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경험하지 않아도 선험적 인식이 가능한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결코 경험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내 자신이 존재함으로서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시간과 시간사이에는 공백이 없다. 공백이 없는 시간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여백을 남기지 않고 흘러간다.
지금 역시 우리는 계속해서 시간에 따른 변화가 일어난다.
결코 어떠한 순간도 외적․내적으로 정확히 일치하는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쓰이는 ‘변화’는 결코 긍정의 의미도 부정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시간에 따른 변화자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시간에 따른 우리의 변화가 무엇으로부터 결정되는가? 그것은 단순하다.
본인을 바꾸는 것은 본인이다. 물론 간접적 변화를 이끄는 것은 사회적 관념, 이데올로기, 사회구조, 환경과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간접적인 것이지 직접적으로 변화를 만든 것은 자기 자신이다.
수동적으로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자문해보아라.
과연 주변의 변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자신이 생각되어지고 변화되어진 것인지, 생각을 하고 변화한 것인지를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의 산물로부터 본인의 현재를 이끌려고 시도한다면 결코 우리 자신에게 새로울 것이 없다.
시간적으로 과거를 현재인 미래로 치환된다고 한들 어찌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겠는가.
자기변화를 이끌고자 한다면 지금의 현재 자신을 직시하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이 역시 반대되는 이미지를 창조해 자기 자신을 또 하나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지금 자신의 이데올로기, 관념, 지식과 같은 획득된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을 보고 귀 기울여보라.
그렇다면 우리는 올가미와 같은 시간에 꽉 찬 퍼즐에서 벗어나 자신의 공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공백은 우리를 숨쉬게 하고 새로이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이건 먼 개소리의 집합이냐? 숨을 쉬고 공백을 처만들고 아주 가관일세
비판을 위한 비판말고 제대로 된 비판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니가 시간은 공백이 없다면서 결론은 공백이 있다고 써갈긴거 아니냐? 도대체먼소리냐?
시간은 어차피 흘러갑니다. 우리는 시간 앞에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구요. 하지만 시간이 어떠한 긍정의 부정의 의미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위에 글에 설명되있고요. 후자에 말씀드린 \"공백\"은 우리 자신이 시간이라고 명명된 관념의 시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되찾자고 설명한 것입니다. 물론 시간 자체는 흐르고 있습니다. 결론에서 보면 시간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문단에 설명된 시간이 우리가 인식될 수 없는 것이라면 후자는 관념으로부터 비롯된 시간을 뜻합니다. 제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시간은 흐르는데 시간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한다?? 그러니깐 풀어서 얘기하면 육체나이는 늙어가도 정신나이는 젊게 유지하라는 얘기냐? 도무지 뭔소린지 모르겠네
자세히 풀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과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라고 구분되어있는 \'시간\'이 있다고 합시다. 전자는 선험적인식을 통해 알 수 있는 시간입니다. 구분되어질 수 없는 시간이고요. 후자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과거와 현재 미래로 우리가 구분해서 임의적으로 만든 관념의 \'시간\'을 뜻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결론은 관념의 시간에서 벗어나 현재의 나자신을 직시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항상 뒤돌아보고 과거로부터 축적된 지식을 통해 살아가려고 합니다. 결코 이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습니다. \"어떤 문제를 낳게 한 것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라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명제가 제가 한 말을 뒷받침해 줄 것 같습니다. 이제 이해가십니까?
과거의 축적된 지식을 통해서 문명이 진보된거 아닌가? 사고방식의 문제랑 결부짓는건 아닌거 같다 그건 그렇고 관념에서 벗어나서 나자신을 직시하라는 말이 도대체 먼말이냐고? 이렇게 모호한 말은 첨본다 가능한얘기야? 증명좀 해봐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국한된 내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그리하여 관념,이데올로기,지식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의 거리두기를 통한 현실직시를 말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내가 무언가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 분노는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 입니까? 현재의 내 자신이 분노를 유발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조각 되새김질을 통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현실 직시를 하는 것 입니다. 이미지화 된 것에서 벗어나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거리두기를 통해 마주합니다. 결코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또한 지금 오덕훈님께서는 제가 한 이야기를 테크놀로지 차원의 경제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제가 하는 말은 무언가 성취하여 더 이득을 남기자는 자본주의적 논리가 아님을 밝힙니다.
지금의 말로는 아무런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추천합니다. 조금 더 쉬운 책으로는 차드멍탄의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도 괜찮습니다.
관념,이데올로기,지식으로부터 벗어난다는게 가능한 이야긴가요? 자기최면 같은거를 말하는건가? 매일아침 거울보면서 하는 그런류의 것? 분노를 느끼지만 분노를 안느낀다고 최면을 걸라는 얘기? 표현은 좋은데 현실가능태인가 불가능태인가?? 그런거는 생각안하고 글쓰시나요?
몇일전 승승장구에 나온 혜민스님인가? 하버드 출신 그사람 책읽고 글쓰신건가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것들? 그런 3류 싸구려 베스트셀러??
시간은 과거는 죄책감을 말하고 미래는 죽음을 말하고 있다. 관념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은 또 하나의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끌 뿐이다. 그것이야 말로 도망치는 것이고 직사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선험적이라면 시간이라는 이름도 선험적인 것이니 그것을 부정 할 필요는 없다. 언어가 후험적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하이데거가 말하듯 언어 그 자체도 본래적으로는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해라.
이성이 선험적으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언어가 선험적임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로고스는 이성과 언어의 의미를 다 담고있다. 말씀이라고 번역되는 이유고 같다고 생각한다.
가능함과 불가능함을 재는 잣대 또한 본인의 주관적 판단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본인이 함에 있어서 한다는 강박은 또 다른 사막으로 내 자신을 이끔을 인지해야합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무언가에 집중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명상을 해보심이 어떠할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