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존나 특이한 생각을 하나 했는데,
이 만화의 이 장면이 갑자기 생각났다.
이 만화는 시선의 문제를 다룬 만화다.
근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시선에 대한 문제인데,
이 만화 속 주인공이 "너네들이 사라지면 또 다시 허구속으로 되돌아가야한다고" 라고 말하는 장면이 보일 건데,
이 만화에서 말하는 '허구 속'이라는 게 뭔지 알겠단 생각이 든다.
그전에는 몰랐는데, 갑자기 이걸 알 것 같다.
그게 뭐냐면
대비하여 봐야한다.
허구 속이 아닌 것은 어떤 도식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생각을 오래하다보면, 어떤 지식의 틀을 갖게 되는데,
이걸 갖고 있는 상태에서 투영을 하면 뭔가가 보인다.
진짜 그렇다. 내가 이 시선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거든, 이상하게 보이는 게 있다.
근데
그걸 잃어버리게 된거지.
기억의 한계탓인 것 같은데, 일시적으로 망각해버린 거다.
그러니까 흐릿하게 보여서 안보이게되버린다.
그래서 안보이게 되면 (망각하게 되면)
그 상태에서 발견되던 것들이 보이지 않으니까
다시 눈 앞에 보이는 불완전한 이미지들을 마주하면서, 피상에 쫓기게 되고,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불완전한 사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 상태는 망상이라 불러도 무방한 것이고, 따라서 허구로 여겨도 무방하다.
그래서 허구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
만약 주인공이 진짜 호문쿨루스를 찾지 못하면
그는 굉장히 애매한 상태에서, 보이던 것을 못보게 되는 애매한 상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가 왜 땀을 흘리는지는 그것으로 설명된다
사실 이 만화가 다루는 게 '시선'의 문제와 관련해서
당혹감과 번뇌에 대한 문제인데,
이 시선은 계속 쫓기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마음속에서 계속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 번뇌를 꿰뚫어 보게 하는 '안'이 필요한데,
그게 호문쿨루스였지.
근데 그걸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 묘사되는 장면은, 그 안을 잃어버린 사람이 불안에 빠져버린 상태고
예전에 이걸 봤을 때도 대강은 이해했었는데,
지금 보니까 확 와닿는다.
이 설명이 어느정도 설명력이 있다면
이 만화 작가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지.
이걸 지금 말하고 있는 나도
이 상태를 마주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간단하게 한번 찔러본다.
시선에 대한 문제는 '전경화'와 관련된 문제다
한마디로 '주의 배분의 원리'에 따라, 주의가 배분되는 문제다.
이 때 주의가 쏠리는 사람이 있고, 쏠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보통 사람들 또는 여자들의 고민은, 나에게 시선이 오지 않는다는데서 비롯된다.
여성 인류학자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여성들은 이 시선이 오고 안오고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 시선이 오게끔 하는데 사활을 걸게 되는데, 성형, 옷, 힐, 화장, 이런 것들은 대개 그런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다 끝난 건 아니다.
전경화된 대상,
주의가 쏠리는 대상,
그들은 여전히 문제를 겪는다.
하나가 휘발성의 문제이고 (시선은 휘발적이다. 한번 준다고 불변 또는 고정되지 않는다)
하나가 주도권의 문제다. 시선을 주는 쪽은 종도 아니고 주도 아니다. 사실 이게 진짜 문젠데, 주도 아니고 종도 아니기 때문에 '주'가 되려는 시도, '종'으로서 위장하려는 시도 등이 일어난다. 결국 주도권을 잡는 문제로 간다.
그래서 시선을 주는 사람들이 '조련질'을 하기도 한다.
이게 실제로 시선을 주고 받을 때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다.
니가 나한테 시선을 준다고?
너는 나한테 시선을 준다는 행위를 함으로써 나에게 일시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주는 것으로서 니가 염두에 두는 다른 사람을 컨트롤 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자들이 이런 걸 자주 하지. 어떤 남자가 맘에 들 때, 일부로 그 남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다른 남자에게 시선을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떠보게 되지.
그렇다고 시선을 준다고, 그 사람을 '주'로 여기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전략에 의해 선택된 타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선을 받은 사람은 '주'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여자는 때에 따라 '종'으로 자신을 위장함으로써 상대가 나르시즘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에게 쉽게 다가오라고 유도하는 것이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그러나 한단어로 처리하면 '주도권'을 잡는 문제가 된다.
이것이 조련질이다.
이것은 복잡하다.
'주'로만 잡히는 것도 아니고, '종'으로만 잡히는 것도 아니고,
주도권을 잡는 방식도 좀 애매하다.
결과적으로는 상황을 통제하기 위함인데, 그 방식이 너무 애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련질'을 하겠다는 것은 분명하다.
근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이게 보인다.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것은 플라시보 현상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근데
문제는 호문쿨루스가 플라시보 현상이긴 하지만, 바로 그 현상 때문에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주인공의 머리속에 플라시보가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허구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다는 것.
지식
얻었다는 것
프레임이라는 것
그것은 냉정하게 따지면
일종의 플라시보 현상이고 (일치와 무관하게 인지 자체만 본다면)
그것을 쓰지 않게 되면
허구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일단 이렇게 이상한 결론이 나게 된다.
이 얘기를 지금 하는 이유는
이 시선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이 플라시보 현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게 그냥 [그래서 플라시보다] 이런 뉘앙스가 아니라
이 플라시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떠오른다는 것이다.
지금 저 주인공의 말대로 '허구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선의 문제, 외모에 대한 문제, '전경화'에 대한 문제,
여기에서 비롯되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지금 이 플라시보 현상에 대해서 짚고 가지 않을 수가 없단 판단이 든다.
지식의 적용은 결국 플라시보현상을 전제 하는 것인가.
이런 물음이다.
상식적인 생각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허구와 대비하여 살피면,
내가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뭐냐? 하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일단 여기까지 써둔다.
추상적인게 이제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