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현실적인 얘기다.


밑에다 쓴 것들인데,
이제 밑에것들을 좀 더 구체적인 수준으로 번역하면서, 글을 쓸려고 한다

이유가 몇 개 있는데
첫째 - 저렇게 써놓으면 내가 나중에 봐도 이해를 못한다
그래서 구체화시켜놓는 작업이 필요하다.
둘째 - 기억은 기호로 하는 게 아니다. 실제 오브제로 해두어야 기호로 번역이 된다.
달리 말해서, 노트에 기호를 끄적거리고 암기하려고 하는 건 잘못된 접근이다. 대개 좆고딩들이 실수하는 건 여기에 있다.
인간의 인지구조는 그렇게 되어있지 않다. 오브제를 직관하면 자연스럽게 기호로 번역이 된다. 이 인과를 이해해야, 공부도 여기에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구체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질문을 하나 해보자.
실존주의가 뭐냐?

너가 만약 이런 질문을 받으면 넌 어떻게 대답할래?


니가 책을 많이 읽었건 덜 읽었건 
니가 똑똑한지, 교육받았는지를 테스트하는 잣대가 뭐냐면, 대답하는 방법과 내용에 달려있다.


이 물음에 대해서 답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는 게 아니다.
안다 하더라도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는 게 아니라고 간주된다.

직감적으로, 감각적으로는 안다고 웅얼웅얼 거릴 순 있을지 몰라도
분석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평가원에서는 후자를 잣대로 충족되면 안다고 하는 것이고, 못하면 모른다고 본다.

이것은 시험을 예로 들면 알 수 있다.
주관식 문제가 나왔을 때, 니가 답을 채우지 못하면, 넌 모르는 것이다.

스마트 싱킹의 저자, 아트 마크먼은 이를 두고 '설명깊이의 오류'라는 말을 쓴다.
사람들은 안다고 하지만, 그것은 대개 잔상으로 아는 것이고, 실제 원리를 아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예컨대
너가 지금 당장 
"전구에 빛이 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터넷의 속도가 빠른 이유는 무엇인가?"
"여자가 내숭을 떠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을 과학적 수준에서 설명해보려고 해봐라.
즉 원리를 설명해보라는 것이다
어떤 원인이 있어서 그런 결과가 되었는가?

이를 설명하려고 해봐라.
단순하게,
"그거 때문이지"라는 식으로, 퉁 처리하지말고, 증명해보라는 얘기다.

우연찮게 알 수는 있다. 그것이 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과학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설령 니가 말한 게 맞다 하더라도, 너는 아는 건 아니다.
맞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는 얘기다.

이것은 나중에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창조를 하게 될때,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다.
아는 게 없으니까 떠올리는 게 없는 것이다. 잔상으로 아니까 잔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니가 여자에 대해서 안다면, 뭐를 아는가?
여자에 대해서 얼마나 원리적으로 이해하는가?
그걸 모르면 넌 여자를 대할 수 없다. 안다고는 하지만 잔상과 편견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너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제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 얼마나 골치아픈 문제인지, 대강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질문에 답하는 수준이 위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되었을 것이다.

크게 2가지로 나누면 좋다.
첫째 - 작동-원리를 아는 것.
둘째 - 잔상으로 아는 것

첫번째가 추구해야할 것이고
두번째는 지양해야할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두번째에 해당한다. 실제로 나도 그렇다. 나도 잘 모르는 건 대개 잔상으로만 아는 것들이다.


오로지 관심가진 것, 나를 괴롭게 한 것에 대해서만 작동을 연구했을 뿐,
그 외의 것은 그정도로 몰입해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감정과도 연관되니 만국 공통일 것이다.














이제 제목이 던진 물음을 연구해보자.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이 뭘까?

밑에 쓴 글에서 제시한 방법은 
사례부터 떠올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례를 직관하여, 속성을 찾아내라는 것이다.
퍼스식으로 말하면 자연스레 발견한 '효과'를 지칭해라는 것이다. 



