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자체를 영어로 보면 어떨까?
한국어로 번역하지 말고
저 자체를 보면 말이다.

지시가 있겠지?
그러면
서술자의 존재도 있겠지? 즉, 화자의 존재가 있겠지?


그러면
화자가 저것을 발화한다
그럴 때
첫째 - 자기 지시가 있고
둘째 - 서술어에 해당하는, 조작관계를 지시하고 있고 (나는 일단 이렇게 본다)
셋째 - 목적어에 해당하는 지시가 있다. 즉, 대상의 지시가 있다.

이 세 개는 분해된 것이고
이 세 개를 묶으면 저 문장을 칭하는 하나의 명명을 해낼 수 있을 거다
뭐라고 부를까?

나는 앞에서, \'사건들의 상태\'라는 정의를 잠깐 보여줬는데,
이 때 \'상태\'라는 것을 잘 봐야 한다.




그러니까 여기가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지점인데,
i saw the matrix라는 표현에는 \'상태로 봐주세요!\' 라는 식의, 가이드가 명시되어있지 않다.


그저 i saw the matrix 라는 기호만 있을 뿐
이걸 어떻게 읽어달라
어떻게 읽어주시라는

그런 식의 요구가 여기 명시되어있나?
아니라는 거지


지금 내가 쓴 글도
내가 어떻게 읽어달라고 가이드 일일이 쓰고 있나?

아니거든.



그럼에도
이를 읽는 활동은 있는 것이고
이를 읽는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눈을 댄다는 차원은 아니겠지?
어디를 어떻게 봐야하고
어디를 어떻게 볼 때 어떻게 머리속을 정리해야되는지.

이런 것들이 있을 거 아냐?



근데 이것을 체계화시킨 사람이 있냐는 거다
독서하는 방법 어쩌고 지랄 하는 책들은 많아도
이 책들의 한계는
바로 그 책도 마찬가지로, 그 책을 읽을려면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될 거 아냐.

애초에 그 방법이 없다면
그 방법을 쓴 책은 어떻게 읽겠냐는 거다.

참으로 애매한 문제가 생기지.



물론 
근데 꼭 혼란만 있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교육을 할 때는
아이가 책을 보면서만 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옆에서 하나하나 몸으로 체험하게 해주지.

엄마가 물건을 하나하나 가리키면 \"이거 뭐라고 하니?\"라는 식으로
지겹도록 반복을 하는거다.






i saw the matrix라는 표현은 뭘까?

여기에서 뭐부터 보는 게 좋을까?



일단 이 글은 가설이다
나는 이 순서를 생각해본다.

첫째 - 관계/상태
이 둘을 먼저 의식한다.
즉 선제의 틀을 깐다. 이 범위 내에서 결정된다는 규정을 해놓는다. (자기의식의 문제다.)

둘째 - 개별적인 것을 찾는다.
이게 왜 나오냐면
나는 ~ 상태다 라고 할 때\'
\'상태다\' 라고 하는 것은 아주 바탕적인 표현이라,
신체의 계기로 보면, 어떤 지시는 일어나고 있으나, 아주 추상적이고 희미한 낌새 정도이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뭐냐? 라는 물음을 던지면, 그 이후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는데,
그럴 때 나오는 게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위의 경우,
개별적인 것은 \'본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상태 중에서도 본다 라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둘이 결합되어있는 걸 살필 수 있다.
선제되는 건 \'상태\'라는 얘기다. 이건 언어에 명시되어있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i saw the matrix라는 표현은, 너한테서, 어떻게 읽어달라고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니가 읽어야되는 거다.

아마 이런 문제로,
이 부분에 관련해서
옛날 사람들 중의 일부는, 해독법을 연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걸어본다.
해석학 이런 것도 있을 건데,

아무튼 원리는 비슷할거다.
언어 자체는 읽는 방법 자체를 알려주지 않는다. 어떻게 읽어달라고 스스로 명시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럼에도 그 언어를 마주한 사람은, 그걸 읽어내야되는 미션을 갖게 된다.

여기서 골치가 아파온다
도대체 어떤것을 봐야되는가?
인간은 추리한다.

그래서 추리로 도달한 곳은, 
이것이 있다는 말은
누군가 쓴 사람이 있다는 말인데,
(즉 귀환법을 적용하는 게 보이나? 연역적 사고를 갖고 놀아야지 이게 된다.
 글은 누군가가 쓴 것이다. 여기 누군가가 쓴 게 있다. 이것은 무엇일까? 글이다.
 누군가가 쓴 것은 글이다. 글이 여기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쓰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글을 쓸 때는 어떤 방법에 따라 쓴다. 여기 글이 있다. 어떤 방법에 따라 쓰지 않았을까?)




