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잔소리 좀 하고 시작하자.



나는 전형적인 독자를 원하지 않는다. 
한 주제에 대하여 같이 사고를 하고 고민할 사람을 필요로 하지

내 글을 읽고 의도를 추측하고 캐낸 뒤에
갑자기 그것을 댓글로 
이런 식, "너 이거 때매 썼지?" 하는 이상한 탐정 지랄 놀이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거다.

그거 알면 뭐할래?
알면 내가 의도한 걸 하냐 마냐의 문제인데
씨발.

ㅎㅎ.

그리고 그런 건 비판적 사고만 갖췄다면 초딩도 찾아낸다.
그게 문제가 아니란다.


따라서 이 글도, 그러한 제안으로 읽고
니가 할 건지 말 건지를 생각하는 차원에서 접하도록 해라.



내 글 읽어서 주장과 근거를 찾고 이것의 진리를 따져서 뭐 할래? 
진리를 따질려면 애초에 니가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ㅉ.
게다가 귀납의 한계상, 연역의 한계상, 프레임의 한계상, 포지션의 문제상, 제대로된 기준을 갖추기란 힘들단다.

내가 댓글 쓰는 사람들 중에서,
내 글에 대해 아는 척 하는 새끼들 글 대부분 무시하는데, 그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니가 맞다면 니가 맞는 이유를 밝혀라.
밑도끝도없이 싹 싸지르고 지랄 때리지 말고, 니가 어떤 기준에서 맞는지 니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면, 
너는 은근슬쩍 니 말이 맞다고 어리광 부리는거나 다를 바 없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내 말이 맞다고 해줘!!! 빨리!!!" 이런 상태에 해당한다. 내 대답은? 좆까라 이거지.


그래서 나는, 내 글을 보고 난 뒤, 별도로 자기 연구를 시작한 사람을 높게 평가하고
내 글을 다른 외부의 개념으로 명명하면서 덮어버리는 이상한 행동에 대해서 경멸을 한다. 
결국 자기 반성적 구성의 문제다. 결국 이게 시작점이라면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하는 게 이득 아닌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하자.
















논리학 책을 가끔 보면
개념
판단
추론

이런 순서로 설명이 되어있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내 생각에는 이 순서가 좀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편의상 그렇게 순서를 잡는 게 익숙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순서로 잡으면,
내 생각인데

판단
추론
개념

이렇게 가는 게 적합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개념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문장 단위로 설명한다. 애초에 판단이 있었다는 얘기지.

그러면 판단부터 시작하는 게 적절하다.
그리고 판단부터 시작하고 나서 그것에서 개념화 작용이 일어난 것.
그리고 그 어떤 부호들을 압축시킨 것.

내 생각인데
이게 바로 개념이고. 이게 단어들이다.
단어의 탄생은 이렇게 나온다고 본다.









인지언어학에서는 문장에 대해서 뭐라고 하냐면
'발생하는 사건들이 존재하는 상태'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사건들의 상태를 말한다. 또는 사물들의 상태라고 해도 되는데
이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문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핵심은 관계에 있다. 이 인지언어학에서 '개념핵'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건 관계에 해당한다.
관계가 있다는 말은 참여자가 있다는 말이다. 즉 참여자가 얽힌 상태를 말하는 게 '상황'이고. 
이 상황에 설정되는 것.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적당한데, 이런 것이 있다. 그것을 '배경'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장소, 시간, 환경 이걸 말한다. 관계가 있다고할 때 이것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내가 I love you라고 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것은 '나 너 사랑해'라는 고백일 수도 있지만
상태라는 단어로 살펴보면, 내가 지금 그런 상태에 있다는 나의 상황(정신상황)을 노출하는 것이다.

즉 '나와 너'라는 참여자가 있다면,
이 둘의 관계를 설정했다는 얘기이고, 이와 관련된 배경이 있다는 말은, 내가 어디에서/언제/어떤 이유로(조건으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얘기가 있다.


근데 여기서 진짜 중요한 건
이 단어가 생성되는 현장이 어디냐는 거다.
내 머리 아닌가? 내 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작업 아닌가?

따라서 이것은 자기 의식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므로
이 순간 내 머리속에서 이런 단어단어들이 구성되는 현장이 있다.


