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가 말한 것은, 의미부분과 명명부분의 구별을 말한 것이다.
다시 보자.
퍼스가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다
- 기호는 실세계의 행태에 국한된다.
- 기호는 실제적 효과를 지칭하는 것이다.
\'퍼스의 원리, 즉 실용주의의 원리\'라고 불렸던 것을 제시하였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대상에 대한 사고의 완벽한 명확성을 얻기 위해서는 […] 그 대상에 대해 우리가 어떤 감각을 기대하는지, 그리고 어떤 반작용을 대비해야 하는지 등 그것과 연관하여 인지가능한 실천적 효과만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효과에 대한 관념이야말로, 그것이 적극적 의의를 갖는 한,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갖는 관념의 전부이다.\" 

대상에 대한 관념을 의미 있게, 혹은 퍼스의 말마따나 \'명석하게\' 하고자 한다면, 그 관념을 그 대상이 모든 가능한 조건 하에서 나타낼 실세계의 행태에 관한 것으로 국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퍼스가 든 예 가운데 하나를 이용해 말하자면, 어떤 것을 \'단단하다\'고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이 유리를 긁을 수 있고, 구부러지지 않을 것이고 등을 의미하며, 그러한 실천적 효과야 말로 \'단단함\'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전부이다. \'단단함\'은 추상적 속성이나 본질이 아니라, 단단한 모든 것들이 행하는 바의 총합일 따름이다.






이 글들이 지시하는 것을, 잡아채는 게 먼저다.
이것이 언어의 가장 밑바닥에서 나타나는 원리라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사실 언어를 쓰다 보면, 
이건 정말로 인지언어학 이론 중, (인지과학이기도 한데)

정신공간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근데 이건 단순하게 보면, 공간 공간이 만나서 혼성한다는 것인데,
비유를 생각해보면 쉽다. 원관념이 보조관념으로. 이런 얘기가 있다.

더 쉽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이해를 하는데,
기저 영역이 목표 영역에 사상(mapping)되는 것이다.
근데 정신공간 이론의 차이는 형식의 차이가 좀 있다.

즉 기저 영역이 목표 영역에 사상된다고 하면, X집합->Y집합, 이런 느낌이 드는데,
정신공간의 경우, 공간이 여러개 있는 상태에서 혼성공간이라고 되는 쪽에, 쫙 들어가는 것이다.
달리 말해, 중심에 혼성공간이 있다고 하면, 입력공간 (혼성에 쓰이는) 들은 위성처럼 주위에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에 따라 바꿀 수 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너네들이 쓰는 모든 단어는, 이미 과거에 개념화가 된 기호들이다.
한자가 그렇고, 영어도 그렇다. 니네들도 이해가 안되는 것들은 사전을 찾거나 어원을 찾지 않나?

그렇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미 알고 있는 \'의미\'들을, 니 머리속에서 끄집어 내서, 각각 연결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걸 잘 생각해야 하는데 
독해를 한다는 건
마치 \'앞에 있는 글(언어또는 기호)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그게 아니다.
독서란 앞에 있는 것을 읽는 게 아니다.

앞에 있는 건, 누군가의 \'사고경로\'이고, 
누군가의 \'글 형식으로서 대처전략의 실현\'이었고,
어떻게 보면 그의 \'가이드\'에 해당한다. 즉, 자기의 \'구성\'은 이렇게 되어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독서란 무엇인가?
내가 그 사람이 쓴 기호를 읽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인지적 영역\', 이런 것은 내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고통 자체가 전달되지는 않는것처럼.


근데
그걸 읽을려면
그 사람이 쓴 걸 읽어야 되는데

그 사람이 매번매번 개념화를 한 것이 아니라 (그걸 글 속에 표시해놓은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공용으로 쓰는 단어를 써서 올려놨다는 얘기는

그 사람도 그것을 참조하여 쓰는 것이고
나도 그것을 참조하여 읽어야되는 것이다.

근데
내가 참조한다는 얘기는 내 머리를 쓴다는 걸 말하는 것이고
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내 머리를 써서 머리속을 구성하는 것이란 얘긴데
그래서 독서는 재구성 과정이 된다.




근데
그 앞에 있는 글과의 연결고리는 어떻게 되는가?



이게 재밌는 건데
앞에 있는 걸 보고,
다시 내 머리속을 반성하고
다시 앞에 있는것과 대조하고

다시 반성하고




이런 과정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독서는 이입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쓴 것을 내 머리속에 구성해보는 과정이다.










그러면 이 반성과정을 바탕으로
퍼스의 글을 살펴보면

이 사람이 지적하는 게
뭔지 금방 잡힌다.


그렇다
이 사람의 말이 맞다.

물을 만져야
축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근데
그건 다르게 말하면
물을 만졌다라는 경험의 표시일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여기서 인간 언어의 특이한데가 나온다
내가 \'명명 역할\'이라고 했던 게 그것이다.



물을 만졌으면 만진거지
축축하다는 표현을 또 달리 쓸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그 축축하다는 건, 물에서 왔잖은가?


마찬가지다.
내가 \'정말 저 년 때문에 돌아버리겠다\'라고 하면,


내가 돌아버리겠다고 하는 표현의 계기는 어디인가?
그건 저 년 이다.
저 년의 실천적 효과, 저 년이 나에게 \'인지가능한 것으로 전달하는 것\' 

근데 그것을 떠나서
애초에 출발점이, 저 년이었다는 얘기다.


근데
명명은 \'돌아버리겠다\'라고 나온다
이건 규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돌아버리겠다\'라는 기호 자체가, 독립성을 가지는 것도 아니며
이것 자체가 생명력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전은 (사전이 문제다 하여튼)
이것을 어떻게든지, \'동사\'자리에, 논의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지적한 것이 \'로고\'에 해당한다.
분명 기호는 실천적 효과에서 나온다. 그러나 어느순간 기호가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로고\'에 해당한다.









여기서 눈치가 빠르다면
의미부분과 명명부분의 차이가 나왔을 것이다.
의미라고 하니까 좀 그런데 질성이라고 바꿔도 상관없고
위에 글과 일관적으로 엮을려면 \'실천적 부분\'이라고 해도 된다.




다시 말해서
\'저 년\' 에서 비롯되는 명명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해보라.

저년은


돌아버리게 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사랑하게 되는 대상이기도 하고
계산하게 되는 대상이기도 하고
토끼를 떠올리게 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등등등







이렇게 해서 실재에 발을 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언어의 본질 중 하나라고 보는데,
결국 \'실세계의 행태\'를 어떻게 \'조작\'하고 있는가? \'구성\'하고 있는가? 
이 실세계와 인간 몸의 마주침. 이 과정에서 \'조작\'

이것이 진짜로
의식하지 못하면 나오지 않지만
의식하면 나오게되는 지점이라는 얘기다.




진짜 분명히 말할 것은,
니가 쓰는 모든 단어들
그것은 전부 과거에 개념화된 것들을

니가 매번 마주하는 것에 유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해석틀의 존재도 여기서 느껴질 것이다. 없으면 안보이는 것이다.)


이것을 꼭 자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