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Introduction
수학에 관한 철학적 반성에 대하여
현대적 물리학, 심리학, 전산학등의 학문은 그 학문이 출현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학문들이다.이들 가운데 물리학, 심리학, 화학과 같은 분과학문은 근대 이전에는 철학에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자연철학이나 영혼론등의 철학분과가 해당학문 영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각 분과의 효과적 탐구를 위해 약 17세기 이후부터 학문의 분업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에 비해서 수학은 매우 오래된 학문이다. 또한 동시에 상식적으로 다른 학문들과 중요한 다른 특징을 갖는다. 가장 큰 표면적 차이는 수학에는 실험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실험이라는 것은 경험적 관찰을 얻기위한 수단이며, 따라서 수학이 경험적 관찰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과 무관하게 여겨지는 수학의 기여가 없었다면, 우리의 문명은 이렇게 발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수학에 관한 철학은 무엇을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몇 가지로 대답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수학의 대상이 무엇인가? 수학적 지식의 획득방법이 무엇인가? 수학적 지식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이다. 수학적 탐구대상은 다른 학문의 탐구대상과 다르다. 수학적 탐구 대상과 그 외의 학문의 탐구 대상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수학적 탐구대상이 구체적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이러한 수학의 본성에 관한 탐구에 있어서 수학적 탐구 수단, 즉 수학적 수단, 특히 논리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는 탐구가 어렵다.)
수학철학의 위치
수학에 대한 반성은 철학에서 매우 오래된 분야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가령 현대의 많은 수리철학자들이 플라톤주의자(Platonist)라는 사실은 그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수학적 지식에 대한 입장에 따라 매우 광범위한 철학적 입장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예를들어 근대의 경험론-합리론의 차이에도 수학적 지식의 본성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크게 기여하고 있다.
고대 철학에서의 수학철학
(1)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의 경우 매우 독특한 수학에 관한 철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유명한 주장“만물은 수다.”에서 수는 주로 자연수 혹은 그것의 확장인 유리수를 의미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직각삼각형에서 성립하는 피타고라스의 정리 자체가 무리수의 출현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피타고라스 학파의 경우 수학철학을 종교적 교의와 뒤섞어 놓았기 때문에 그 주장의 진의를 파악하기란 대단히 힘든 작업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상식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경우 학파내의 중요한 수학적 발견을 모두 피타고라스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점이다. 때문에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정작 피타고라스 본인이 발견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2) 플라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당대의 수학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당대의 수학적 탐구는 주로 기하학적 탐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오늘날의 널리 알려진 수학에 대한 입장과 역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기하학적 문제를 대수적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의 수학은 기하학을 기본으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히랍지역 이외의 지역들의 경우 수학을 기술적인 방식 혹은 실용적 차원에서 다루었으나, 그리스의 경우 수학을 학문 즉, 체계적인 논증으로 고려하였다. 유클리드의 기여는 당대 그리스 세계의 수학적 작업이 갖는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학문은 연연적 논증방식 혹은 공리계를 도입하여 5개의 기본 공리로부터 수많은 정리(Theorem)들을 이끌어 낸다. 한편 대수의 발전의 경우 기하학보다는 매우 늦었다. 대수(Algebra)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분야의 기여는 주로 아랍세계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적 방법, 즉 연역적 논증방식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에서 볼수 있다. 변증법이라는 것이 철학사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어려운 의미로 뒤바뀌었지만,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은 기본적으로 연역적 논증이다. 아카데미아의 현판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발을 드리지 말라”라는 문구에서 기하학은 연역적 논증을 할 수 있는가를 의미했다.
플라톤의 수학에 관한 주장은 주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1) 존재론적 주장
‘열 사람 더하기 두 사람은 열두 사람이다.’와 ‘10+2=12’는 분명 다르다. 우리는 후자의 계산을 전자의 사례가 없어도 할 수 있다. 존재론적 주장은 이런 구체적인 ‘12개인 것’들이 없어도 ‘12’라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입장이며, 이에 대해서 플라톤의 경우 그것을 인정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수학철학에 대한 존재론적 주장 : 기하학적 도형의 사례들은 이 세계에서 경험할 수 없다. 즉 ‘이 세계’에는 사례가 없다.(이 세계의 사례들은 불완전 하거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 없이 수학적 대상은 존재한다. 따라서 수학적 대상들은 경험적 대상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플라톤의 경우 수학적 탐구 방법은 경험과 독립적인 방식으로 이루어 질 수 있어야 한다. 즉, 수학적 탐구 방법은 경험될 수 있는 사례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수학적 탐구는 감각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수학적 대상들은 추상적 존재(Abstract entity)다.