따라서
그 사람이 쓴 전략을 알아야,
그 전략을 중심으로
독해를 하는 것인데
달리 말해,
전략을 중심으로 한 독해법을 체계화시키고
이를 연역적 적용을 하여, 게속 적용해내는 것이다. 이 적용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그럴 때
한 사람의 글을 읽는 방법툴을 고정시킬 수 있다.
이 고정이란 말을 부정하게 보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고정된다는 말은 가둬버린다는 암울한 뉘앙스를 주기도 하는데

이 경우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방법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부분이 있고
그것은 그 상대방이 \'발생시킨 방식\'에 해당하는 것인데
바로 그 부분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 입장이 개입하는 건
그 사람이 쓴 방법과 전략을 부정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내가 똑똑하든 아니든 간에, 옳든 틀리든 간에)

그리고 이것은 상대에 동조해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전략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단순히 말해, 전략만 지적해둬도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다는 거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을 적용시켜서
i saw the matrix라는 표현을 분석하고, 이 말의 정체를 찾아내면


그것은
상태인데
saw한 상태이고
(따라서 이 \'상태\'란 표현은 명시되지 않지만, 언제나 선제되어있다는 의식을 하고 있어야 한다. 
 애초에 이 문장이 있을 때, 이 문장을 누가 썼는지에 대한 언급 자체도 명시되어있지 않다는데 주목해라.
 그럼에도 이게 제시될려면, 누군가가 써야지만이 그게 가능하다는 인과적 관계를 살펴봐라. \'내가 썼으니, 저 문장이 있는거잖아? 이 부분을 찾으란 얘기다. 능동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래서 독해는 어떻게 보면 가추적 독해를 하는 거다. 내가 읽은 것이 맞는지 아닌지, 그 전략이 맞는지 아닌지. 계속 가추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게 성공하면 귀환되는 것이다. 어디로? 저자가 썼던 그 순간의 계기로.
이 귀환이 일어나면
그 독해는 끝난다. 더 이상 할 필요 없다.
이것의 부작용은 매력적이지 못한 저자의 글은 정말 읽기 싫다는 거다.
왜냐?
그 쓸데없는
보상도 없는
가치도 없는 글에
접속하려고 시간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 saw가 쓰일 때의 계기, 그리고 이 표현으로서의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은 뭐냐? 이 표현, 전략적인 절차에서 나온 이 표현은, 왜 나왔나?
(계기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용법으로 본다고? 근데 이 표현이 애매하다. 무슨 용법이냐? 썼다는 말은 쓰려고 했기 때문인건데, 왜 썼느냐가 더 중요한 질문이지 않을까? 그래서 계기로 보는 거다. 그래서 계기라는 표현 안에 이미 쓴다는 표현이 엮이게 된다.)



따라서
이 표현을 쓸 때의
저자의 계기, 전략, 목적이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고
이는 아까 말했듯이 \'상태\'를 제시하는 것인데,

그래서
이 글은 최종적으로
한 사람의 자기의식에서의 구성상태
이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 바탕 위에서 saw라는 것으로 다시 세분화되어 언급된 
즉 구체적으로 지시되는 상태인것이다. (이건 선경험을 요구한다. 없으면 절대 못 읽는다. 이걸 전제한상태에서 관계를 배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골치 아프지?
 단어 하나가 이렇게 짜증나게 얽혀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직감적으로는 그냥 쓰면 된다.
 근데 이게 왜 이렇게 되는지 따지면,
 좀 더 들어가야 된다.)

여기에는 saw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단어를 쓰기 전에,
이 단어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 (순간의 충동)이 있을 것이고
그 충동을 준 자극이 잇을 것인데
이것은 상황에서 온다.
왜?
자극은 상황 내에서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선제되는 게 -나는 상황내에 있다- 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의식하는 과정
그리고
이 부분이 나에게 계기로서, 어떤 인식을 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있고
이 두 가지가 압축되서 표현된 것

saw
그리고
참여자들 i, matrix 라는 표현이다.

그래서
이 문장에는
배경 
시간=어느날 몇 시, 공간 = 극장 또는 내 방, 환경 = 앞에 영화 스크린이 있거나 모니터가 있고

상황
모니터/스크린
(얽혀있다. 이것이 \'눈\'과 관계해서 얽혀있다. 이것과 관련된 것을 \'saw\'라고 \'명명한다) (이 명명 작업을 어떻게 패턴화시킬 수 있을까)




대략 이런 식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여준
이 상황에서의 명명이 일어나는 과정을
원형으로 잡아둬야 한다.

