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철학 : 재미지고 씐나는 수학철학의 역사이야기(6)
0. Introduction : http://gall.dcinside.com/philosophy/111192
1. 고대 이야기 : http://gall.dcinside.com/philosophy/111193
2. 중세 이야기 : http://gall.dcinside.com/philosophy/111211
3-1 근대 이야기 / 합리론의 입장 데카르트의 경우 : http://gall.dcinside.com/philosophy/111373
3-2 근대 이야기 / 경험론의 입장 로크의 경우 : http://gall.dcinside.com/philosophy/111409
3-3 근대 이야기 / 칸트의 입장 : http://gall.dcinside.com/philosophy/111440
3-4 근대 이야기 / 밀의 입장 : 돈키호테 혹은 용사
돈키호테 혹은 용사 : 존 스튜어트 밀(J. S. Mill)
현대적 관점에서 ‘기하학은 경험적 진리이다.’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다. 이들에 따르면 기하학은 현실 공간에 관한 학문이다. 우리는 다양한 기하학 체계들을 가지고 있고, 어떤 기하학 체계를 선택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그것이 실재 공간을 통해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기하학이 어떤 종류의 학문인가 하는 점이며, 밀은 이에 대해서 기하학은 경험과학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보았던 칸트, 로크 등의 기하학에 대한 입장과 밀이 차이를 보이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기하학이 어떤 학문인가에 대한 의견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네북 칸트
칸트 이후로 수리철학의 주요과제는 칸트에 대한 비판과 옹호였다. 칸트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그러나 칸트가 분석/종합의 구분을 제시한 것이 커다란 기여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학적 진리는 선험적이고 종합적이다.(Mathematical Truth is synthetic a priori Truth)
따라서 칸트의 비판자들은 수학적 진리가 종합(Synthetic)이 아닌 분석(Analytic)이라고 주장하거나 선험(apriori)이 아닌 경험(혹은 후험aposteriori)라고 주장하는 두부류로 나뉜다. 칸트의 비판자중 대부분은 선험성은 긍정하면서 종합성을 거부하는 방법을 취한다.
선험성을 거부하는 사람은 드물다.(역사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선험성을 거부하는 매우 용감한 사람도 있었다. 밀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것이 용기냐 만용이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만용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현대에서도 밀의 시도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기하학적 입장에 한정해서)
밀의 용감한 시도: 밀의 기하학에 관한 입장
밀은 19세기 초중반 인물이며, 당대의 수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막 제시되던 시기이며, 힐버트의의 유클리드 체계가 제시되기 이전이었다. 밀은 기하학이 무엇에 관한 학문인가에 대해서, 일상적 대상들의 기하학적 속성에 대한 이상화(idealize)라고 답한다.(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적 대상들이 사물들의 수학적 속성들의 추상화한 것이라고 답한 것과 유사하다.)
밀의 주장1 유클리드 기하학의 존재론적 입장
기하학은 대상들의 기하학적 속성에 대한 이상화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유사하며, 이는 기본적으로 밀이 경험론자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밀의 주장2 유클리드 기하학의 인식론적 입장
기하학의 증명들은 선험적으로는 불가능하고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
밀은 이것이 경험의 일반화라고 여겼다. 밀이 고려한 증명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ex) 정리인 ‘두 직선은 두점에서 만나지 않는다.’가 참인 이유는, 우리가 이것의 반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당화 된다.(귀납적 정당화)
칸트의 경우 ‘두 직선은 두 점에서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 경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상가능(imagable)하지 않고(시각화visualize되지 않음) 상상가능(conceivable)하지 않다(개념화conceptualize되지 않음)고 보았다.(둘다 상상가능하다라는 뜻이라 구분을 해야 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것이 상상가능(conceivable)하지 않다는 것으로부터 수학적 진리가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경험적 명제는 아무리 많은 사례를 관찰한다고 해도 그 반대는 상상가능하다.
밀은 상상가능(Conceivable)하다는 것이 반례가 없다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의 관념 구분에 있어서 외적관념과 내적관념이 있다.(밀은 본유관념은 거부한다.) 이때, 내적 관념은 경험에 의존한다.(날개달린 말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날개와 말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 밀은 이때 내부관념의 조합이 곧 상상가능(Conceivable)하다는 것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즉, 상상(Conceive)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한 관념 혹은 개념을 조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가능성(conceivability)은 경험에 의존한다.
