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제로 또 글을 하나 쓸 생각인데, 그 글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쓰도록 하고
일단은 좀 간단하게 해둔다.
지금 쓰는 내용은 해석틀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S+P라는 형식을 마주하게 되면
무엇을 고려해야하는지 체크리스트로 살펴야 되는 것이지
이것을 보이는 S+P 자체에서 찾아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명시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할 것이다.
달리 말해
'앞서서 이해해놓아야 하는 것'에 해당하는데,
문제는 이걸 이해하는 것부터, 이와 관련된 기능들을 깔면서 들어가게 되므로 어려움이 생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금 SP에 대해서 쓰겠다는 얘기는
어떻게 보면 '언어'에 대해서 쓰겠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언어에 대해서 설명을 언어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앞서서 어느정도는 '언어'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기를 전제하고 있다.
이런 글은 어떻게 읽어야 되는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 글이 쓰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어를 설명하고 잇는데, 쓰여진 형식은 언어의 형식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언어를 알고 있기를 요구하고 있다. 어떻게 읽겠냐는 것이다.
나는 다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1. 인지과정
2. 유추
3. 해석틀 (모델링)
4. 연역
5. S+P의 조작법
6. 사이작용
몇 가지가 있는데
일단 위의 표현들은 임의로 붙여놓은 것이니
대략 저런 주제가 있다고 여기고, 저기에 순차성을 부여하지 말자. 순서가 정확하지 않다.
인지과정은 전에 표현했던
사태와 몸이 충돌하는 것을 포함한다.
유추는 좀 독립시켜놓을 정도로 각별한 부분이기 때문에 나타냈고
해석틀(모델링)도 마찬가지다. 괄호로 모델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것을 한측면에선 또 달리 봐야된다는 얘기를 하기 위함이고,
모델링은 수학에서 '식을 세우는'것으로서 의미를 쓰고 있다.
이것을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잡스러운 지식을 다 빼고, 식을 세웠을 때 그 식에 뭐가 들어가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인명'은 삭제된다.
누가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사고'다. 그것밖에는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성은 무시한다. 따라서 존경이니 권위니 존엄이니 다 무시한다. 계급장 다 떼고 아이디어만 있으면 된다. 아이디어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뉴턴이 뭐든 간에, 뉴턴이 1+1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을 해야하겠는가? 뉴턴이 5라고 하면 뉴턴이기 때문에 이제 5라고 바뀌는가?
아이디어의 세계에서는 그게 먹히지 않는다. 뉴턴이 중요한 게 아니란 얘기다. 이게 모델링이 필요한 이유이고 모델링을 제시한 이유다.)
연역
이것은 전에 귀환법의 필요성이라는 글에서 쓴 것과 같은데
사실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이유는 전제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연역은 수학의 원리를 따른다. 1이 1이라면 1은 1이어야 된다. 단순한 원리다.
어떤 개념이 이렇게 적용된다면, 나중에도 또 그렇게 적용이 되어야 한다.
순간 불안할지는 몰라도 불안과 적용은 무관하다. 불안한 건 마음이 그런 것이지, 사고의 적용에는 관계가 없다.
달리 말해
인간이 인지과정의 원리가 있다면,
내가 그것이 잘 믿겨지지 않는다 라는 불안과 별개로, 그것은 그 아이디어의 형태에 따라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델링을 제시한 것이다
모델링으로 보자. 아이디어가 있으면 아이디어만 들어간다.
거기에는 불안은 들어갈 수가 없다. 아이디어만 적용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인간의 몸의 차원을 빼놓고서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게 가능하다.
근데 이 때에도 비슷한 얘기로 간다.
이것은 '적용'의 차원에서 연역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기분이라는 것이 아이디어로서 포장이 되고, 반영이 될 수 있다면
이후에는 기분의 메커니즘이 연역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건 조금 어렵다.
근데 생각을 하다보면, 결국 연역적인 접근을 쓸 수 밖에 없다. 인간이 풀어내는 방식은 연역으로 이뤄진다.
