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가 한국에서 ‘재미없는 책’ ‘이름값만 높은 책’이 되어버린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한국어로 옮겨진 인물들의 설정과 관계다. 소설 속에서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29세이고, 주인공 개츠비 역시 그와 동년배이며, 개츠비가 영원히 사랑한 여자 데이지는 22세다. 아무리 미국 상류층이고, 90여 년 전 이야기라지만,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하오’ 체나 ‘합쇼’체라면, 이들의 반짝이는 젊음과 치기가 제대로 살아날 리 없다. 

또한 지금까지 많은 번역본들은 소설의 ‘위대함’에 압도된 나머지, 인물들이 지닌 결점을 적확히 그려내지 못했다. 인물들의 철없는 행동은 우리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순화되었고 이기적인 의도는 그 맥락이 증발해버리고 말았다(‘위대한’ 소설의 주인공이 설마 그럴 리 없어!). 그 결과 캐릭터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먼 곳의 존재로만 그려돁다.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개츠비는, 사실 근본을 알 수 없는 벼락부자이며 그 화려한 배경을 삭제하고 보면, 둔하고 범속한 청년이다. 개츠비가 평생을 걸고 사랑한 데이지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보다는 ‘영국제 셔츠’를 더 사랑하는 나약하고 철없는 여자다. 데이지의 남편 톰은 잔인하고 이기적인 존재이며, 화자인 닉과 맺어질 뻔한 골프선수 조던 베이커는 약삭빠른 거짓말쟁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이들을 지켜보는 화자 닉의 냉정하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을 통해 그려지는 인물들의 모순과 간극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이렇듯 속물적이고 통속적인 존재들이 갈등하고 부딪히는, 살아 숨쉬는 책이다. 옮긴이 김영하는 이 점에 가장 먼저 주목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그것은 한국말에 내재된 말의 위계 때문인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이전의 번역본에서는 어김없이 개츠비와 닉이 존댓말을 하고, 데이지와 개츠비도 존댓말을 하는 걸로 설정돼 있다. 그것은 어쩌면 20세기 중반의 우리 말글살이에는 적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1세기로 넘어온 지금, 고작해야 이십대 초반에서 삼십대 초반일 이 인물들이 서로 말을 높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

개츠비가 자기 인생을 걸고 사랑하는 이 여성은, 실은 그런 사랑을 바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의 주인공 ‘위대한’ 개츠비가 인생을 걸고 사랑하는 여자가 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여자라는 아이러니는, 사실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다. 그 결과 이전의 몇몇 번역본에는 데이지의 철없음, 무지, 방종과 나약함이 순화(혹은 미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데이지라는 인물은 종잡을 수 없는 모호한 존재로 보이게 된다. (…) 개츠비도 그걸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 아니 그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위대한 개츠비』는 상투적 로맨스의 공동묘지에서 부활해 하늘로 승천한다. --- 해설에서










소설가 김영하가 굳이 번역했다고 하는, <위대한 개츠비>의 해설 부분을 보자.
여기에 개츠비가 인생을 걸고 사랑하는 여자가, 그럴만한 가치까지는 없다는 데에 주목해보자.

사실 이건 현실에서 마주칠 수 있는 문제 중 하나다.
어떤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이 예쁘게 태어난다. 그리고 심지어 몸매도 좋다.

내가 정말로 어떤 지위를 갖추기 까지, 정말 힘들게 뭘 쌓아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이 여자는 사실 그렇게까지 힘들게 살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예컨대 쉽게 생각해서 원정나가는 여자를 생각해보자.
그런데 이 여자의 옆에 남자들이 달라 붙어서, 이 여자가 갖고 싶어하는 것들을 사주려고 했을 수도 있다고 해보자. 충분히 가능하다.
남자들이 이 여자에게 머슴처럼 굴면서, 이 여자에게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했을 수 있다.

여자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여자는 이 무리한 요구를 대처하는 전략으로 더더욱 자기 자신을 고집불통으로 만드는 전략을 쓰기도 한다.
왜? 상대 남자가 깔보지 못하게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곁에서 보면 개념없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남자에게 쉽게 주도권을 주지 않으려는 전략일 수도 있다.




만약
이 여자를 니가 마주했다고 해보자.
이 여자가 속물적이고, 명품을 밝히고, 남자의 능력에 대해서 거침없이 돌직구를 날려서 결핍감을 자각하게 만들고 (열폭하도록)

그러는 등등의 입장을 보여준다고 해보자.
그럼에도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이런 경우가 안 생기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는데, 사랑이라는 건 감정이고 무의식이다.

미워하면서도 (입으로 개썅년이라고 하면서도), 그 여자랑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설을 소설로 읽는다는 게 뭔지 모르겠으나,
지금 여기서는 전략적 입장의 충돌 이라는 차원에서 보자.
사실 극작가들 중에서도 이런 입장을 택하는 극작가가 있다. 행동을 세부적으로 쪼갤 때 '전략'이라는 개념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이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이런 사태를 겪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니가 사랑하는 여자가, 니가 생각하는 수준과 전혀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너는 이미 니 생각이 짙게 체계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수준으로 투영이 될 것이다. (이걸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너는 그녀를 그녀의 '입장'에서 보는 게 아니라,
니가 반성적으로 재구성한 입장에서 그녀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너가 재구성한 그녀가 있고, 그녀가 자기를 구성하는 입장에서의 그녀가 있다. 
니 눈에는 그녀가(외부의 존재)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니 머리속에서 재구성한 그녀가 있고


이후 '인지적 기능과 조작적 기능의 상호연관에 따라 '간섭'으로서 양방향의 피드백적 관계를 가질 것이고,
그 이후 그녀는 계속 변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의 전략이 변하던가, 니 머리속에서 그녀를 '규정'했던 것들이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하고 싶은 건
주관의 전략적 입장의 충돌은 언제나 고급스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꺼내들어야 할 카드는 달라진다.

개츠비는 저 여자에게 자기 카드를 꺼낼 수 없다. 여자에게 그 카드는 '거부'할 패로 판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그 순간 자기것을 '환기'시킬 수가 없으므로, 그 순간 자기 정체성을 일부 상실할 수도 있다.


(물론 개츠비가 전략의 달인이라고 가정해본다면, 이 문제는 말끔히 해결된다. 
 왜? 전략의 달인은 먹히는 전략을 보유하는 것으로, 전략적 입장을 내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개츠비의 존재는 무슨 규정이 있겠는가? 그는 매순간 카멜레온처럼, 환경에 최적화된 전략을 보유하는 것으로, 자기 정체성을 '생성'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