다시 물어본다.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너는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는가?
사전의 정의를 끄집어들이는가?
그러면 그 발화가 나왔을 때, 니 머리속의 인지과정을 내게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떻게 저 발화를 끄집어냈느지 하나하나 설명할 수 있겠냔 말이다. 어쩌면 진짜 진리는 거기 있다. 
니 머리속의 과정이 가장 리얼한 것이기 때문이다.

밑에서 설명한 메커니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발화과정을 갖는다.

첫째
실존주의에 해당하는 사례를 떠올린다.

둘째
그 사례를 직관하고 인식하여 속성을 끄집어낸다. (또는 그 사례에서 발견되는 효과를 확보해둔다. 이후 지칭한다.)

셋째
개별사례에 해당되는 부분은 일단 제거한다.
즉, 개별적 차이는 제거한다. 이후 공통되는 것이 잡힌다.

넷째
그것을 발화하면 추상적 수준에서, 실존주의의 정의를 언급하게 된다.



이게 맞냐 아니냐는 
이제 이 글을 쓰는 내가 실존주의의 사례를 아냐에 달려 있다.
안타깝지만
내 인지 슬롯에는, 저 실존주의의 사례가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수집했던 기호와 정보에 입각하면 다음처럼 나온다.
(내가 지금 굉장히 솔직한 발언을 했다는 걸 이해했다면 너는 인식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다.)





위의 것을 적용한
실례를 보자.
 
첫째 [실존주의에 해당하는 사례를 떠올린다.]
샤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 앞 부분에 서술했던 것 중 일부는
실존주의가 '비관'적인 것이라고 취급되는 것을, 반박하는 과정이 들어있다.

거기에 쓰여있는 글 몇 개만 추려서 각색을 하면
'실존주의가 인간의 나약함을 건드리고 있고, 수치심을 건드리고 있고, 마치 비관으로 몰아가지만, 그것은 잘못된 이해라고 말한다.
'실존주의가 다루는 것은 더 많이 있겠지만 내게 걸려든 것은 다음의 단어들이다.
 선택.
 수치심.
 불확실함.
 자유.

나는 샤르트르의 그 책에서, 이 정도의 데이터를 뽑아낸다. 이후에 내가 답변할 모든 기호의 출처지는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 [그 사례를 직관하고 인식하여 속성을 끄집어낸다. (또는 그 사례에서 발견되는 효과를 확보해둔다. 이후 지칭한다.)]
위의 것이 그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셋째 - [개별사례에 해당되는 부분은 일단 제거한다.]

'실존주의가 다루는 것은 더 많이 있겠지만 내게 걸려든 것은 다음의 단어들이다.
 선택.
 수치심.
 불확실함.
 자유.

나는 이것을 택했다.
이것이 그 책에서도 발견되는 추상적 부분이고, 내가 선택해서 걸러낸 부분이기도 하다.


넷째 - [그것을 발화하면 추상적 수준에서, 실존주의의 정의를 언급하게 된다.]

이는 세번째의 것을 발화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렇게 나오게 된다.







물론 이것은 문제가 좀 있다.
왜냐?
첫째에 해당되는 건
소위 말하는 '질성'을 지시해야 한다.
실존주의라는 '명명된 것'이, 잡힐 때에 쓰인 질성적 영역 말이다.

지시되고 명명될 때,
그에 해당되는 곳.

다시 말해서
선택
수치심
불확실함
자유

이것이 가르키는 영역은 어디인가?
그것은 실세계다.

소위
상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이 그 상황 내에 존재하고 있고
선택을 해야 되는 순간에 놓여있고
수치심을 느끼고
불확실함을 느끼고
거기에서 자유도 갈망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
너무나 매력적인 여성을 지하철에서 보았다.
다가가서 말 걸고 싶다.
근데 주변에 사람들이 눈치를 준다. 
튕기면 창피하다. 또한 사람들이 다 비웃게 되면 창피하다. 이것은 수치심이다. 이것이 선택을 가로막기도 한다.
자유를 갈망한다. 나는 이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다.

대쉬하느냐?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느냐?
나는 이 기로에 서게 된다.




이것이 사례고
이것을 떠올리는 순간,
저것에 해당하는 기호들이 나타나게 되고 (이것이 질성이 기호로 번역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의 용어는 SP로 환원된다.)
이것들을 하나로 다시 묶은 것이 '실존주의'라는 표현이다.