단어가 나오기 이전에
인간의 머리에서 작동되는 어떤 기구들이 있고 (비유컨대)
그것들이 계속 작동되면서 인간의 머리에서 언어를 생산해낸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어로 생긴 게 아니라서, 이것을 언어로서 접근하는 건 힘들고,
이 순간에는 소위 직관이라고 하는 것, 즉 '봄' '느껴봄' 이 '봄'이라는 표현에서 자주 나오는, 감각/지각의 활동을 통해서 이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접근을 하여 들어갔을 때
이것을 보다가 어떤 순간 어떤 것이 나오는가? 이 관계를 잡아내면

바로 그 어떤 순간(어떤 때에) 해당하는 것이, 계기가 될 것이고
바로 그것이
정말로 유일하게
신체 내에서 찾아낸 언어 스위치가 되는 거다.



내가 전에 썼던 글 중에서
목적어라는 것은, 주체가 행위한 것의 대상.
이런 것으로도 갈 수 있지만

또 다른 식으로는
내 시선이 밖으로 나갔을 때,
그것을 느낄 때,

바로 이 순간 목적어(라는 단어로 명명된)가 발생한다고 했다.



"내 팔을 봐라"
라고 할 때, 나는 분명히 지금 '팔을' 이라는 것으로 '팔'을 목적어로 취급했는데,
이 때에 실제로 이것의 계기는 뭐냐?

그것은 시선의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
그리고
이렇게 글을 써줘야 분명히 와닿을 것 같은데

지금 내 글이 하나의 깔끔한 문장을 단위로 보여주고 있어도
실제로 내가 이것을 하나하나 타이핑 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라.


그러면 실제로 어떤 순서에 의해서 쓰였을까?
-------------------------------------------------------------------------------------------------------





이  ---- 로 가둬놓은 쪽에 해당하는
글을 가지고 예시를 보여주려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런 얘길 했다고 하지.
"나는 문장마다 쉼표를 넣어서 읽으려고 한다"

이런 얘길 했다고 하지.
이 사람이 지금 하고자 했던 게, 지금 내가 하려는 것과 약간 유사한데가 있다.
문장은 완결된 하나의 문장처럼 독자에게 다가가지만
실제로 그것은 작성자가 쓰면서, 속으로 되풀이했던 것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하나 쓰면서,
하나의 의미에 대해서 머리속에서 고민하고, 하나하나 선택한 것이다.
손으로 표현하면, 내 계획에 따라 내가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서 여기다가 배열시킨 것이다.





다음을 보자.
[그리고
이렇게 글을 써줘야 분명히 와닿을 것 같은데]


이 문장은 실제로 어떻게 쓰였냐면 다음과 같은 순서를 밟았다.


그리고 
(한 텀 쉬자)

이렇게 글을 써줘야
(이후 계획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하고 있고, 
 글'이라는 오브제를 떠올리면서,
 여기에 내가 조작을 가한다는 느낌을 갖고서, 그에 합당한 표현(형태)가 무엇인지 잠깐 머리속에 물음을 던졌고
 순간적으로 '쓴다'라는 표현이 잡혔다. 그래서 그걸 갖다 붙인다.)

분명히
(상태에 대해서)

와닿을 것 같은데
(어떤 것이 움직여서 내 쪽으로 온다는 이미지를 얼핏 갖고 있었다.)




위 설명들을 다시 조립을 해보자.

계기 --------------------> 표현
한 텀 쉬고,                           그리고
계획-직접 보여주자              이렇게 글을 써줘야
어떻게? = 뭔가 보여주자       이렇게 글을 써줘야

그렇게 될 것이다 (추측)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추측)        와닿을 것 같은데




다시 말해서 
이것의 지시하는 게 뭐냐면
내 마음속에는 어떤 계기가 있다.
의지라고 부르든 뭐라고 하든 간에
어떤 마음의 충동이 있고, 그것을 갖고서 재빠르게 그것에 해당하는 것들, 
또는 그것을 표현시킬 수 있는 것들
말그대로 의사표현의 목적을 달성시키는 유사표현들, 그게 뭔가를 내 스스로 잠깐 떠올린 뒤에, 이 단어들을 잡은 것이다.



나는 진짜 이렇게 글을 썼다
지금도 위의 샘플과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쓴다.


다시 한번 더 예를 들자.
[나는 진짜 이렇게 글을 썼다
지금도 위의 샘플과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쓴다.]

이 문장을 내가 쓴대로 끊어보면

나는 진짜/ 이렇게/ 글을 썼다
지금도/ 위의 샘플과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쓴다.