여기서의 요점은 기하학적 명제의 부정이 상상불가능(inconceivable)한 이유는 그러한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만약 상상가능성의 의미가 그러한 것이라면, 상상 불가능했던 것이 경험에 의해서 상상가능해지는 경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밀은 그런 예로 과학사에서의 법칙의 변화를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개념은 움직이는 물체는 힘을 가하지 않으면 정지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힘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계속적으로 운동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뉴턴역학에서 주장하는 ‘움직이는 물체는 힘을 가하지 않으면 등속운동한다‘를 받아들이다. 뉴턴 이전시기 까지는 ‘움직이는 물체는 힘을 가하지 않으면 등속운동한다‘는 것은 상상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상이 상상가능성이 경험에 의존한다는 전제로 부터 출발해서 기하학적 진리가 경험적 진리라는 주장에 대한 밀의 논증이다.
반론1
밀이 든 예는 경험과학에 관한 것이다. 과학적 명제는 부정해도 모순이 따라나오지 않는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리는 경험과학과 동일한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상상가능성은 심리적 상상가능성이 아니다. 즉, 밀은 상상가능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반론2
기하학은 개념적 공간에 관한 것이지 실재공간에 관한 지식이 아니다.(주장1에 대한 부정)
근대 철학자들의 일반적인 수리철학의 입장과 비교한다면, 주장1은 기하학이 관념들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거부이고, 주장2는 기하학이 선험적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거부이다.
돈키호테의 최후 : 산수에 대한 밀의 입장
수학의 이론체계를 제시하는 것은 곧 공리체계 즉, 그 체계의 공리들과 추론규칙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밀의 시기 까지도 기하학의 공리체계는 그 모범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산수의 공리체계는 잘 제시되지 않았다.(때문에 밀의 입장을 동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밀의 산수에 대한 주장1 : 수라는 것은 항상 어떤 것들의 수에 관한 것이다.
밀의 산수에 대한 주장2 : 수라는 것은 어떤 것의 수에 대한 일반화다.
밀의 산수에 대한 주장3 : 수에 관한 연산은 경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주장1은 수학의 적용가능성을 염두한 주장이며, 더불어 이 주장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유사하다. 만약 수가 적용되는 대상을 구체적 대상들에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수가 개념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보았던 프레게의 초기의 입장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프레게는 후기에서 이런 개념이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밀은 2+1=3이라는 것을 /// = //+/ 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1, 2, 3은 개체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고 이것들 사이에 재조합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밀의 산수에 대한 주장에 대한 프레게(Frege)의 비판: 프레게는 밀이 수학적 대상들이 직관가능한 것에만 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수학적 이론들은 직관 할 수 없는 대상들에게 까지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ex: 방정식A의 해 한 개와 방정식B의 해 한 개를 모으면 방정식의 해 두 개가 된다. 그리고 방정식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 프레게는 수학이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된다고 보았다. 즉, 밀의 주장대로라면 산수의 적용범위가 한정된다는 문제가 있다.
더 상식적인 비판 : ‘1억 더하기 2억은 3억이다.’ 이것은 마음으로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우리가 이 연산을 함에 있어서 1억을 세는 것이 아님으로)
그러나 이 비판은 밀에 대한 치명적인 비판은 되지 못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산수에 대한 밀의 주장1은 밀의 경험론을 전제하지 않는다면(경험적으로 셈을 할 수 있는 무엇의 수라는 것으로의 제한) 수의 기본적용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프레게의 초기 입장과 유사하다.
부록
임의의 n에 대한 F의 수는 개념적인 방식으로 제시할 수 있다.(ex 사과가 n개 있다. 파란색인 것이 n개 있다. 등등)
F가 0개다. : ¬(∃x)Fx
F가 1개다. : (∃x)(Fx∧(y)(Fy→x=y)
/ F를 만족하는 x가 적어도 하나있고, 기껏해야 하나있다.
F가 2개다. : (∃x)(∃y)(Fx∧Fy∧x≠y∧(z)(Fy→z=x∨z=y))
/ F를 만족하는 x가 적어도 두 개 있고, 기껏해야 두 개 있다.
유사한 방식으로 F인 것이 n개 있다를 자연수를 도입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수를 존재론적으로 환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수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위와 같은 환원 작업은 러셀의 존재론적 입장을 함의 하고 있다. 더불어 이 분석은 겉보기 문장구조와 논리적 구조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F인 것이 1개 있다는 러셀의 \'on denoting\'에서 제시된 한정기술구에 대한 논리적 형식으로의 분석과 동일하다.) 그러나 수 개념을 제시하는 것에 있어서 ‘무엇의 수’라는 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밀은 정치철학 아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