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글이 되게 기니까 이거를 보자.
기술가능성이란 무엇이냐?
단순하다.
기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위의 그림을 보고
저게 뭔지 설명해보려고 해보자.
가능한 많이 해보려 해보자.
나는 다음과 같이 해본다
- 타이어
- 자갈돌이 놓인 것
- 건축모형
- 송편
일단 나는 저 그림을 보고
다음의 단어들을 뽑아냈다.
이 '뽑'아내다.
라는 표현이 좀 중요한데,
풀이하는 것일 수도 있고
뽑아내는 것일 수도 있고
규정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어쨌건
뭔가 뽑혀나오는 느낌이 있기는 하다.
역시 이것도 기술가능성이다. 나는 이 과정에 대해서 수많은 표현 가능성 중
'뽑아냈다'란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밑 글에
언어를 쓴다는 건
'선택적 행위'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어떤 사태에 대해서
이런 기술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람마다
이 가능성 중에서 택하는 것이 어느정도로 한정되어 있고
바로 이러한 선택이
곧 그의 태도와 관련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말한 것 중
한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태도에 있다고 말한 것은
기술가능성 중에서의 선택이자
그의 판단기준에 있단 얘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더 다른 표현들도 많겠으나
일단은 이렇게 해두자.
이제 이걸 보면
왜 선례가 그저 기껏해야, 앞서서 정해진 대처에 불과한지
그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역시 선례도 마찬가지로
이 과정을 밟는다.
어떤 사태가 있고, 그에 대한 기술가능성을 갖게 되고, 그것에서 선택적 행위로서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밑도끝도없이 전파가 되고
그것을 따르냐 마느냐의 문제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숭배하고 미신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정작 그것이 기술가능성 중 하나로서 나온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유치하게 굴지 말고
냉정하게 굴자
그냥 기술가능성 중에 하나의 선택이라고 보는 게 적합하다.
그래서 나머지가 호객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얘기는 질리도록 했다. 전략적 입장의 선택. 이런 문제다. (홍보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혹의 문제라고 해도 상관없다. 기술가능성이다.)
규정 자체에
라벨링 자체에 주목하지 말고
사태에서 어떤 기술가능성이 나타나는가?
어떤 선택적 행위가 가능한가?
이런 것을 먼저 봐야
더 자세하게 열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확인되는 건
태도다.
스스로 선택적 행위에 대해서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떤 것을 평가하겠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가격을 매겨서 더이상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과도 같다. 그래야 가치없는 것은 가치없다고 간주할 수 있게 된다. 초딩의 글을 초딩의 것이라고 무시하는 게 정보처리에 효율적이라는 얘기다. 초딩의 글도 소중하잔아요! 라고 해버리면 초딩의 글을 정독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게 좋으면 그렇게 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싫다면 미리미리 선이해를 깔아두는 게 효율적이다
그리고 센스가 있다면 \'초딩의 글도 소중하잖아요!\'라는 말 자체가 태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결과는 초딩의 글을 정독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래서 태도의 선택이 중요하다 아주 심각할 정도로.
자각하지 못하는 태도들도 많다. 남의 눈치를 많이 보면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말을 이상하게 쓰고 있기 때문인데, 대개 이런식이다. \"나는 남의 눈치를 안봐\" -> \"매번 자기 뒷담을 몰래몰래 찾는다.\" 그러니까 입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경우인데, 의도를 안다면 이 이유를 쉽게 추리할 수 있다. \'나는 남의 눈치를 안봐\'라고 자신의 이미지를 메이킹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쓰는 표현들도 기술가능성과 관련하여 선택적으로 뽑힌 것이고, 나의 입장에 해당한다. 그러니 내 글을 읽고 공감을 한다면, 너의 공감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것과 학습을 접목시키면 선택 자체가 미치는 효과를 주목하고, 그 선택방식이 맘에 드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나머지는 그것을 추출해서 내 쪽에 이식시키고 활용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내가 그것과 관련해서 선택이 일어나는지 살피면 된다. 그래서 썼던 얘기지만 이런 식으로 너의 선택을 조절할정도로 강렬함을 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 하는 것이다. 얼마 없다. 그래서 뛰어난 몇 명을 아는 게, 나머지 쓰레기를 아는 것보다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