나는 이런 식으로 끊었는데
여기에는 단어단어가 주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소위 '틀'이라고 하는, 추상적 층위에 해당하는 부분이 더 먼저 잡힌다.


즉,
일단 주체로서, 참여자로서 누구냐?
그게 '나' 라는 것에 해당하고

'이런 식' 이라는 것은, 
어떤 방법, 을 지시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이 표현은 '방법'이라는 것에 큰 차원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내가 단어를 쓸 때에는, 항상 그 큰 차원을 알게 모르게 건드리고 있다. 이것이 순간 쫙 잡혔다가 순간 거기에 해당하는 것을 잡게 되는데,

이 때에 사고과정이 있다.
지금 내가 '~에' ~해당한다
이런 표현을 참 많이 쓰는데
진짜로 마치 이런 어떤 거대한 차원과 연결되는 듯한 어떤 느낌이 있다.

이걸 판단의 기본 형식 중 하나라고 하지.
'속한다' 라는 것.






다시 저 문장을 선형이 아닌 식으로 표현해면

나는 진짜 
이렇게 
글을 썼다
지금도 
위의 샘플과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쓴다.


나는 이렇게 글을 쓴다.
단어가 이렇게 떠오르고
이 단어에 해당하는 계기적 측면과 범주적 측면을 동시에 건드린다.

계기가 있으면 
그것과 관련된 범주를 떠올리고
범주를 떠올리면
그 안에서 내가 선택할 것을
떠올린다



내 생각인데
문장을 선형화하면 안좋은 것 같다
내가 진짜 글을 쓸 때는



먼저
대상을 떠올리고
그 대상과 관련된 조작을 떠올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래서 저렇게
나는
지금도
위의 샘플과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쓴다

이런식으로

내 머리속은 작동한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사람이 '나는 오늘 떡볶이를 먺었는데 너무 매워서 이 떢볶이의 전생은 나라잃은 백성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문장을 냈다고 해보자
형식이 어떻게 표현되었든
이것을 진짜 머리속에서 떠올리고 쓸 때의 과정은 어떻냐면

계기가 있고
범주가 있고
그리고 잡아내는 순서가 있는데

첫째로
사물/사건 부터 먼저 잡고
그것과의 조작을 살피고
그 다음
그것을
하나하나 표현한다


따라서
위의 문장도 사실 처음에느


떡볶이
먹다
맵다

떡볶이
전생
나라잃은 백성



이것 밖에 없다는 거다.
나머지는 여기서 퍼져서 나타나는 것인데







지금 이렇게까지만 해두자.
저게 뭔지 찾아내자는 게 이 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데
번역을 좀 해야 한다.
조작어로 바꿔서 이해해야 머리속에서 빨리 이해가 된다.

무슨 말이냐면
정의가 있다고 할 때, 그 정의를 조작관계로 바꾸면 이해가 더 빠르게 된다는 거다.

이런 정의가 있다고 하자
[용언이란 동사와 형용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게 있다고 해보자
이걸 조작관계로 바꾸면 더 빠르게 머리속에서 잡히는 느낌이 있다.
다음과 같다

[용언이 되려면, 동사/형용사이면 된다.]
[동사/형용사가 되면 용언이 된다, 용언이란 그럴 때, 그 둘을 포함할 때, 그 포함시키는 어떤 관계의 상위를 표현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걸 보면 알겠지만, 여기에 내가 고민하는 게 나온다.
 이 정의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정의를 내릴 때, 인간의 머리속에서 작동하는 어떤 특징적인 게 있는데
 이걸 보면 알겠지만 '포함관계'라는 게 보일 거다.
 이 포함관계가 작동해야, 인간은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왜냐?
 어떤 원소에 대해서, 내가 그것을 포함한 다음에,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거. 그게 소위 명명 작업인데,
 이것은 포함관계를 계기로 해서 성립된다. 포함할 수 없으면, 이런 식의 정의잡기도 안된다.

 즉 여기서 진짜 남는 것은, 포함관계, 어떤 공간적으로 포함된다는 관계에 있는 것이고
 이거 하나만 제대로 기억하면, 나머지도 이것으로 묶이는 것이다.

 왜?
 우리가 정의내릴 때, 공통적으로 어떤 것을 사용하고 있느냐? 바로 이런 걸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학생이란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일컫는 말이다]


라고 할 때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건, 저 단어들의 의미를 찾는 게 아니라,
저 단어들이 어떤 포함관계에 있는가?
이를 잡아내는 것이다.

