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는 관점에서 환원된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가? 이것으로 환원된다는 얘기다.

어떤 것을

사물로 보는 관점이 있고
사건으로 보는 관점이 있고
체험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위 3가지가 가장 추상층위에 해당한다면
만만치 않게 문제되는 것이

사회의 관점에서 보느냐? (일반적 기준)
개인의 관점에서 보느냐? (개인적 기준)

이 두 가지가 문제가 된다.
이것을 '스투디움(스탠더드)로 보느냐? 푼크툼(개인의)으로 보느냐?

이 2가지로 접근해보자.









일단 스투디움과 푼크툼이 뭔지 정의부터 내려보자. (다음은 퍼온 것이다.)
 "나는 이런 사진들에 대해 때로는 감동적인, 일종의 일반적인 흥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감동은 도덕적 . 정치적인 교양이라는 합리적인 중계를 거친다. 내가 이 사진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거의 길들이기에 가까운 '평균'감정 상태에 속한다... 그것은 스투디움이라는 말인데 무엇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호의, 즉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여기서 스투디움은 코드화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두 번째 요소는 스투디움을 깨뜨리기 위해 혹은 스투디움과 박자를 맞추려고 온다. 이번에는 내가 이 요소를 찾지 않고 그것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사건의 현장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온다. 이 낙인들, 이 상처들은 점이다. 이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푼쿠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이 우연이다." 

"사회는 사진을 길들이려 하고,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하는 사진을 예술로 만드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술은 결코 광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길들이는 또 다른 방법은 일반화시키고 군생시켜 진부하게 만드는 거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사진은 스스로를 표지할 수 있게 된다. 광기를 택할 것인가, 분별을 택할 것인가? 사진은 전자도 될 수 있고, 후자도 될 수 있다... 사진의 두 길은 그와 같은 것이다. 그 광경을 완전한 환상의 문명화된 약호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해 완강한 형실성의 깨어남과 마주칠 것인가는 내 자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위의 글에서
마지막 문장에 주목하자
결국 이것은 [내 자신의 선택]에 달린 길이다.

무슨 선택인가?



관점의 선택이다.





3가지를 더 추가해서 논의해보자.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사물의 관점
사건의 관점
체험의 관점


철갤에서 어떤 사람들은 글을 쓰는데
'사물의 관점'을 택해서 쓴다.
사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물의 관점에서 쓰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당위론이라던가, 일반론을 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선 이것의 특징부터 보자.

그런 사람들의 글은, 필연적으로 실체-속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마치 어떤 것을 규정하는 것과 같다. 규정적 행위. 그것은 사물의 관점을 택해야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변화가 있는 곳에, 경직성을 부여하여, 그것에서 성질을 뽑아내는 방식이다.
사실 이 글도 일부는 사물의 관점을 택하고 있다. (이 관점이 필요없는 게 아니라, 기능을 염두에 두면 쓸 때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게 적합하다.)




사건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이것은 의사결정의 원리를 바탕에 깔고 들어간다.
따라서 변화와 차이를 주목하게 되며, 발생점-과정-완결점(다시 여기서 비롯되는 발생점을 보기도 한다)
이런 식의 사건 전개를 보게 된다. 따라서 관계와 변화가 주가 되며, 이 관점에 서있는 사람은 어떤 규정을 내리기 보다는 의사결정의 논리를 본다.
그것은 곧, 어떤 사태가 변화되고 차이를 보일 때에, 그것들 각각에 '대처'하거나 어떤 항목을 선택하는 쪽을 중시하는 것을 말한다. 
상화파악을 잘해라. 라고 할 때, 채택해야되는 관점은 이런 사건의 관점이다. 
삶은 사건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실제로 삶을 유연하게 대처하려면 사건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사물의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하려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는 분석이 가능한다해도, 
실제로 다시 사건과의 마주침을 겪으면, 그 순간 속수무책이 되는 일이 흔하다. 이것은 관점의 괴리 때문이다.



체험의 관점은 이런 두 관점 내에서 비롯된, 어떤 마음속의 느낌을 주목하는 것이다.




이 3 관점은 엮여서 나타난다.
보통 일반 사람들이 말을 할 때에는, 사건/사물/체험을 엮어서 표현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어떤 여자가 미팅을 했는데 꽝이었다고 하면, 대개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한다.