S+P의 조작법
이걸 지금 쓰려고 한다.
사이작용
이것도 지금 쓰려고 한다.
해석틀의 문제가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한다.
이 글을 잘 생각해보자.
내가 어떤 문제에 대하여 '대처'하고 있다.
이 글의 작성자가 밝히는 것이니
좀 분명하게 이 부분을 짚고 가길 바란다.
이 글을 아무런 생각없이 걍 읽지 마라.
이 글에 작성자가 있다는 전제 하에 읽어라.
그러면 내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진리체계 자체를 일단은 거부해라.
이것을 맞다 아니다 라는 차원에서 보려고 하지 말아라.
왜?
그게 바로 니 해석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걸 제껴놓고
어떤 입장과 어떤 결과가 있는지, 관계만 보자.
그 다음에 평가를 해도 늦지 않으니, 일단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크게 3가지 얘기를 하려고 한다.
1. 유추
2. SP
3. 사이작용
유추는 전에 말했던 것과 같은데
좀 다른 방식으로 말해본다.
가설이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말해본다.
유추는 기저영역이 목표영역에 사상되는 것이다.
이걸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다음과 같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이 때에
기저영역 : 마라톤
목표영역 : 인생
이것이 작동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마라톤의 이모저모
이걸 이해하면 곧 이것이 인생과 같다는 것으로 간다.
따라서
마라톤만 이해하면 끝이다.
나는 이것이 언어 자체에 반영되어있다고 본다.
[도상영역이 곧 상징영역이다.]
이것이 언어를 지배하는 유추에 해당한다.
晶을 이해할 때
도상영역을 보자.
도상영역이 뭐냐면
사태를 닮게 표현한 것이 도상영역이다. 이해가 되나?
사태에 해당하는 게 있다고 하자.
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있다고 하자.
이를 *
이렇게 표현하면 이게 도상영역에서 표현된 방식이다.
닮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됬으리라 본다.
근데 상징영역이라고 했는데 이건 편의상 붙인 이름이고
달리 표현하면
[표의영역과 표음영역은 유추관계로 이뤄져있다.] 이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다.
따라서
*은 곧 별이다.
*은 곧 정이다.
이해가 되나?
직관적으로 이해하려면, 별에 대해서 언어로 설명해서는 안되고, 도상으로 설명을 해야 한다.
달리 말해
별은 곧 *이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다.
더 이상 말할 필요없고 '음미'하면 된다.
재밌는 것은
한국어가 표음인데
그래서 한국어는 매번 유추관계에 있는 표의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근데 한국어는 이게 없다. 달리 말하면 한국어에 별도로 표의로 지정해둔 영역이 없다.
어디에 있냐면
한자에 있거나. 한국말 어원이라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고맙다'라는 표현은 어디서 왔을까? 가설이 있긴 한데, '곰답다'라는 표현에서 왔다고 한다.
달리 말해, '사태'와 관련된 것 중 니가 알고 있는 바로 그것을 보면서 그것에 이름을 붙인 게 '곰'이고,
바로 그 표현을 술어 형식으로 나타내어 이것을 쓰던게 '곰답다'라는 것이고, 이것이 이후 발음이 변화되서 '고맙다'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되나?
내가 지금 '이해가 되나?'라는 말을 2번 정도 썼는데
'이해'라는 것의 유추관계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귀환법을 적용시켜보자.
'표음'이 있다는 얘기는 표의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 표의가 뭐냐?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고
이게 바로 위에 언급한 '연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해'라는 것의 표의가 뭘까?
한자어를 보면 알지만
칼과 소가 있다.
소를 베는 작용이 있다. (해설서에 이런 해설이 있다. 정확하진 않다. 그런데 의역을 해도 충분히 와닿는데가 있다.)
이 베어버리는 것은 풀어버린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풀어버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알아먹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꾼다는 것이다. (이 표현에 서리서리 박혀있는 '기술가능성'의 정체가 보이는가?)
이해라는 말이 뭔지 감이 오나?
우리가 의미를 주고받을 때, 사실 그 의미의 형태는 '사건의 형태'로 되어있다.