왜냐?
내가 정의를 내릴 때에는
어떤 현상/사건/사물/대상 등등등 이런 것을, 먼저 떠올린 상태에서, 이것을 '칭하는' 것을 떠올리는데,
바로 이 관계 자체가 포함으로 엮여있다는 것이다
앞에 있는 것이 포함관계에서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칭하는 것'은 바로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 있는 것이 안에 있는 것을 덮는 식이고

그리고 그 관계 자체를 들고 다니는 것이다.


이것을 지갑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동그랗게 생긴 동전지갑을 예로 들어보자
동전이 안에 있는 곳이고 (위의 문장에서는 앞에 있는 것)
그리고 이 동전을 담는 것이 지갑이다. 
그래서 동전은 지갑 안에 들어가고, 지갑의 입장에서 보면 지갑은 동전을 집어 넣는다.


그리고
이 둘을 들고 다니는 것이다
이것을 지갑을 들고다닌다고 할 수도 있고
동전을 품은 지갑을 들고 다닌다고 할 수 있다
근데 이 때 유념할 것은, 이 관계를 잡는 것이다.

안그러면
'선형'으로 나타나는 이 문장에 빠져버리게 된다.



문장자체가 나타날 때는 그런 걸 고려하지 않는다
쓰는 사람은 그렇게 관계를 갖고 썼을지는 몰라도, 앞서 말했지만 주의가 일어날 때는 그 전의 것이 망각되는 법이다.
이게 머리속에 잡히지 않으면 안보인다는 얘기다. 망각이라는 것도 의식한 다음에는 그런 것의 발생 자체를 의식하게 되지만,
이렇게 하지않으면 잡히는 게 없다는 것이지.



다시 말해서
어떤 문장이 있다면
그 문장에는 반드시 계기가 들어있고, 범주가 들어있고, 그리고 이런 것과 관련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관계'가 계속 작동하고 있는 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포함관계'라는 것이다.


단어는 언제나 포함관계를 선제하고 있다.











일단 나는 지금은 이렇게 끝맺어 두려고 하는데
이 글은 계속해서 앞으로 언급될거고
이 부분이 계속 구체화되거나, 아니면 이 부분을 좀 더 파고들거나,
이 부분과 관련된 논의를 추가시켜가면서 확장시킬 것이다.


신 오르가논이라는 것.
내가 생각하는 단어가 이건데

오르가논의 새로운 업데이트가 필요하단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최근의 모든 과학적 성과를 통합시킨 것으로서 나타나야할 것이다.

인간이 사고를 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 있어.
그리고 인간이 머리속에서 어떤 말을 꺼집어낼 때,
모든 문장에 눈을 두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부분에 주목을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문장이 하나 쫙 나온다.

이건 글을 쓰는 내가 항상 느끼는 거기 때문에
분명 그게 있다.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을 보면


지금도 썼듯이

'~~~를 보면
'~~~를 보자
'~~~할 때, 순간,
'~를 생각한다. 느낀다.
'~은 이거다. 아니다. 틀렸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전에도 말했듯이
이런것들은 실천적 효과의 지칭에 해당하고
내 표현으로 하면 대유법의 원리를 깐 상태에서 단어를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신체의 계기로 보면,
'눈'
'지각'
이런 데 있고,

그리고
범주적 차원에서 좀 더 큰 차원으로 얘기하면
'감각지각인지'에 해당하는 틀 내에서 작동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앞서 내가 
'추측'이란 계기에서, ------------------------------> '이렇게 써주면 이해할 것이다' 라는 표현을 보여줬고
이 표현,
'이렇게 써주면 이해할 것이다'라는 것이
실제로는 그 형태로 내가 머리속에서 떠올린 게 아니라,
'추측'하자면,
하는 식으로
계기를 먼저 떠올리고
그에 연관되는, 그 목적을 달성시키게 하는, 표현을 그 다음에 찾았다고 했는데,


여기에도
아직 언어로 다 명시하지 못한
계기들이 계속 작동하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하나만 말하면
이 '추측'이라는 계기를 먼저 떠올렸다는 게
저 문장이 나타난 원인이 된다. 말 그대로 계기니까.

나는 앞으로
추측이라는 계기만 갖고 있으면
'~주면, ~될 것이다'

라는 식의
표현을 쓰게 될 것이다.