"어제 XX소개로 어떤 남자 만났는데, 들어오면서 보니까 스타일이 엉망이더라 (사물관점), 근데 말하는 걸 들으니까 (사건관점), 약간 일베충 같애. (사물관점)  깨더라. 소름까지 돋았어 (체험관점). 그래서 잠깐 화장실간다고 하고 집에 갔는데, 아, 먹튀라고 걔가 글 쓰면 어떻하지? (사건-체험관점)"



여기에 스탠더드와 푼크툼을 추가시키면 다음과 같다. (예시니까 참조만 하자)
"일반적으로 일베충이랑 어울리면 나까지 피해를 받을 수 있잖아? (스탠더드)
 근데 일베충들이 즐겨쓰는 단어 중에, 3일에 한번! 이런 건 재밌드라구 (푼크툼)"











스탠더드와 푼크툼이 대립하게 되는 이유는
사실 푼크툼에서부터 비롯된다.

어떤 개인이 보는 방식이 있는데
그것에 대립하는 방식이 나타날 경우
힘의 문제가 생긴다.

어떤 쪽을 좀 더 우위로 볼 것인가?
약간 이런 문제가 나타난다.

사실 처음부터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두루 포함할 수 있다'라는 관점을 갖고서
서로가 대했다면, 이런 문제는 크게 발생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 의견이 거부당한다는데서 두려움을 느끼고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데서 짜증을 느낀다.
이럴 때 그는 권력의지를 품게 된다. 왜? 권력을 품으면 내 의견이 거부당할 일이 없다는 판단으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전략이 나타난다
도덕성에 대해서는 6가지 단계가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콜버그)
그 중, 3~5번에 해당하는 것이 중요하다.
3은 상호간의 호응
4는 제도
5는 권리

이렇게 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택하는 전략이 있는데,
3~5번에 바탕을 깔고, 개인을 억누르는 방식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해'
'사회 생활을 못해봤구나?'
'넌 니 멋대로구나? 니 의견은 알겠지만 그것은 지탄받을 수도 있단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때 자신의 입장이 중요하기 보다는, 자신이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더 중요하다.)



스탠더드의 눈과 푼크툼의 눈은 여기서 충돌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위의 3~5번에 비추어봤을 때,
뭔가 까인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는 푼크툼을 포기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개인은 3번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제도와 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으나 (무단횡단을 생각해보라)
저 사람이 기분나빠할까봐 말을 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이건 3번에 해당한다.

그리고 푼크툼이 억압되는 순간도 3번에서 발생한다.






영리한 사람들은 미리 수를 쓴다.
"보통은 이렇게 얘기하지만, 저는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 이런 식으로 얘길 한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다.
왜?
결국 이것도 스탠더드에 먹혀버리기 때문이다.


자발적 복종이라는 것은
머리속에서 푼크툼이냐 스탠더드냐 하는 웅웅거림이 발동되서
그 나름의 대답으로 스탠더드를 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얘기의 결론을 짓자.
푼크툼으로 보느냐? 스탠더드로 보느냐?
이 문제는 다수가 중시되어야 하느냐? 개인이 중시되어야 하느냐?
모나지 않아야 하느냐? 모날 수도 있어야 되느냐?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과 일견 비슷하다




하지만
이것은 '관점'으로 들어가는 문제다.
제일 처음에 언급한 것을 보자. 
결국 관점으로 환원된다.

왜냐?
관점에 의해 발생된 것이, '글'이고,
다시 그 '글'을 관점에 의해 해석하는 것이 '독해'다.

어떤 관점에서 썼느냐에 따라, 글이 결정되지만,
또한 그 글은 어떤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푼크툼의 관점에서 글을 썼지만,
정작 읽을 때는 스투디움의 관점에서 읽어버리고는 해석해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결국 관점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어떤 글이, 있든 간에,
그것은 '사물/사건/체험'이라는 가장 추상적인 층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애초에 인간은 그것을 깔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렇게 나온 것이 이미 있다는 얘기는, 관점이 이미 개입되었다는 얘기이고.
관점이 개입된 것에, 또 관점이 개입되어 해석이 일어난다는 것은


오로지 문제를 관점에서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모든 문제는 관점으로 다뤄진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애초에
개성이냐? 일반이냐?
이것도,
누가 어떤 관점을 택했느냐?
어떤 관점이 장려되느냐?

이런 문제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아론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고통은 오로지 나의 문제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건 틀린 얘기다.


일부는 맞다
내가 고통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이 고통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내 의지의 밖에 있는 것이라면


그건 내 문제가 아니다.
착각해선 안된다.

선택은 내 문제지만, 선택에 몰리게 된 환경은 내 의사가 아니다.










따라서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당신의 내면과 외부를 긴밀하게 들여다볼 것을 요구한다. 
그 사이 지점에서 서있는 것.

그것이 관점으로 접근할 때 나타나는 결론이다.





그 중에서
푼크툼(개인) 스투디움(다수) 

이것을 다뤘다.
이것은 관점으로 접근했을 때에만 좀 더 피부로 와닿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