개별사례의 차이점이 서서히 제거되고, 공통의 것이 남게되는 그 과정이 보이는가?
그걸 알면 됐다.

그리고 이게 인식의 작동순서이기 때문에,
이 순서를 염두에 두면서 머리를 쓰고, 발화를 하는 것이다.

근데
피상적인 수준에서,
마주하는대로, 머리속을 쓰게 되면, 이런 접근이 불가능해진다.
왜?
상대는 '실존주의가 뭐냐고'물어봤는데, 마치 이 물음은 곧바로 추상적인 기호부터 떠올려야된다는 듯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동과정을 보면, 그런식으로 접근하면, 절대 떠올릴 수 없다.
기호는 번역된 것이고
기호 자체를 떠올리는 건, 임팩트가 약하기 때문에 잘 환기되지 못한다.

그러나
질성을 먼저 떠올리면
즉 저 지하철에서의 헌팅의 딜레마를 떠올리면,
금방 그에 해당하는 기호들이 번역된다. 여기에서 개별을 제거하고 공통을 남기면 추상적 수준에서 기호가 나오는 것이다.

작동과정이 이러한데,
이렇게 접근하지 않으면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위가 아니라 작동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특이한 접근이다.
피상적인 수준에서 보지 않고,
작동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즉 서로는 마치 피상을 두고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차피 사람의 머리속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되는지는 뜯어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계속 유아적인 순환에 빠지게 되는데,
일단은 이 과정이 원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일단은 이렇게 해두자.
이 견해는 나만 가진 게 아니다.
가깝게는 뇌과학자들이 채택하고 있는 것이며, 나는 그들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를 좀 더 현실적인 수준에서 표현해본 것이다.














혹시나 해서
왜 저렇게 두 개를 쪼개서 설명했는지 말해주면

첫번째 사례에 해당하는 건,
내가 '실존주의'와 관련되어, 내가 접근한 사례를 말한 것이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라는 책 앞부분을 보았고,
거기서 내가 어떤 부분에 '눈'을 두었는지, 그 흔적을 제시한 것이다.
이게 내가 실제로 내 머리속에 들어온 것들을 보여준 것이다.

앞서 내가 말한 것이, 진짜 리얼한 것이란, '그 발화가 발생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부분에 해당한다. 나는 책이라는 현상과 마주했던 경험을 말해준 것이다.
이게 첫번째에 해당하는 것이고

두번째로 밑에 맨마지막에 언급했던 질성에 대한 부분은
저 기호가 가리키는 곳이 어디냐는 것이다.
즉 '선택'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이것은 어디에 해당하는 것이냐?
이것은 어떤 상황을 가정하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는 기호다.
그래서 임의로 '지하철에서 이상형과 조우한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소위 이런 걸 사례라고 하기도 하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뭐냐면
이 사례를 떠올려야만, 머리속에 기호가 나온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어떤 글이 너무나 복잡하게 쓰여있으면, 능동적으로, 명시되어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글에 해당하는 '사례'를 찾아보자. 이것은 수학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접근법인데, 해당되는 예를 찾아보는 것이다.
설령 상대방이 그 예를 제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뭐라고 하든간에, 내가 능동적으로 찾아보는 것이다.
이 상대방과의 리듬을 의도적으로 깨고 능동성을 끄집어 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인간은 알게 모르게 주변과 동화되려는 습성이 있어서, 오히려 이게 이해에 방해를 주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하자.
'실존주의란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사례부터 떠올려야 한다.  
바로 여기서 번역되는 게 기호이기 때문이다. 발화하면 그게 물음에 대한 답이 된다.

따라서
이 때에 사례로서 [지하철에서 이상형과 마주한 상황]을 떠올려서, 그것에서 직관되고 인식되는 것들을 기호로 번역하던가.
아니면 또 하나의 사례로서 [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을 읽었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서, 그것을 기호로 번역하던가. 하는 것이다.

둘다 상황이다.
하나는 지하철에서 조우한 상황이고
하나는 책을 읽는(은) 상황이다.


여기에서 느껴지는 공통적인 것,
몸의 느낌을 느꼈다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