그 앞에 것은
좀 더 이것과 관련된 세부적인 범위에 해당하겠지
(바로 이것도 하나의 계기가 된다.)





이것의 원리는
내가 활동할 때
행동할 때
운동을 시작할 때

내 몸에서는 이미 품었던 
어떤 것이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중심으로
나머지를 엮을 수 있을 때

그것이
보다 내가 글을 쓰는 순간을 중심으로
잡히는 
것들을
체계화시켰다는 얘기가 되며

내 생각에는
그것이 가장 실용적이다.

그리고 이 표현들로
나머지를 환원시키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것은 억지스러운 환원주의라기 보다는,
인간이 주의기능으로 인해, 자연히 '망각하고 있던' 것들을 복원시키고, 알아볼 수 있게끔 대처하는 작업이 될거라는 얘기다.



내가 밑에 그런 얘길 했었지?
자기 머리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것부터 설명하는 게 먼저고
그것만 설명할 수 있다면
생각 자체에 대해서는 그 이상부터는 전략의 문제가 되고, 재귀성의 문제가 된다고.

근데
오류를 가지고 세계를 보면
언제나 재귀적인 문제로 인해서, 복잡하게만 된다고.

균형을 잡을 수 있어야 되는데
나는 그 계기점으로
바로 이 신체가 작동되는 순간순간에 
그 단서가 있을거다는 가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게 맞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내가 매번 마주하는 게

글을 쓰는 과정이고
그 다음에 그 글을 읽는 과정인데

내가 그 둘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이게 문제가 있다고 본 거다.
내가 글을 쓸 때는 글을 쓰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데 (당연한 얘기인데)
왜 읽을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것이 문제이고
이 문제로 인해서
난독이 발생하고
오해가 발생한다고 보는 거다.






물론 더 다른 문제도 있지만
여러가지 문제를 지금 언급해뒀다

이제 나머지는 구체화를 시켜나가는 거다.




하나 또 예를 더 들까?
내가 지금 '예'라는 표현을 쓸 때
실제로 이게 어떤 계기에서 나올까?


바로
이건
증거 제출만이 아니라
개념화를 명확하게 해보자는, 차원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 그러그러한 게 있다
라고 쓸 때에는,
어떤 가정된 상황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일단 내 말에 의도가 무엇인지 좀 더 구체화시켜주자는 차원일 수 있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예 라는 것을 잡아서 배치한다는 건
글쓰기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내가 어떻게 사유를 개념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이고
그 계기로서
그 표현을 쓴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개념을 좀 더 명료하게 잡아보자)라는 게 계기고
그 다음에 이 작업을 실행하게끔 하는 표현으로서 '예를 들면'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읽다가
어떤 사람이
'예를 들면'
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으면

(그가 지금, 사유를 구체화시키고 있고, 개념을 명료하게 하려고 한다) 라는 계기로서 읽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그 사람이 썼을 때의
시점에서
그의 정신과정을 
염두에 두면서
읽게 된다.

이게 포지션의 문제야 결국엔.
책을 눈으로 보고 접하는 입장에서 보느냐?
쓴 사람이 썼을 때의 전략적 입장에서 보느냐?

이것이 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이게 비극의 시작이지.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또 다른 물음이 생긴다
나는 도대체 이 추리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내 추리 과정을 좀 더 조작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예컨대
위에 '예를 들면'이라고 해서, 나타난 설명을,
나는 어떻게 찾아냈을까?

이걸 내가 다른 사람 책에서 읽지는 않았거든.
저걸 방금 즉석에서 내가 생각을 해서 잡은 걸 내놓은 거다.




이유가 분명한 게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독서는 반성적 재구성 과정이기 때문에,
저자가 쓴 대로 읽지 않으면, 사실 그걸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가 없지.

그래서
사실 나는 책을 잘 안 읽는다
필요한 데이터가 있으면 읽을 뿐.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그게 내 인생에 어떤 혜택을 주지도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잘 안본다
다만 실용적인 목적으로 읽는 책들은 있다. 예컨대 감정에 대한 것, 정신분석, 마인드 컨트롤, 이런 책들은 필요해서 읽는 것이고,
나머지는 의사결정에 필요한 것만 찾아서 읽을 뿐,

내가 뭔가 남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책을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저런 식의 '예를 들면'이라는 단어를 분석한 책이 있느냐?
솔직히 난 모르겠다.




