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언제 '기능'이란 말을 쓰는지
살펴보면

'이 스피커의 이 받침대는 지지대를 하는 기능을 갖는다. 즉 서있게 해주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뭔가를 해주게 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쓰인다

라는 방식으로,
그런 계기로
'기능'이란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지.

내가 이 단어를 쓸 때에는 이런 식으로 쓰려 한다.






근데
어떤 사람이
[나는 기능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그것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 보라 세상에는 이미 블라블라]


했다고 해보자.
그럼에도 이 문장에는 기능이 잇다.
[나는 기능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그것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자기가 할 말이고

[잘 보라 세상에는 이미 블라블라]] 이 부분이 자기가 계기로서, 어떤 것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계기를 보여줄려고 하는거지.


자기 말부터 이미 기능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다는 얘기다
저 말은 [잘 보라 ~] 라는 부분은, 저 앞 부분의 말을 지탱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려고 지금 저 말을 하는 거 아닌가?
만약에 그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면, 그 말에는 이미 기능이 쓰이고 있다는 얘기다. 지금 내가 말하는 뜻으로서.

그러니
저 사람의 '기능'에 대한 표현은, 도구화에 대한 불만을 언급하려고, 그 말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건
이건 내가 가정한 예가 되니
아주 실증적인 부분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내 입장에서
말을 하지 않아도
선제되는 것 중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기능적 부분이라고 본다.

이 기능은 있다 반드시.
물론 의식을 하여 의미부여를 하는 경우도 없잖아 있지만
(예컨대 내 팔은 뭔가를 하기 위해서 기능한다 라는 등의, 애초에 말이없는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생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후판단이 가능하다.
내가 밥을 먹었다고 해보자. 손이 있었으니 밥을 먹었겠지?

그래서
이 '기여하다'라는 측면에서. (이런 상황을 이 표현으로 명명했다고 했을 경우)
바로
이런 상황 자체를 지칭하는 게
'기능'이란 표현이라는 거다.

이런 상황이 있다.
뭔가가 뭔가를 도와주는. 지탱해주는. 되게끔 해주는.




그래서
이미 기능은 전제되어 있다고 보는 바다.
이렇게 접근하면
나머지는 전략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 부분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는 얘기다.




예전에 철갤에서 아주 병림픽이 있었지
논리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결국 지적된 게 뭐냐면,
[논리가 없다고 말하는 너의 말 구조가 논리에서의 전제-결론 구조란다] 라는 식이었다.

근데
이 사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뭐냐면
해석틀의 적용을 과도하게 '논리적 틀'로만 적용시키지 마라는 것이었는데,
무슨 말이냐면

어떤 사람이 어떤 글을 썼다면
그것을 매번 '논리적 틀'로만 적용하고 접근해서, 마치 논리 선생님이 첨삭하듯이, 논리만 지적하지는 말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그것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뭐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였는데



이건 골치아픈 차원의 문제다.
왜냐하면
말을 정식화할 때는 당연히 논리의 틀로 말한다
이미 발견되는 거다
안보이는것도 잘 보면 그 안에는 숨은 전제가 있다. 전제가 숨어있기 때문에 명시되지 않을 뿐이지
어떤 말을 선택하는 순간 이미 대전제는 암묵적으로 둘러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지시하는 게 '논리'라는 표현이다.
그래서 이 위치에서 보면, 무의식도 논리가 있다 .다만 그 논리를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고,
그래서 이 때의 논리는 '원리'라는 말과도 비슷하게 쓰인다.

만일 논리를 한정시켜서, 전제-결론의 타당성을 말한다
이렇게 해버리면,
이건 이제 너무나 한정적이게 된다.

