 주변에서 XX박사라고 불러주는것도 너무 감격스러움.


캬.. 이러려고 내가 20대를 통채로 연구실에 처박고 살았구나 생각이 들면서 그래도 박사를 받았으니 후회가 없다 ㅎㅎ 하면서 독기가득찬 성격이 급격하게 유해지기 시작함. 그리고 그런 독기는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됨.


1. 포닥


선택지가 몇개 없음. 사기업에 연구쪽 취업을 알아보니 안뽑음. 어쩔수없지..하고 주변 문의해봄. 그런데 되려 기술직에는 관심없냐고 연락이 옴.


연봉이 높으면 가야지.. 생각하고 근무조건과 연봉을 물어봄. 박사경력 인정을 기준으로 연봉은 6500정도라고 함. 대신 보안을 이유로 논문이나 특허같은 건 회사에 허가를 받아야하는데 논문은 거의 불가하다고 답변함.


거기에다가 나이를 생각하면 사기업 근무는 50대 초가 거의 마지노선일텐데 연봉이 6500이라. 그러면 기대연봉은 세전 기준 높아야 20억이 안되는거고 악착같이 모아서 30%를 모아도 6억인데 30%는 죽어도 못모을거고.. 연구를 하고싶어서 박사를 받은건데.. 연구를 못하는 직종에서 현타느끼며 사는게 맞나?라는 생각을 함.


고민좀 해보겠다고 하니 지원해도 안뽑힐 수 있으니 간보면 안된다고 함. 그래서 그냥 안간다고 답하고 연락 끊음.


이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거임. 연구를 하겠다는 생각을 버렸으면 50대에 치킨집 차릴 자본이라도 벌어뒀을텐데 이제 그것도 다 날아감.


다시 고민을 했음. 대학에서 포닥을 할까 정출연에서 포닥을 할까. 몇번 떨어지다보면 두세번 안에는 합격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슬슬 알아보기 시작함. 주변에서 포닥 생각없냐고 연락 오는 경우도 있었고 그러다 현 직장 포닥 자리가 있다고 연락이 와서 들어가게 되었음.


2. 김칫국 원샷 갈기기


포닥을 들어가니 연구원에 포닥이 개많음. 전체 인력 중 20%는 포닥임. 공채뜨면 쟤들이랑 죽어라 싸워서 이겨야 함. 고민이 되기 시작함. 


나는 국내 박사인데 주변에 있는 포닥들은 미국 유럽권에서 박사를 받은 경우가 많았고 국내 박사들도 서연고 라인이 많았음. 야.. 이건 간판싸움으로 넘어가면 무조건 지겠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인생 ㅈ 된것같다는 생각을 함.


이전에 안간다고 한 기술직 자리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지만 어쩌겠음. 이미 떠나버렸고 말투부터 기분나빴는데. 그냥 죽이되던 밥이되던 계속 있어보자라는 생각이었고 내가 뭘 해야 가치를 얻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음. 답은 간단했음. 논문


그때부터 SCI를 여러편 읽어보고 연구원에서 나아가는 연구방향을 여러개 보면서 내가 논문화 시킬 수 있는 주제를 탐색하기 시작함.


그렇게 SCI 2편을 쓰고 국내 논문은 6편정도 1년간 투고하였음. 그리고 대망의 정규직 공채가 떴음. 실적만 보면 서류 컷 당할것 같지는 않고.. 그러니 면접 준비에 여러 고민을 하기 시작함.


그렇게 서류, 실무진 면접, 임원진 면접 순으로 진행하고나서 결과를 기다렸음. 최종면접인 임원진 면접은 3배수를 뽑아서 그 중 1배수만 채용을 하는데 나는 내가 될거라고 생각했고 큰 기대를 하고 있었음. 실제로는 최종에서 탈락함.


당시에는 현타가 엄청 왔음. 주변에서도 특별히 위로를 해주는건 없음. 누구나 포닥을 하며 현타를 느끼고 어줍잖게 위로하면 진짜 욕먹기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다보니 주변에서도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다음엔 좋은 결과가 있겠지 라고 말 정도만 하고 지나감.


이때 한번 떨어지고나서 여러곳에 지원을 했음. 5군데 정도? 대학, 연구소, 사기업 등등. 5군데 중 1군데빼고 4군데에서 최종면접까지 갔다가 다 떨어짐. 혼자 고민을 해봤지만 왜 떨어진건지 이해가 안됨. 핏도 맞아보였고 실적도 이정도면 낫배드인데 왜 떨어졌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음. 그렇게 몇달간 인생 ㅈ같다..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음.


3. 정규직 채용


그렇게 현타를 느꼈지만 논문은 계속 써 내려갔음. SCI를 1편정도 더 쓰고 국내 논문을 2편정도 더 게재한 상태에서 다시 정규직 공고가 났음. 이번에도 떨어지면 포닥 자리 옮긴다라는 생각을 했음.


포닥들 중 나보다 경력이 더 높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핏을 생각해보면 여기서 못이기면 내가 ㅂㅅ인거다라고 생각했음. 그렇게 다시 서류부터 제출을 했음.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서류 통과라는 메일이 도착함. 아.. 기쁘네.. ㅅㅂ 하면서 실무진 면접을 준비했음. 얼마 뒤 실무진 면접을 보고나서 합격함. 아이고.. 기쁘네 ㅅㅂ 하면서 임원진 면접을 준비했음.