다음의 순서가 있는 것 같다.
첫째 - 예를 들면 이라는 단어 자체를 먼저 '본다'
둘째 - 이것이 어떤 계기에서 나왔는가? 선후 관계를 의식해본다.
셋째 - 가장 전형적인 것을 찾는다.
넷째 - 선후 관계를 의식한 것을 자꾸 비교해본다.
다섯째 - 내가 겪은 것 중에 있는지를 살핀다. 즉 내 시점에서 내가 정신운동을 했을 때의 상황을 떠올린다.
여섯째 - 그 때 발견된 것들을 잡아챈다.
일곱째 - 바로 그게 계기이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할 적합한 단어들을 찾는다. 그리고 배열한다.

다섯째에 해당되는 게 중요한데,
이게 내 반성적 부분이라
언어로 표현하는 건 한계가 있다.
어떤 느낌이냐면
내 몸에서 실천이 일어날 때
그 맥락의 느낌
바로 그걸 잡고서
그걸 표현하는 거거든.

그래서
내가 예를 들면
이라는 표현을 슬 때
나는 뭘 느꼈지?
이런 물음을 내 스스로 던지고
그 물음에 해당하는 내 체험적 순간을 찾고
그리고 그 순간을 찾아서 관찰하고
그 때에
내가 이것을 쓸 때에
계기가 되는 부분
즉 '나는 뭐할라고 그걸 했나?'라는 물음에 해당하는 순간.
바로 그것을 그대로 잡아서.
보니까.
아 내가 명료하지 못했던 것을 명료하게 하려고 할 때, 바로 그 표현을 썼구나
하는 걸 떠올린다

예컨대
(바로 지금도 예컨대 라고 표현하듯)
내가 언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상대방이 물은 것에대해서 설명을 해줄때
나도 그렇고 걔도 그렇고
명확하지 않은 게 있으면
나는 그것을 명료화하려는 차원에서
예를 들어주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경험적 순간
바로 그게 단서, 재료가 되는 것이고
나는 이걸 언급하면 되는것이다.
바로 그 단서 재료를 지시하는 게 '예를 들면'이라는 표현이니까.

어쩌면
가장 큰 차원은 의지일 수도 있다
명료화하려는 의지
그게 있기 때문이지.
물론 생물적 기능의 요구이기도 하겠고.







지금 이것도 굉장히 두루두루 보이게끔 진술을 했고
실제로 이게 내가 언급한 포함관계에 해당하는건데
이 단어들의 외연은 무엇인가? 직관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 부분을 봐야,
이 표현이 이해가 될 것인데

이것도 하나의, 도구적인 부분이다.
이런 작업이 항상 암묵적으로 요구된다.

수학자들은 공식을 보면 누가 시키지않아도 능동적으로 구체적 예를 살펴본다고 하지?
이 외연에 대한 부분이 바로 그것을 요구한다.

즉 외연은 어떤 의미로서, 사전적 정의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너에게,
어떤 정신적 활동을 하라고
요구한다.

바로 그 요구로서
그 단어가 잡힌 것이고

그 실천적 요구에 니가 응하지 않으면
너는 그 단어를 알 수 없다.



예컨대
계기 라는 표현도
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것의 사전적 의미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것을 어떤 사람이 쓰는 그대로 중요한 게 아니고 (보통 이런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근데 나는 그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이 어떤 실천적 맥락 속에서 잡힌 것인가?
이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은 메뉴얼 읽듯이 읽어야 한다.

수영교과서를 읽고
그 다음에 끝내면 그건 수영에 대해서 아는 게 아니다

수영교과서를 읽고
거기에 쓰여있는 실천적 부분을 잡아서
직접 하나하나 외연을 실천해볼 때에,
바로 그 때에
그 실천과 관련된 절차, 그리고 시간,
바로 그것의 '체험'
그리고 그것의 누적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반성'

이런 과정이 있어야
내가 수영을 알았다고 하는거다
글로 배워도 배우게 된다는 거다.



잘 생각해봐라
나중에 수영장에 가서 코치에게 수업받으면 뭘 배울 것 같은데?
바로 이걸 배우는거다.
수영장에 있는 코치는 사실 바로 이걸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걸 자기가 글로 쓰는 것이고,
결국엔 내가 책을 읽어도 이걸 배우고
그 사람에게서도 이걸 배우는데


책만 잘 읽어도
결국 그 사람이 하는바를 내게 이식시킬 수 있다는 얘기잖아?
근데 이게 잘 안된다는 얘기다


사람들이 서평쓰는 꼬라지만 봐도 대강 사이즈가 나온다
상대는 실천해보라고 쓴 글인데
그걸 읽고 서평하고 앉아있다. 미친 거지.


