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요함에 지치면 심심해지고 심심하면 바뻐지고 싶어한다.
우리는 바쁨에 지치면 쉬고싶어한다.
이것도 저것도 질리기에 규칙적으로 적당히 바쁘고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하면 그나마 덜 지치지만 계속해서 유지한다면 이제는 일탈하고 싶어한다.
삶을 제멋대로 무규칙적이고 무질서하게 살다보면 또다시 규칙적인 삶을 살고싶어한다.
먹는것,입는것,보는것,말하는것,생각하는것 이 모든것은 싫증이 나도록 되어있다.
어느 하나에 만족하며 살아갈수 있다는건 내적인 안정에서는 크나큰 축복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계속되는 변화를 강요당할수밖에 없지만 애석하지만 알더라도 어찌할수가 없다.
이러한 변화를 향한 움직임을 주체하는 최초의 자극은 지루함,심심함,짜증,불만 등의 느낌인 고통으로 인해 변화하는것이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지금의 행복에서 움직이기가 귀찮을지도 모르고 아니, 가만히 있더라도 배고픔이라는 고통이 없다면 모든게 귀찮아서 그 상태로 굶어죽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고통은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이길로 가서 고통받는다면 사고후에 좋은길을 모색하는 패턴으로 이런저런 사고와 함께 잔머리도 발달하고 생각이 깊어진다.
여기서 빠져나갈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할수있는 모든것들에서 충분히 알고 더이상 알고싶지않을 지경에 이르는방법이다.
끈임없는 깊이있는 사고를 통해 그것들의 모든 시스템적인 패턴을 알아차리고 앞의 상황들이 대강 예측이 가능하다면 질리고 싫증이 난다.
변화를 강요당하기가 싫다면 변화의 모든것에 대한 궁금증을 궁극의 끝까지 알아버리면 변화조차도 지루해지며 별다른 시도를 하지 않을수있다.
즉, 어쩔수없이 변화를 하고있지만, 여기에는 궁금한게 별로없기에 얽매이지 않게되며 희노애락의 감정을 매우 경미하게 만들어서 고통을 최소화시키는 방법이 있다.
인간은 행복보다 고통을 훨씬 많이 받기에 희노애락을 최소화시키는게 그나마 나은선택일수도 있다.
단순히 육체의 고통과 행복만 비교하더라도 육체의 최대행복은 섹스이다. 하지만 고통에서 최대치는 대략 이빨의 고통인데 제대로 느껴본다면 다시는 당하기 싫을 정도이다.
정신적인것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던 고통을 피하는 방향으로 선택하는것이 최우선이다.
그리고 생각을 많이할수록 그 생각의 현상들을 내것으로 인식하거나 내것으로 만들기위한 욕심이 더해진다. 이때 이 인간의 욕심이란 어느곳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기에 적당선이란 있을수없다.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생각에 욕심이 더해지기에 자신의 현실과는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고 결국 이상과 현실의 이질감으로 인해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으로 고통에 휩쌓인다.
인간의 \"나\"라는 자아는 끝없는 욕심과 끝없이 사고하는 정신으로 인해 정말로 크나큰 고통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이런원리때문에 \"지성\"이란 저주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수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을 먼지하나만도 못하다고 여기는 \"도\"가 탈출구라고 생각된다.
정리하자면,
인간을 움직이며 우주를 있게 해주는 고통으로 변화시킨다. 행복이라는것은 고통에 비하면 매우 협소하므로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의 최우선시 되는것은 고통을 피하는길이며 작은 행복이 존재하지만 그걸 얻기위해 목표를 세우며 또다시 고통으로 돌진하는 끝없이 변화를 시도하며 다람쥐 챗바퀴도는것이 보편적인 문화이며 삶이다.
당신의 이러한 삶에 저주한다면 이것의 탈출구는 육체에 설계된 희노애락을 최대한 멀리하고 그저 느긋이 있음에 만족할수있다면 이미 \"도인\"이 된 것이다.
성인들은 생명의 기본움직임과 우주의 생존의지를 거스른체 그저 느긋하게 있음에 만족할수있다.
내눈에 보이는 모든것을 부정할수 있는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일까? 이게 바로 대오각성인듯하다.
댓 안적고 안오려 하길 여러번 고민했는데 결국 적어버렸네요.. 공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