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은 그 자리에 있었다. 길고양이의 소행인지 개의 소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당하게 굵은 두 가닥의 길쭉한 똥은 4개의 작은 길이 교차하는 그 중심에, 내 발이 혹시나 그것을 밟지나 않을까 하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며, 놓여 있었다. 그것은 따스한 햇빛 아래에서 하나의 생명과도 같았다. 그리고 비가 왔다. 똥은 흔적도 없이 빗물에 녹아 내렸다. 하지만 똥이 놓여있던 그 자리의 주변부를 지나갈 때 나는 똥이 지면 위에 붙어있었던 그 지점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똥은 사라졌지만 그리고 그것은 지각적으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똥은 자신이 있었던 자리의 블럭을 오염시켜 그 블럭 위를 지나가기를 기피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머지않아 나는 그 똥의 흔적을 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블럭이 똥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사실 또한 잊을 것이다. 허나 언젠가 내가 그 블럭 위에 넘어진다면 내 손이, 내 엉덩이가 그 블럭위에 접촉을 한다면 나는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똥의 자리였다고. 비록 똥은 빗물에 씻기고 빗자루에 쓸리고 이미 그 블럭 위에 자신이 존재했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있지만 그리고 그 존재의 가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 관념에는 똥의 존재는 여전히 그 블럭 위에 남아있는 것이다.
똥이 덧씌워진 블럭 그것은 이미 감각적으로도 오염된 블럭이다. 감각이란 순수하게 감각일 수 없는 것, 이미 순수한 감각은 똥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나의 관념은 똥을 느낀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몸에서는 소름이 돋는다. 집에 달려와 묻지 않은 똥가루를 털어내고 물로 씻어낸다. 존재하지 않은 똥가루를 털어내는 것, 그것은 순수하게 관념적이다. 똥은 관념이 되어 내 손에 달라붙었고 나는 관념이 아닌 물질적인 행위를 통해 관념적 똥을 내 몸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몸이 아닌 관념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똥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관념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 관념적 똥은 내 머리 속에서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한다. 이 저주받은 길을 지나다닐 수 밖에 없다면, 나는 이 똥의 관념을 관념으로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이미 이 길 위의 블럭에는 똥이 없다. 똥가루 하나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이 블럭 위를 신발로, 혹은 맨발로 밟을 수 없는 이유는 똥이 존재했다는 기억, 관념적 트라우마에 의한 착각에 기인한 것이다. 똥은 없다. 똥의 성분을 계측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가져와봐도 좋다.
그래. 해결책은 그 기계에 있다. 똥은 감각적으로 느끼져지 않지만 내 감각으로 구분할 수 없는, 그 역치 아래에 똥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그 착각, 그것은 어찌보면 착각이 아닌 합당한 추론이다. 감각의 아래에 있다고 해서 똥이 관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감각보다 세밀하고 정밀한 기계가 똥의 진정한 존재 유무를 가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계가 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측정결과를 나에게 알려줄 때 나는 이제 그 블럭 위를 마음놓고 지나다닐 수 있게 될 것이다.
똥이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길 위에는 똥이 관념적으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리고 기계는 그 관념적 똥을 내 머리 속에서 치워주었다. 물리적 행위를 통한 관념의 씻음. 똥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관념이 아닌 물질적인 똥이다. 그리고 그 똥에 대한 관념적 착각은 착각이 아닌 합당한 추론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의 존재와 추론의 옳고 그름은 기계를 통해서 증명될 수 밖에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나는 결코 감각을 통해서 똥을 인지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고 또한 나의 추론, 똥에 대한 불안은 증명될 수 없는 추론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정신은 똥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의식하여 그 블럭 위를 지날 수 없게 만들었다. 존재란 나의 識에 의해 인식되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이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 세계는 나의 인식과 동일하다. 인식되지 않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음과 같다. 하지만 인식되지 않은 존재가 힘을 가질 수는 있다. 감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똥이, 혹은 어떠한 정밀한 기계로도 측정되지 않는 똥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내 몸을 침범하여 내 몸에 하나의 작용(病)을 일으킬 가능성은 있다. 과학은 기계를 통하여 인간의 인식차원, 역치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현상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존재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계의 탐사는 인간의 주관성을 넘어선 것으로 생각된다. 물자체에 대한 낭만적 꿈. 인식을 넘어선 존재. 하지만 기계는 객관적인가? 기계 역시 주관적이다. 기계는 기계의 인식기관을 가지고 있고 인식기관은 존재를 규정한다. 또한 기계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다. 따라서 기계는 결코 물자체를 탐구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역치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문제다. 그래서 인식을 넘어선 존재의 문제는 다시 인식의 문제, 識으로 회귀한다. 주관을 넘어선 객관성, 혹은 존재 그 자체는 상상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과학적 사실이 사실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혹은 주관적 인식과 분리된 존재의 사실로 인식된다는 것은 심한 착각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인식은 주관으로 회귀한다. 주관으로 회귀하지 않는 인식이 있다면 그것은 神 이외에는 상상하기 힘들다. 존재는 識에서 존재성과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인식기관이 안-이-비-설-신-의로 되어 있다고 해서 그 이상의 인식기관을 가진 생명체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제 7의 인식기관을 가진 생명체는 존재의 다른 측면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7의 인식은 우리에게 없는 것이지만 그 또 다른 생명체에게는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그들에게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존재는 경계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識은 존재의 왜곡이 아니다. 존재는 식에서 태어난다. 識을 초월한 존재는 상상될 수 밖에 없다.
모든 識을 넘어서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구상, 그것은 일견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구상이든 그것은 또다른 識의 범주에 있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주관성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러한 하나의 識의 범주로 다른 識의 범주를 아래에 놓고 절대적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자신의 본질이 識이라는 것을 인지못하는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 존재란 결국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고 지식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識이란 주관도 객관도 아닌 그 경계이며 識에 포착되지 않았던 존재는 다시금 識에 의존하여 자신의 힘을, 존재를 알릴 수 밖에 없다. 똥이 자신의 존재를 역치의 아래에서, 기계를 통해 알리는 것, 그것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나의 주관으로 다시금 회귀함으로써이다.
잘 읽고 갑니다. 추가로 떠오르는 생각. 자아와 타자, 자아와 세계 사이에는 인식의 한계라는 거대한 심연이 놓여 있습니다. 이 심연을 건너뛰는 방법은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감각을 초월한 새로운 감각을 얻기 - 흔히 깨달음의 길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생각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여는 것입니다. 대상에 믿음을 줌으로써 인식의 심연을 뛰어넘기 - 이건 신앙의 길이라고 합니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새로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깨달음과 신앙의 테마가 불교와 기독교의 중심에 각각 자리하고, 여태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이끌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글 잘 봤어 근데 불교에서는 유식이라고 해서 5관 말고도 2가지 인식이 있다고 하잖아 첫번째는 아라야 식 두 번째는 말나 식 우리도 충분히 5관 이상의 인식가능성을 품고 있는게 아닐까
아뢰야식, 말나식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그림에 있어서 그것 또한 識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고 당연히 인간의 인식은 동물, 곤충의 인식과 다르고 그에 따라 다른 현상이 펼쳐진다. 자세히 썼기 때문에 딱히 더 덧붙일 필요는 없는 거 같고. 다만 더 전개를 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