제대로 읽었다면
그것을 실천한 다음에, 자기 경험을 써야지 제대로 쓴거다.





















이 글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지금 올려둘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을 형식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지금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도 어느 순간에는
문제의식으로 정리를 해놓을 것인데,




나는 지금 몇가지를 간추려 둔다.


계기에 해당하는 것
추측
명료화하려는 의지
포함관계(포함시키려는 의지) (여기에 외연과의 관계도 있다.)
규정하려는 의지 (이건 이거다 저건 저거다, 딴 건 하지마, 이런식의)
시선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내놓는 것의, 어떤 목적, 핵심적 진술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언어에는 '계기'의 측면에서 알파벳이 되는 어떤 특징적인 것들이 있다.
근데 그것을 명시해서 체계화시킨 경우는 거의 없다.

사실 이것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철학자들 중에는 '선험적인 것, 선제'에 해당하는 것을 찾으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 있다.
왜냐?

인간이 말을 하다보면
무의 상태에서 말을 하지 않거든.

머리속에
어떤 특정한 스위치 같은 게 있어서
자기가 어떤 생각을 딱 하게 되면, 바로 그 생각에 해당되는 단어들을 찾고, 그것을 내놓고
하는 등의 작업을 거치는데

이게 뭔지 설명이 잘 안된다는 거다.
이게 도대체 뭔지.
이것의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는지.
이게 더 중요한 문제거든.

정의는 결국 그것도 인간의 정신의 문제 아닌가?
설령 그 사태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정의를 내린다는 행위 자체가, 인간이 개입된 것인데,

그러면 이 때의 어떤 마이크로한 부분이 뭐냐?
이런 물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거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인간이 독해를 할 때와 글을 쓸 때의 과정이 좀 다르다.
글을 쓸 때는 좀 더 명확하게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읽을 때는
그 리듬을 잘 모르게 된다.
그니까 쓸 때는 어디에 초점을 두는지가 분명하다.


지금 내가 쓰는 이 글에도
쓸 떄 
어디에다 주목했는지
굉장히 명료하게 나온다

대상이거나
조작이다


어떤 조작을 염두에 두는가?
예컨대 쓰는건가?
그러면 '쓴다'라는 표현을 넣는다.

이런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이런 뉘앙스가 명시되지는 않는다는 거지.

내가 답답한 건 바로 그 부분이고
나 뿐만 아니라,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많다.
철학하는 사람 중, 책을 20번 넘게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읽었을까?


그게 자기가 제대로 읽었는지
감이 안와서 그런거거든

단어 의미의 차원이 아니라
글쓴이가 쓸 때의 전략적 입장에서의 차원

이게 안잡히면
글을 못 읽는 거야.

근데
이걸 명시해둔 사람이 없다.

게다가 이걸 이해하는 것도, 자기 머리로 반성적으로 구성해야 가능하다.






골치가 아픈거지.





나는 이렇게 끝맺으려 하는데,
선제에 대한 것을 찾아두는 것.
이거 굉장히 중요하다.


내가 곧 쓸 글들이 이 '선제'와 관련된 문제와 연관된다.

개인적으로
'선험철학'이라는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는데,
이들의 고민이 지금의 나의 고민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머리작동 방식을 잘 염두에 두면, 선험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이 결정된다.


이건 예외가 없다.
내가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 오랜 반복끝에, 어떤 패턴이 내 머리속에 선험으로 잡혀있기 때문에 (생물적 문제를 떠나서, 내가 경험하고 기억으로 잡고 누적하고 그런 것들)
이것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거지.


그리고 이렇게 머리속에 규정을 어떻게 해놓냐에 따라
내 입장이 결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원칙을 설정하거나, 교육을 받아서 몸에 익은 것처럼)


내 생각에는
아직 명시되지 않았지만
어떤 구조가 머리속에 있으며

바로 그것이
인간이 아직 발견을 하지는 못했으나 (완전 명확하게는) 
어떤 아웃풋의 원인으로서
인간이 갖고 있는
어떤 특유의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 스위치 부분을 찾아내야해.

그게 이 글을 쓴 목적이고
이 글을 
좀 지저분하게
지금 이렇게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