이게 핵심이다. 의미라는 게 별도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사건을 가지고 기호화시켜놓은 것이다.
이해'라는 것이 칼과 소로 기호화되어있다는 것은 전형적인 사건의 형태로 되어있다는 얘기가 된다.
의미는 이런 식으로 잡힌다. 사건의 형태로, 표의의 형태로, 표음의 형태로,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가 형태가 점점 변하게 되는 것이다.
SP로 넘어가기 전에
사이작용이라는 게 뭔지 얘기해보자.
이것도 앞서서 설명한 방식으로 그대로 설명한다. (중시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데, 이 '중시'라는 표현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 설명방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표음이 있다는 얘기는 표의가 있다는 얘기다.
2. 표의가 있다는 얘기는 사태(또는 사건)이 있다는 얘기다.
3. 다 찾고 연결해라.
사이작용이라는 게 뭘까?
일단 이것이 언제 나타나는지 찾아보자.
사실 이건 내가 만든 용어다. 이런 용어를 또 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다음과 같이 얻어냈다.
사태에 대해 직관을 한다는 걸 생각해보자.
잠깐
내가 지금 어떤 식으로 직관이란 표현을 쓰는지 보여주려 한다. (모든 설명은 SP로 되어있다.)
사태와 몸이 충돌한다. 겹친다.
물리적인 수준에서 이를 직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추상작용이라던가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해 '지각작용'이 일어나면 그것을 사유라고 부른다.
간단하게 구별하면 이런 식이다. (샘플로만 보자)
내가 밖에 반팔로 나갔는데, 제법 추웠다.
그래서 내가 '아 추워' 이러면 이건 직관적인 수준에서 직관에 근거한 표현을 쓴 것이다.
근데 이 수준을 넘어서, '날씨가 왜 이러지?'라고 하는 순간, 나는 사유를 한 것이다.
왜?
단순하게 보자.
'아 차가워'는 직관인데, 여기에서 '날씨'라는 상위항목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것은 사유로 가는 것이다.
이 때에
표음과 표의와 사태를 잘 봐야 한다.
내가 '몸'을 보면, 몸을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근데 이건 언어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라, 내가 이미 몸을 그렇게 '보고'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게 원인이다. 이 부분을 잡아채는 게 관건이다.)
그래서 '몸-얼굴/몸통/팔/다리' 이런식으로 부분을 잡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나누어서 잡힌 ( )에 대해서, '부분'이란 표현을 쓴다.
달리 말해, 그렇게 전체에 대비해서 나타나는 소규모의 것을 '부분'이라고 쓰고 표현하는 것이다. (참 지금 쓰기 힘든 표현들이다. 너무 익숙하니)
그런데
부분이란 것은 그냥 나오는가?
아니다.
계기가 있다.
그게 뭐냐?
'나눈다'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눌 수 있다.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부분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어떤 개별적인 작용이 일어나서 그것이 명명이 될 때,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말 그대로 '개별적인 작용'이다.
먹음 이라는 것이 나타나려면
먹었다 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작용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부분이 있다면
부분이 있을 수 있게끔 가능하게 만든 것이 있어야 되는데,
그걸 뭐라고 부를 것인가?
그걸 '사이작용'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표현이다. 이제 이 정도면 뭔지 감은 잡았으리라 본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사이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사이작용'이란 명명을 해둔 것이다.
이런 게 몇 개 있다.
다음과 같은 것인데, 이게 생각할 때 굉장히 자주 쓰이는 것들이다
- 나누다 (부분)
- 모으다 (전체)
- 그물을 치다 (위계)
- 살펴보다/잡아채다 (특성)
- 견주어보다 (비교)
- 모티브를 보다/잇다 (행위관계/전개)
이런 사이작용을 볼 수 있으면, 그 다음에 나타난 결과가 그대로 여기에 포함되는 걸 볼 수 있다.
약간 역발상이다. 보통 결과가 더 중시되곤 하나, 사실 결과는 선행되는 것에 의존되어 나오는 것이지 그 역이 될 수가 없다.
