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아는게 없었다
나름 학부때는 공부 잘했는데 연구실 경험 없는게 크더라
다른 석사 1년차들은 사수들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배우고하던데 나는 사수가 자기 지금 3월은 바쁘다고 논문리뷰하고 공부하고 있으랜다
그렇게 3월이 날라갔다

하다못해 학부연구생도 실험실에 들어가는데 나는 실험실에 들어가지조차 못했다

4월이 됐다
랩장이 학부연구생을 부사수로 붙여줬다
아는게 없는데 부사수라 그래서 어리둥절하면서도 나도 이제 뭐라도 하겠구나 싶었다
근데 부사수가 1학년때부터 우리랩실을 다녔더랜다
지난달까지 시니어 연구자 따라다니면서 공부했다던데 다음학기부터 타대 인턴을 하게되었더랜다
뭔가 프로젝트를 맡긴 시간이 애매해서 나를 맡는 느낌이였다
랩장이 내가 보는 눈앞에서 내 부사수한테 나를 가르치라했다
이럴거면 걔를 사수라고 하지 왜 나한테 사수 완장을 줬는가

그렇게 사수 부사수 역전의 상황이 시작되었다

나와 같이 입학한 동기는 부사수를 달고 다니면서 부사수한테 이것저것 알려주고 그 대가로 부사수가 잡일을 해주는 듯 했다
부사수가 내 동기한테 선배선배 거리는 모양새가 퍽 예뻐보였다

그래서 나도 나를 ㅇㅇ씨라고 부르는 내 부사수에게 ㅇㅇ씨는 그렇고 선배나 오빠라고 불러달라했다
부사수가 선배라고 부르기엔 ㅇㅇ씨는 제 선배가 아니고 오빠라고 부르기엔 그정도로 친하지 않은것 같네요 라며 거절했다

나조차도 들어가본 적 없는 랩미팅도 척척 들어가시는 잘나신 부사수님 덕분일까
비록 반복업무와 잡일이지만 실험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는 잘나신 부사수님을 보조하며 옆에서 증류수를 채우고 팁을 채운다
뒷정리조차 혼자 시키기 불안하다며 옆에서 지켜본다
불안하면 자기가 하던가


일이 터졌다
선배가 시약을 만들어두라했는 데 고귀한 부사수님이 안계신다
이정도는 내가 할 수 있겠지 하면서 만들었다
별 거 아니였고 시간이 늦은 시간이라 졸음이 쏟아졌다
찰나의 실수로 실험실 바닥이 개판이 됐다

그냥 닦아내려고 했다가 랩장에게 걸렸는데 랩장이 호통을 치면서 부사수를 불러오라했다
그렇게 호출된 부사수는 그냥 개빡쳐있었다
나때문에 본가 가려고 예매해둔 기차표도 취소해야했단다
미안한 마음에 옆에서 도우려했지만 자기가 할테니까 설거지나 하라고 꺼지란다


이제는 부사수의 설거지 셔틀이 됐나싶어 랩장한테 찾아가 이야기를 했다
부사수가 나를 사수대접을 안하고 선배대접도 안하고 아랫사람 취급한다고
랩장은 그자리에서 오히려 나한테 꼽을 주며 나를 혼냈다
혼냈으면 끝이지 그걸 또 부사수한테 일렀나보다

부사수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다가와서 많이 섭섭했어요 오빠? 이러길래 뭐 잘못먹은 줄 알았다
당황해서 어버버하니 한숨만 푹 쉬고 가더라
그 뒤로 나한테 인사한마디조차 하지 않더라

그리고 오늘 알게됐다
랩장이 내 부사수한테 너 어차피 갈거니까 그냥 니 사수 우쭈쭈해줘라 대충 가르쳐 라고 했고
내가 랩장에게 부사수를 깐 걸 알게 된 부사수는 그대로 교수한테 쳐들어가서 찡얼거렸댄다
나한테는 하늘같이 무서운 교수님인데 랩실 4년차이신 고귀한 부사수님께는 그냥 동네 아저씨 같은 존재인가보다

그렇게 나는 뒤지게 까였다
두달동안 뭘 했냐한다
하긴 뭘 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귀하신 학부연구생님덕분에 랩장이랑 교수한테 찍힌 상황에서
나는 여길 계속 다니는게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