왜 근데 이렇게 하느냐?
사실 건전성을 따지는 건 너무 어렵다. 반증의 문제가 항상 있기 때문에
참은 아직 확실치 않으나, 거짓은 가능할 수 있다. 이런 쪽으로 가버리니까,
건전성 따지는 건 한계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좀 더 분명하게 확인되는 건 타당성이다. 일단 형식적으로 맞는가? 이건 언제든지 공통적으로 확인될 수 있고
형식논리학이 사고의 측면에서 그런 식으로 가버린 이유가, 바로 이 공통부분을 찾겠다는 목적 때문이지 않은가?
애초에 개념이 있다는 말은 ,공통부분을 찾겠다는 의지가 반영된건데.
당연히 그 말은 어떤 개별적 차이에도 제거되지 않는 공통을 찾겠다는 것이고, 그 부분으로 잡힌 게 개념인 것이다.
형식 논리학에도 그런 개념들이 하나하나 땋여있고, 그것들이 종합되어 형식논리학이라는 포함관계에서의 상위에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쟁에도
그리고 이 형식논리학의 하나하나에도
기능이 있다는 애기다.

에컨대
타당성은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가?
형식을 검증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게 능동적으로 들어가야 나온다
그냥 수동적으로 보고 있으면, 니 머리가 반성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정작 니가 성찰해내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걸 들여다보면
이런 관계가 있음을 살피게 되는데, 내가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 다루고 있는 걸 보면, 이런 관계가 보이잖은가.







이 기능과 관련하여
앞 뒤를 보면
[형식을 검증하는] 이라는 표현에서 나오듯이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무엇이 된다]. ---- 라는 이 표현을 머리속에 떄려 박아야 되는데, 이게 진짜배기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단어가 배경적 측면과 명명적 측면을 함께 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갖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예로
晶이 명명되는 과정을 보자. 이것도 조건식으로 성립이 된다.
하늘에 별이 있고, 그것을 보았고, 어떤 느낌이 일어났고, 계기가 있었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晶로 기호화 했다. 또는 명명했다.

라는 식의
명명한다
라는 동사 자체도 사건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용이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단어들은 기본적으로, 이 [명명한다]라는 작용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이 형식을 머리속에 잡아두는 것도 방법이다. (이건 좀 사이비가 될 수 있는데, 어쨌거나 이런 게 있다는 거다.)


예컨대
극단적으로 가면 이런 쪽으로도 간다.
눈 앞에 책이 있다.
이 표현을 이 형식으로 표현하면 -> [내가 보았으니, 이게 보인다] 이런식으로 간다는 얘기다.








고만하자.
이 글의 요지는 기능은 전제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걸 찾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
내가 부여했느냐의 문제이기도 한데,
나는 이것이 찾느냐에 문제에 가깝다고 본다. 그러는 과정에서 부여되는 것이다.
이 선글라스 갖고서 무한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

모든 것을 기능으로 환원시킬 수도 있다


물론 그게 썩 좋지는 않는다고 판단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것이 말장난이라고 보는데


이미 어떤 것이 어떤 것을 가능케 하는 게 있고
그에 따라서
내가 단지 이것에 명명할 뿐이기 때문에.

예컨대 없는 경우를 생각하면
분명히 와닿듯이

손이 있어야 뭘 집어서 먹는거지
손이 없으면 뭘 집을 수가 없잖은가?

그런 차원에서 기능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나는 일단은 해석틀의 문제로 해둔다.
결국 능동적으로 자기구성을 하고 부여하는 문제다. 그 중에서는 나는 이 부분이 있다고 보는 측면이다

없다고 하는 측면도 있을 건데
그건 니 사정이고

그리고 그게 바로 니 머리속에 틀로 잡혀서, 매번 투사작용으로 일어날거다.


사실 그런 표현,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추측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개념화가 되는 과정은 또 동일하거든. 즉 그러한 '없다'라고 형성된 개념화 과정도 동일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의 차이를 짚어내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거다.

그런 케이스가 있었겠지.



그렇지 않겠냐? 없는데 그런 개념이 잡혔다? 성립불가다. 틀린 얘기고, 겉멋에 빠졌단 뜻이다.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