(근데 사람은 결과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글자의 특징이기도 하다. 글은 선형으로 이어져서 나타나기 때문에, 매번 끝점에 강조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 부분 문제인데 이건 '해석틀'의 문제로 간다. 애초에 이 문제 자체가 전부 유추로 되어있다. 게임은 모형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근데
왜 사이작용을 먼저 말했을까?
이건 S+P에 해석틀이 개입되기도 하고, 사이작용이 개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누다
라는 사이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에 관련된 SP가 나타나게 되고
살펴보다 라는 사이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에 관련된 SP가 나타나게 되고
그물을 치다 라는 사이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에 관련된 SP가 나타나는 것이다.
근데
형식 자체인 SP는 동일하다. 이게 문제다.
SP는 같은데, 그 안에 담기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 새는 하얗다] - 이건 살펴보고 잡아채서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특성'을 나타냈다는 얘기는 그 안에 사이작용으로서 '살펴봤고, 어떤 것을 잡아챘다'라는 것이 선행되어있다.
그래서 저 SP는, 이 선행된 부분에 의존하여 나타나는 표현이다. (이해가 되는가?)
내가 먼저 보지도 않았고, 잡아채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특성을 말할 수 있을까?
이건 불가능하다.
피카소가 말한 것을 보자.
"당신들은 보고 있어도 보고 있지 않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이건 살펴봄에도 잡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은 다르다는 얘기다.
그저 눈을 대는 것과 뭔가를 찾아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인과 프로파일러가 사람을 보는 방식을 비교해보자.
둘은 같은 사태를 보더라도 다른 것을 잡아채게 된다.
이 사이작용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새는 날짐승이다]
이 표현은 '살펴보다'와는 무관하다.
이것은 오히려 '그물치기'와 비슷하다. 새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그물치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물치기라고 표현한 것이다.
근데
이것도 SP의 형식으로 쓰인다.
근데 그 안에 담기는 것은 전혀 다르다.
SP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설명하는 게 효과적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도 '해석틀'의 정체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가 생긴다.
내가 만일
지금처럼 '사이작용'이라는 것을 해석틀로서 깔고 있지 않다면,
이런 식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앞서 밝혔듯이
이것은 유추이기도 하면서, 관념의 모델링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지금 '관념'을 식에 올려서, 각각을 연산처리하고 있다
S+P에 대해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그 접근 자체만 도려낼 수 있다면
나머지는 다양함의 세계로 갈 수 있다.
그래서 패러다임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표준 해석틀이 되는 것은, 그것의 설명력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설명이 되면 쓰는 거고 아니면 안 쓰는 거다.
근데 왜 그렇게 개별적인 것이 많이 나오는가?
그것은 구조 때문이다.
엮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지만 이것은 역시나 매번 해석틀과 유추가 작동한다.
이해를 한다는 건
마라톤의 영역에서 이모저모를 따져서
인생의 영역에 사상시키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내가 구조를 엮을 때
그 순간의 과정 자체가,
사상을 일으키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되냐에 따라서, 내가 목표하는 것이 해석되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내가 지금 '사이작용'이라는 식의 개념을 땋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개념을 가지고 목표에 해당하는 'SP에 대해' 이해를 갖게 된 것이다.
근데
내가 지금 이 해석틀 또는 기저영역에 해당하는
사이작용이라는 개념을 버리게 된다면 (또는 가장 빈번한 사례로 망각하게 된다면)
나는 SP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할지, 그에 대한 틀을 갖고 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는?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단편적인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에 따라,
몇 가지 선행되어야 할 것의 정체가 드러나는데, 다음과 같다.
1. 유추에 쓰일 것
2. 연역이 되는 것
3. 식을 세울 때 들어갈 수 있는 것 (따라서 빼도박도 못하는데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식은 일관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앞서 설명했던 모형을 계속 적용한다면
나는 앞으로도 다른 언어를 마주할 때마다
표음이 있다면
표의가 있고
표의가 있다면
사태가 있다.