모든 단어는, 다 이런 발생적 과정을 갖는다.
단어가 굉장히 많지만
다 이런식으로 나오는 것이고
이렇게 나온 것중에서 분화가 되는 것인데
그러면 이 분류는 이 공통된 과정 하에서 어떤 다른점이 잇었기 때문에 그렇게 분화되었는지 찾아야 되는 것이다
근데 발생적 과정 자체가 저마다 다른 게 아니다. 즉 단어가 만들어지는 메커니즘 자체는 정말로 개별개별적이지 않다는 거다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여기서 이제 각각 다른 단어들이 나온다

간단한 예를 들자
운동장
여기에서 사람들이 공을 갖고 놀고 있으면
여기에서 수많은 단어들이 명명될 수 있다.

예컨대 \'축구\' 라던가
아니면 \'달리기\' 라던가

이런 것들은
내가 어떤 것을 관계짓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이 부분이 단어발생의 계기가 된다)

차이는
\'어떤 것\'을 봤느냐?
저마다 다른 것을 볼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바로 여기서
배경이 다르다는 사실도 있을 것이고
저마다 다른 곳을 보았다는 사실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단어가 저마다 갈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나오는 과정은 동일하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ㅣ 절대 다른 방식은 없다.
애초에 다른 방식으로 나올 수 있는 조건 자체가 없다.

지금 공통적으로 잡은 건 인간의 몸을 범위로 해서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내 견해만이 아니라, 뇌과학자들도 이런 견해를 따르고 있는데 (애초에 그들의 입장 자체가 그럴 수 밖에 없는 문제도 있지만)
이것은 다르게 보면 
너도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내가 계속 계기를 언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자로도 나타난다
어원은 가장 대표적이다
어원이 설명될 때
그것이 설명되는 방식을 봐라
죄다 배경이 있고 계기가 있다.

어떠어떠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라던지
어떠어떠한 곳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식의 표현이 굉장히 많다.


하나 예를 들자.
晶 이 표현이 어떻게 나왔는가?
이걸 알면 뜻은 그냥 끝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단어를 안다는 건,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지,
다른 것을 아는 게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단어를 안다는 건
그 단어의 의미, 정의를 아는 게 아니라
그 단어가 발생한 배경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단어가 발생한 배경, 배경의 형식으로 알아야 아는 것이다
언어의 형식으로 아는 게 아니라
그 언어가 나오기 전의 형식으로 알아야 된다는 얘기다
감각의 형식으로 알아야된다는 얘기다.

왜?
정의
의미
이거 어디서 나오나?

발생 배경에서 시작해서, 추상화시킨 거잖아?
그러면 이 순서를 밟아야지.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그걸 알겠나?
앞서 말한대로 글쓴이의 전략적 부분을 모른다면
아무리 해석을 좋게 해줘도
글쓴이의 입장에선 틀린거야.

그리고
글쓴이는 바로 그 괴리를 알기 때문에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바로 그 계기에서 어떤 딜레마를 겪고
또 그 딜레마가, 글쓴이에게도 딜레마를 준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예컨대 이 독해에 대해서 오해를 한다거나, 또 글쓴이의 자질을 자꾸 훼손시킨다거나 하는 문제) 글쓴이는 해석의 자유를 여는 경향이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글쓴이가 쓴 대로 읽지 못하면 틀린거지.
즉, 그 사태에 대한 해석은 자유로이 할 수 있으나,
그 사람이 쓴 대로 읽지는 못했단 얘기다. 그걸 시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틀린거다.
자유로운 의견이 권장되는 건 필요하지만, 어쨌건 글쓴이의 전략을 읽어주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해두자.


다시 이어가서

晶 
이것의 발생배경을 알려줄게.
晶 여기에 뭐가 있냐? 해가 있지?
근데 해가 3개가 있다.
뭔 말이냐?
이건 잘못된 형상화지?
해가 3개 있을 수가 없다.
특히나 상형문자는 본따서 그린건데
어떻게 해가 3개가 있나?

그래서 해설서를 참조하면
어떤 식의 해설이 있냐면
옛날 사람들은 이것을 지금처럼 해 라는 것으로 봤는지 알 길은 없으나 (이런 해설서의 한계)

해를 
하나의 별로 취급했다는 거다
그래서 이것이 3개 있다는 것.
고대에서 3개란 것은 아주 많다라는 표현이기도 하지.
그리고 표기의 한계상, 더 많이 쓸 필요도 없었겠지,
대강 이런 추측을 해본다면

晶 이것은 별을 그린 것이다.
그러면
이 별을 그림으로써 뭐를 하려고 했을까?
즉 
방금 말한 표현을 계기로 돌려서 표현하면
[이 별을 그림으로써] 라고 할 때의, 이 부분의 충동은 무엇이었을까?

