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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라는 집단에 속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연기를 하며 살아 간다. 우리에게는 주어진 배역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암묵적으로 약속된 배역을 연기해낸다. 인생이 연극이라는 말의 진실은 단순히 내가 의식적, 의도적으로 하나의 배역이나 캐릭터를 정해서 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찾아서 그것을 연기해낸다. 이러한 역할의 의미는 단순히 가면이나 가식이라는 말로 불리울 수 없다.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다시 말해 인생이 연극이라는 상황은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연극은 이미 주어져 있고 나는 연기를 해야한다. 내가 어떠한 타인과 함께 놓이게 될 때 나는 무대를 올라간다. 아니, 나는 이미 무대에 올라가 있었고 대본은 씌어져 있었다. 나는 그 대본을 해석해서 나의 역할을 찾아낸다. 아니, 역할의 수행은 이미 삶에서의 무의식적 행동과 거의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 역할의 수행은 해석 이전의 것이다. 가면은 얇고 그것은 내 피부에 틈 없이 달라붙어 이미 나의 피부자체가 된 무엇이다.
 
 역할은 관계를 규정한다. 또는 관계는 역할을 규정한다. 이것은 순환적이다. 내가 어떠한 사람과 만날 때 우리 앞에는 하나의 역할과 관계가 펼쳐진다. 연장자-연소자, 부모님-자식, 파는 자-사는 자 등 수 없이 많은 역할과 관계들이 무수히 펼쳐진다. 나의 역할은 항상 변한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형이고 누군가에게는 동생이다. 누군가에게는 갑이고 누군가에게는 을이다. 내가 누군가와 마주칠 때 나는 나의 역할을 배정받고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하나의 룰이고 우리는 서로에게 암묵적으로 공유된 룰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역할이란 항상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나이 많은 후배"는 역할이 이중적으로 겹친 사례이다. 나는 후배보다 나이가 적다. 따라서 나는 연소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학교라는 공간 혹은 직장이라는 공간에선 나는 그보다 위계적으로 상위에 속한다. 역할이라는 것이 수행하는 기능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주요한 것 중 하나는 위계적 질서를 규정하는 것이다. "나이 많은 후배와 나"와의 관계는 위계적 의미의 갑-을 관계가 뒤섞여 있다. 나이를 따지면 을이지만 일정한 사회적 공간에서는 갑인 관계, 그러면서 이러한 공간들은 배타적으로 구획되어 있지 않고 겹쳐져 있다. 이중의 역할이 동시에 주어지고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또다른 암묵적 규칙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나와 그 후배와의 관계와 역할은 애매해지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적 균열이다. 나이 많은 후배와의 관계에서 나의 정체성은 둘로 갈라지면서 겹친다. 그리고 머뭇거림과 어색함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균열은 인생이 하나의 연극이라는, 우리는 연기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지시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폭로되길 원하지 않는다. 연극은 탄탄한 지면 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를 대비해 우리는 하나의 룰을 다시금 추가한다. 이 공간에서는 나이가 우선이다, 저 공간은 선배라는 지위가 우선이다. 그렇게 역할의 모순과 겹침은 하나의 땜빵을 통해 입막음되고 우리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임시변통에 불과한 것이어서 언제 다시 감춰진 역할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미 말했듯이 역할이란 하나의 위계를 결정한다. 따라서 역할놀이는 하나의 사회적 질서와 윤리를 구성한다. 내가 누구와의 관계에 들어갈 때 나는 역할을 배정받고 그 역할에 따라 다시금 권력적, 위계적 관계가 설정된다. 대기업 라면 상무와 중소기업 회장님은 자신이 항공사 승무원과 호텔 지배인에 대해서 갑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 상대자 역시 자신이 을이라는 위계적 지위에 처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연기를 한다. 대개의 경우는 이러한 갑-을의 도식은 문제될 것이 없다. 허나 이들의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역할에 너무 심취하여 과도한 연기를 수행했다는 점이다. 대본과 역할은 이미 서로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 역할의 수행이 과도하게 연기될 때 그 연극은 깨어지게 된다. 그것은 마치 베드신을 찍다가 그 베드신에 너무 몰입하여 '삽입'을 시도하는 것과 다름없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애틋한 감정에 몰입되어 이것이 실제인지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짜인지 구분이 안되는 상황 속에 '여배우'가 빠져있었다고 하더라고 남자배우가 '삽입'이라는, 역할에 너무도 충실한, 과도한 연기를 수행하려고 하는 순간 여배우는 이것이 연극적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서로간의 애무는 거기서 멈춰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상무님과 회장님이 자신의 역할에 과도하게 심취해서 대본에 씌여있지 않은 삽입을 시도하게 될 때 그들의 무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허나 케이블 방송에서의 성기노출(HBO)과 실제 삽입이 이루어진 연극적 섹스는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과도하지 않은 것은 과도함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암묵적 역할 규정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연극은 깨어지지 않는다. 대부분 인간은 이러한 대본 앞에서 매우 무기력하고 자신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함은 자기 책임의 면제와 같은 안정감을 준다. 명분, 정의, 이데올로기 등은 새로운 규정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를 통해 나는 연기 뒤에 가려져 보호 받는다.
 
 다시 또다른 예로 돌아가 보자. 최근에 불거진 갑-을 논란의 핵심적 사건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유 대리점에 대한 갑의 횡포? 이러한 범주에 들어가는 사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공분을 일으킨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사회는 자신과 같은 입장인 약자에 많은 동정을 보내지 않는다. 약자의 강자에 대한 항거?는 대개 그들 집단의 이기심으로 치부되고 그들로 인해 받는 불편함 혹은 경제적 손실에 대한 계산에 더욱 열을 올린다. 따라서 갑의 횡포와 같은 과도한 연기는 이미 사회적으로 암묵시된 대본에 가깝다. 비록 그것이 합법적 대본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결국 이 우유 대리점 사건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논란을 일으킨 이유는 갑-을관계의 부당함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이 논란이 된 진짜 이유는 나이 어린 청년이 나이 많은 중-장년의 어른에게 싸가지 없이 욕을 했다는 바로 그 지점에 근거한다. 즉 영업사원-대리점 관계에서 파생된 역할의 과도함이 '연장자-연소자' 관계의 역할을 파괴한 것, 그것이 우유 대리점 사건의 본질이다. 이 사건은 우리사회가 근본적으로 어떠한 역할과 관계를 더욱 중요시하고 금기시하는지에 대해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최근의 패륜고교생이라 불리는, 봉사활동에서 자신과 노인과의 위계관계를 전도시킨 사건도 우리가 금기시 여기는 역할 대본을 깨뜨렸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잘 드러난 사례다. 그럼에도 이 고등학생의 역할 파괴는 근본적으로 역할이라는 대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파괴이고 그러한 역할파괴 사건은 우리의 연극적 상황을 폭로하는 것이 아닌 연극을 더욱 강화하는 연극 속으로 빠져들게끔 한다. 결국 패륜고딩이 수행한 위계의 전도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러한 위계에 뿌리깊게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고 그 고딩은 철저하게 연극 속에 갇혀있다.
 
 연극의 자기폭로 그것은 때때로 일어난다. 그때마다 대본은 다시 쓰이기도 하고 임시방편으로 봉합을 하여 다시 연극 속으로 배우들을 밀어넣기도 한다. 또한 배우들은 그 누구보다도 연극 속에 머물고 싶어 한다. 실제적 자살 역시 무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선 연극적 자살만이 진정한 자살이다. 우리는 우연히 연극이 폭로된 자리에서 배우 아닌 배우를 만나곤 한다. 그 이질감. 헐벗은 만남. 자기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