라는 식으로
계속 그것을 자세히 밝히는 쪽으로 접근하게 된다.
이 일관성을 놓쳐버린다는 것은, 내가 이 모형을 포기했다는 얘기이고, 모형이 없으니 유추가 끊겼다는 얘기가 된다.
새로운 게 필요한 게 아니라
적용이 분명하게 되는 게 필요하다. 그럴 때에 확실한 모형이 잡히는 것이고, 나머지는 오류로서 취급해도 무방한 것이다.
또는 그것을 포함하는 모형이 된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윈도우 8이 있다는 말은 윈도우 95가 필요없다는 얘기다. (그것을 포함하거나 개선했다는 얘기이니)
이 부분은 '유추'라는 것과 지나치게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이 글 자체가 읽힐 때에도 유추로서 읽히게 되는 것이고,
이 글 자체가 적용될 때에도 이 글에서 나온 관념이 '유추'로서 적용될 때만 제대로 먹히는 것이다.
안 그러면
이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된다. 사망한 글이다.
당신은 이런 얘기를 종종 들어왔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 이게 바로 유추를 하는 것이다.
표음이 있다면
표의가 있고
표의가 있다면
사태가 있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언어가 여기서 검토가 되면, 언어의 기저영역은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나는 이것이 신체로 가는데
신체의 모방이 곧 언어다 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아직 이것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을 '관계'들이 무엇무엇에 해당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본다.
별에 별 게 다 나온다.
심지어 '드러난다'라는 것이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작용 중 하나인데,
이것을 표현하는 것 조차 해석틀과 연관이 되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부분이다.
또한 '파고든다'라는 것도 만만치 않게 드러나는데,
사실상 이게 탐구에 대한 것이다. 근데 글을 쓰려면 탐구를 전제할 수 밖에 없다.
왜?
모르는 건 말할 수 없으며, 아는 걸 말한다는 건 일부 파고들었단 얘기가 되므로
모든 말은 결국 파고든 것에 대한 되풀이이자 재구성의 결과를 발화하는 것이고
이는 본질적으로 회고에 해당한다.
그것들을 바탕에 깐 상태에서 SP형식으로 조작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여기에는
풀이가 있기도 하며
덮기가 있기도 하다
가령
S의 특성을 말하는 건 풀이에 해당하겠지만
S의 상위개념을 말하는 건 풀이이기도 하겠지만 덮기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게 된다.
국어식으로 말하면
서술에 3종류가 있는데
1. 동사
2. 형용사
3. 명사
이렇게 나오는 것에서
풀이가 동사/형용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덮기가 명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근데 이것도 내가 지금 잠깐, 이런 설명을 취하고 있는 '해석틀'을 선택했기 때문에
잠시간의 유추를 하는 것이지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걸 깨우치는 게 핵심이다. 그러면 나머지 문제가 굉장히 복잡한 해석의 문제로 간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문제는 그래서 어렵다
수많은 권위와, 수많은 기존 연구와의 충돌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여, 좀 더 적합한 구조를 짜낼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쉽게 풀리지가 않는다.
모델링과 유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렇게 해두자.
안타까운 건
앞서도 밝혔지만
이 글이 언어를 설명하고 있으나, 이 글을 읽을려면 언어를 전제해야한다는 것 (언어틀이 전제된 상태에서 유추되야 읽힌다는 것)
그리고 이 글에 나온 개념을 다시 유추의 기저로 쓰지 않는다면 이 글은 사망한다는 것.
이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글도 마찬가지다.
유추적인 접근을 쓰려면,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한다. \"이것(X)를 알려면 무엇(Y)를 알아야 되는가?\"
이는 달리 말해 S는 P로 풀이된다 라는 것을, 물음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이것(S)는 무엇(P)로 풀이된다 <---> 이것(S)를 알려면 무엇(P)를 알아야 되는가?
따라서 어떤 것(S)를 마주하고서, S자체를 S로 이해하는 건 성립불가에 해당한다. 그걸 알려면 뭘 알아야 되는가? 같은 식으로, 약간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나, 이 안에 깔려 있는 유추관계를 알아차렸다면, 그 관계에 맞게 접근하는 것이다.