이 단어의 뜻은 \'밝다\' 라는 뜻이다.
즉,
바로
이 부분을 
표시하고자
그러한 계기를 갖고서,

이 표기를 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의미라는 것은
계기에 녹아있다.
그리고 발생배경에 녹아있다
애초에 발생배경 자체가 그 발생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가? 그걸 묻는거지.




내가 설명한 순서를 다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의 발생배경은 뭔가? (발생했다면 계기가 뭔가?)
2. 배경 = 하늘에 별을 보고 그렸다.
3. 물음 = 왜 별을 그릴려고 했을까
4. 포괄적인 추측 = 뭔가 표현하고자 한 게 있었다. 계기.
    그 계기에 대한 추측 = 별을 \'그린다\'라는 차원에서, 그리는 것과 그릴 때의 순간을 자꾸 대조해본다.
(원래는 해설서 보고 하는건데, 내가 이걸 직접 한번 해보는 거다. 그렇게 반성적으로 재구성해야 와닿으니까.)

이후에
어떤 것을 느낀다.
분명히 그걸 느낀다
내가 명명하지 않아도
이제 여기에 너도 뭔가가 느껴질거다

니가 별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
그 빤짝빤짝.
그걸 떠올려봐.

우리는 지금 그걸 가지고 \'빤짝빤짝\' \'빛난다\' 이런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이게 공감각이란 생각은 안드냐?)
晶 이 표현을 쓰려고 지금 펜을 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떤 계기/충동이 있지 않겠냐는 거다.

그거를 알면 된다는 거다 
내 얘기는 여기에 해아한다.





그러면
이 차원의 설명을 앞서 했던 것과 다시 연관짓자.
이것은 공통적인 것이다. 즉 \'단어가 발생된다는\' 쪽에서는 공통이다. 그래서 이걸 표현하는 말 자체가 이미 나왔듯이 \'단어 발생\' 이라는 거다.
차이는 저마다 다른 것을 본다거나, 이 발생시킬 때의 조건이 조금씩은 다르다는 것이다. 근데 그 차이만 있을 뿐, 과정 자체는 동일하다

표현 자체는 의미/뜻, 이것을 중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발생배경(계기)를 중심으로 한다. 계기가 곧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순히 사전에 기록된 것을 끌어오는 것 뿐이다.)

I saw the matrix를 살피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위의 논의를 바탕으로 할 때
이것의 뜻은 
이 순간에 대한 발생적 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의 뜻은
말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 몇 가지 오브제, 그리고 관계, 그리고 어떤 암시/뉘앙스로서 전달된다.

따라서
스크린이 있고
객석이 있고
내가 있고
마주보고 있고

그 상황
그것을 전달하고 있다.

I saw the matrix라는 표현은 그런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제 나머지는 어순의 문제다. 이건 규칙의 문제니까 계기와 관련해서 어떤 선형적 규칙을 써야 올바른지, 그것을 내재화(교육)시켜야 되는 문제다





발생적 계기를 찾아야 한다
뭔가가 있다면, 발생되었다는 것이고, 누군가가 또는 무엇인가에 의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을 찾아야 되는 거다. \'~에 의해서\' 여기에 해당하는 걸 시키지 않아도 찾아야 한다.

1. 어떤 사람이 저 문장을 썼을 때
2. 그의 신체 상태는 어떠한가?
3. 저 문장과 그의 작성과정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어떤 계기가 있는가? 충동 말이다.
4. 바로 그것이 의미다. (사전에 모든 단어도 이런식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보면 추상에의 의지라는 것도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렇게 대화를 나누지 않나?
보통 인간은 자기가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건 그 새끼가 글을 잘 못쓴다는 뜻이다

예컨대 철갤에 그런 글이 많지, 자기 상황 제시 없이 아포리즘 떡하니 올려놓는데, 글을 제대로 읽을 줄 알면 그런 글은 대개 개 쓰레기에 해당한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글은 상황과 계기에서 나오는데, 제시없는 것은 쓰레기지. 신탁의 명령도 아니고. 증명도 안된 주제에 신탁 코스프레 내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대화는 이 범위 내에 한정된다는 거다.
더 이상은 할 필요 없어
기껏해봐야 추상의 놀음이고, 비유의 놀음이다.




일단 여기까지만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