@Abstract entity의 존재론적 지위에 관하여
구체적인 것들 - 감각가능한 것, 인과적인 것(감각되기 위해), 시공간적(인과적이기 위해)
추상적인 것들 - 감각 불가능, 비 시공간적
그렇다면 추상적인 것들은 어디에 있어야 하나? 우리가 Mind라고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대의 주류 입장은 정신이 물질에 의존한다는 입장이다. 물론 이것은 수리철학의 문제라기 보다는 심리철학의 문제다.
2) 인식론적 주장
수학철학에서 수학적 대상들에 대한 질문 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이러한 대상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의 지식은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으로 나뉜다.(즉, 선험성과 경험성은 인식론적 차이)보통 선험적인 것을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선험성의 정확한 의미는 세상의 경험적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알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것의 예로는 내일 비가오거나, 내일 비가오지 않는다. / 철수는 철수다 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수학에 대한 인식론적 주장은 수학적 지식이 선험적이라는 주장이다. 즉, 플라톤의 수학철학에 대한 인식론적 주장은 수학적 지식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존재론적 주장에 비해 매우 상식적인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는 자연과학 탐구에 실험실이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물론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었으나, 이를 통해 적어도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에게 자연과학의 탐구가 선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주장과 인식론적주장을 뭉뚱그려서 플라톤주의라고 한다.
이것이 수학 실재론의 대표적인 입장인 플라톤주의(Platonism)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 된다.
1) 수학적 대상들은 현실세계의 사례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2) 수학적 대상들은 인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이야기 되는 수학적 대상들은 도형, 입체와 같은 형상들, 그리고 수를 의미하며, 현대에 와서 수학적 대상들에는 집합, 함수들도 포함된다.
@수학적 존재들에 대한 실재론의 문제
수학적 존재자들이 실재한다는 주장은 수학적 대상들이 실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일 터인데, 우리는 이 질문을 보다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수학적 대상이 실재하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수학적 대상이 인식과 독립적으로 있는가?하는 물음으로 바뀔 수 있다.(실재(real)한다는 것의 의미가 인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임으로) 우리의 일상적인 태도는 물리적 존재들은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세계는 있다고 생각하며, 외계인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외계인이 있거나 혹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학적 존재들의 경우 이것은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수학자들의 경우 이런 실재론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계산이나 증명에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음으로) 그러나 수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가령 골드바흐의 추측(Goldbach Conjecture)를 생각해 보자. “2보다 큰 짝수는 두 소수의 합이다”라는 주장에 대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유한한 사례다. 이것을 사례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작업을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 즉, 사례를 통한 증명은 불가능하다. 증명의 방법에 대해서는 유보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이 있는가?에 대해서 실재론자들은 적어도 이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에 하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선 설명에서 수학적 실재론에 있어서 강조한 부분은 인식 독립성보다는 사례(경험적 예화) 독립성이었다. 사례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좀 더 구체화 하자.
말(horse) 사람(Man)과 같은 것은 구체적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속성이다. 날개달린 말(Pegasus), 불노초와 같은 것도 속상이다. 다만 말이나 사람과 다른 점은 그것이 예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불노초가 있는가?라고 물어볼 때, 이 질문의 정확한 의미는 현실세계에 불노초의 예화가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제 수를 일종의 속성으로 고려해보자. 세계에서 많은 것들은 1을 예화하고 있다. 지구, 나, 나의 오른손과 같은 것들은 세계에 유일한 것이며, 따라서 1을 예화한다. 그러나 이 속성을 구체적 속성으로 취급하느냐 혹은 추상적 속성으로 취급하느냐에 따라서 수학적 존재자에 대한 입장이 달라진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수를 구체적 속성으로 취급하지만, 플라톤은 추상적 속성으로 취급하고 있다. 플라톤은 추상적 속성은 이세계의 예화와 관계없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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