유추는 \'기저영역이 목표영역에 사상된다\'라는 식으로 정의된다. 다른 영역의 것이 그 영역으로 적용된다가 아니라, \'기저\'라는 것이 \'목표\'에 사상된다는 식으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S는 목표영역이고 P는 기저영역이다
그러니 S를 알고 싶다면 P를 알아야 한다. 글을 읽을 때는 P만 찾으면 되는 것이고 P를 이해하려면 P를 만들게 된 기저를 알아야 되는 것이다. 다시 그 기저를 알고 싶으면 또 그 기저의 기저를 알아야 한다. 마치 다다를 수 없는 곳까지 계속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어느 순간 바닥에 닿는다. 그게 신체다.
근데 당혹스러운 건 이 부분이 기술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각각의 선택에 따라 유추는 또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해질 수 밖에 없는지가 여기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더 복잡스러운 건, 내가 지금 내놓는 표현 자체가 모든 걸 포함한 게 아니라 나의 \'선택으로 잡힌 것들\'로만 이뤄져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식으로 세워서 표현하면 더 명료해진다. 그런데 그런 이유로 이것에 맞고 틀리고를 언급하는 것은 곤란해진다. 맞다면 왜 맞는가? 이것도 해석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데 그것의 정당성은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래서 일단은 이렇게 말해둔다. 일단은 \'그럼직한 느낌\'이라던가, 합의에 지장없음, 설명이 그럭저럭 된다\' 라는 쪽에다 실효성을 두는 것이다. 더 이상 들어가면 행정평가처럼 되버린다.
글을 쓰면서, 내가 뭐하러 이걸 썼는가, 생각해보았는데, 머리속에 키보드를 설치하는 게 목적이 될 것 같다. 인간의 머리속에는 아주 기본적인 키라고 할 수 있는 자판들이 몇 개 있는데, 그걸 작동시키면서 사태를 조작하는 일이 발생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게 사이작용에 해당하는데, 나누고 모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이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합의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자판이 되어서 사태를 조작하는데 기능하게 되는데, 이런 부분을 \'키보드\'형태로 잡아두면 더 이상 생각에 대해서는 고민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왜? 생각에 관해서는 이러한 키보드만 치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논의된 바를 \'소프트웨어\'로 바꾸는 과정인데, 이런 게 더 필요하다. 주장하는 것보다는
개소리도 이렇게 지극정성 하는 이유는 뭘까.
글은 긴데...내용이 없다. 암대나 갖다붙이기 바쁘네. 병이야 병
ㄴ 너처럼 병신같이 개소까는것보다는 훨씬 낫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병신눈깔 수술좀 받아라~
39.114 // 닉값 ㅇㅇ
니가 쓴글 한문장으로 요약해바라.
39.114 // 니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나 밝히고, 니 가치를 증명해라. ㅇㅇ. 내가 받을 혜택은 뭔지 말하고.
39.114 // 가치없고 혜택없는 요구에 뇌가 반응하지는 않는단다. 뉴로마케팅의 기본적인 입장이지 ㅇㅇ
천재야 내가 꺼지라고 하니 밑의 글에서 논다. ㅋㅋㅋㅋㅋ
여서 내 가치를 왜 증명해야대냐
니가 받을 혜택은 또 뭐래
도라이냐;
39.114 // 가치없는 애의 요구에 내가 왜 대응해야 하냐
도라이냐
밑에 갔다고 하니 다시오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응하네 천재야
39.114 // 니가 요구한 것에 대한 대응은 아니지. 국어공부 하러 가라 ㅇㅇ
내가 요구한게 뭔데
지도 모를 소리 하고 놀고있냐 여서;
어느 병원다니냐;
안다니면 좋은데 찾아가;
남을 알려면 제 자신 부터 알아야 하겠군요 ㅠ 요번에도 좋은 글 잘 읽었어요 ^;^
요시! 그란도르시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