임원진 면접장에 들어가니 작년에 날 떨군 심사위원이 적어도 3명은 눈에 보였음. 아.. ㅅㅂ 포닥자리를 옮길때가 된거구나..라는 생각을 함.


질문은 여러개 기억에 남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음. 왜 학부때 기사 자격증을 하나만 딴거냐? 다른 기사도 취득할게 있고 보통 대학원을 다니면서 본인 연구주제와 겹치는건 따는게 일반적이지 않냐?라는 질문이 들어왔음. 그러니 논문 이외의 실적을 보면 대학원 생활에 있어 최선을 다한 느낌이 아니다 라는 말처럼 들림. 그래서 이렇게 답변을 함.


당시에 기사 자격증을 땄던건 학부 졸업하고나서 바로 취업을 염두에 두고 딴거다. 타 지원자는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원 생활하면서 다른 자격증을 따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연구를 하려고 대학원에 들어간거니 그저 한편 한편 논문으로 연구 결과물을 만들어내는것에 집중했다. 부족한 연구일지는 몰라도 등재지부터 SCI까지 과정이 대학원 생활에 모두 담겨있다. 3년 실적만 평가해야하다보니 내 과거 기록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논문은 모두 제출했다. 지금의 내 연구결과물이 내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것이다. 자격증 부분은 내가 생각이 짧았다. 연구원에서 그걸 요구한다면 취득하는 방안을 고민해보겠다.


뭐 이런식으로 답변을 했고 그 질문을 한 사람이 흐뭇해하는 느낌으로 웃는걸 봤음. 그린라이트 같아 보였지만 노력하네 ㅂㅅ하면서 웃는걸지도 모르니.. 에효.. 하면서 다른 질문에도 답변을 한 뒤 자리를 떠났음.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음. 진짜 떨어지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절박하게 도전했구나. 이번에도 떨어지면 내 역량이 부족한게 맞는거니..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다라고 생각함. 그리고 그날 집에가서 소주를 3병정도 마시고 혼자 슬픈영화보면서 흙흙하면서 울다가 쳐 자고 다음날 휴가씀.


그렇게 며칠인가 흘러 결과가 나오는 날임. 합격자는 메일이 여러통 오는데 내 메일함에는 한통의 메일만 도착해있음. 아..ㅅㅂ..또 떨어졌네.. 에휴.. 그래 다른 자리나 찾아보자 생각하면서 메일을 열었음.


축하합니다! 라고 써있는 걸 읽음.


순간 몸이 굳었음. 연구원 내에서 메일을 보고 순간 몸이 굳어있다가 어버버하고 있으니 주변에서는 또 떨어졌나..?라는 걱정어린 눈빛으로 날 쳐다봄. 그리고 나는 으아아아아악!! 소리를 질렀음. 붙었다!!!!!!


주변에서 모두 축하한다는 말을 했고 약간 눈물이 날것 같았음. 그 와중에 떨어진 사람들은 축하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자리를 피하는 사람도 있었음. 뭐라 말이 안나왔고 그냥 붙어서 그 순간 너무 행복함.


그렇게 행복한 며칠을 지내고나서 얼마 뒤 임용 날짜에 맞춰 임용식에 참가했음. 그리고 정규직원으로 다시 자리를 배정받게 되었음.


얼마 뒤 당시 질문을 했던 임원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그 임원에게 당시 왜 웃은건지를 물어봤음. 그랬더니 하는 말이 어처구니 없었음. 


그냥 비슷한 질문을 다 해봤는데 네가 한 답변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 사실 실무진 면접결과도 좋았는데 면접보는 네 태도에서 나는 무조건 합격하겠다라는 의지가 눈에 보이더라구. 그래서 웃은거지.


약간 허무했지만 그렇구나 하고 웃을 수 있게 되었음.


4. 이후


이후에는 별게 없음. 포닥 생활은 2년도 안되었고 정규직이 되어도 신입인건 마찬가지임. 다만 범죄만 안저지르면 계약 연장 안되는것도 아니니 뭘하던 마음이 편안해짐. 


그러고나니 이제 목표가 사라져서 붕뜬 기분이 남아서 좀 당황스러웠음. 아제 뭘 목표로 해야할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변에 물어보니 시간 지나면 알아서 해결되니 너무 애쓰지말라는 답이 대부분이었음.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살아가는 중임.


이렇게 대학원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나름 정리해봤음. 10년이 넘는 기간을 두편의 글로 정리하다보니 빠진것도 많고 흘려지나간 것도 많음. 그래도 되돌아보면 후회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음. 그저 한발한발 나아가는것이 최선이었고 그걸 하려고 대부분의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왔으니까. 갤러리에 접속하는 대부분이 대학원생이라고 생각함. 


글을 쓴건 다른 이유가 있는건 아님. 나도 지난 세월이 정말 죽도록 힘들었고 미칠것 같은 선택의 순간이 많았음. 그래도 내가 용빼는 재주가 없다보니 그냥 버티면서 나아갔을뿐임. 그러니 본인이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도 연구를 하겠다는 의지만 남아있다면 샛길 찾지말고 계속 나아가길 바람. 부탁하겠는데 제발 이상한 짓 하지말고 연구자의 본분만 지키길 바람.


p.s. 여기에 나같은 박사들도 있겠지만 글 봤으면 그냥 웃고 넘어가주길 바람. 날카로운 댓글이 내게는 큰 감흥이 없겠지만 대학원생 입장에서는 비수처럼 꽃힐지도 모르는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