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올만에 왔다.

앞으로 잦게 활동할 지 안할지는 잘 모르겠다만

잦게 활동하는데에 대해서 회의가 생긴다.


이유가 단순한데 2가지로 말해주마.

그리고 이 앞 글이 말하는 바는 왜 철갤에 양질의 글이 쓰일 수 없는지를 말해주는 글이 될 것이다.


첫째 - 착취

둘째 - 이득


일단 이 갤에서 글을 쓴다는 건, 자발적으로 착취를 당해주겠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어느정도 글에 퀄리티가 보장될 때에 쓰는 말인데, 물론 퀄리티가 보장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데 투입된 노가다의 양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만 있지는 않다. 

어떤 글을 쓴다는 건 그 글을 쓸 때에 들어간 '접근'이 있단 얘기인데,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접근방법이 노출되게 되고, 접근되어서 참조된 지점이 노출되게 되고, 접근할 때의 엄밀함이 노출된다는 얘기다.

머리가 좋은 놈들은 이걸 읽어낸다. 그리고 이걸 뽑아간다. 


예를 들어 NLP가 탄생한 배경을 봐라.

존 그린더, 리차드 밴들러, 이 2사람이 한 것이 무엇이었나? 밀턴 에릭슨이 '말하는 방식, 어휘'을 뽑아가서, 그 발화모델을 구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좀 뛰어난 사람들'이 발화하는 방식과 어휘들을 주로 수집해서, 이들을 언어적으로 분석하고 모형으로 구축했던 것이다.

그래서 언어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Meta모델이라는 것을 내놓게 되고 (즉 인간은 발화를 할 때에 일반적으로 '생략' '왜곡'등을 하는데, 그 생략과 왜곡된 것들을 찾아내는 질문들이 모여있는 것들이다. 어디를 '상기'시켜야되는지가 정리된 것이다.) 밀턴 에릭슨처럼 일종의 바넘효과를 염두에 둔 발화를 '밀턴 모델'이라는 것으로 내놓게 된 것이다.


워렌 버핏과 조지 소로스의 투자습관이라는 책을 쓴, 마크티어라는 사람도, NLP를 공부했던 사람인데

내가 이 사람 책은 정독하지 못했고, 또 성과도 알 지는 못한다만,

이 사람의 책을 우연찮게 읽다가 그의 경력과, 그가 접근한 방식들을 보면서,

그도 스스로 밝히듯이, NLP기법으로 소로스와 버핏의 발화들을 분석하면서 '패턴'을 찾았다고 한다.


이런 것을 참조해보면,

머리가 똑똑한 인간들은 분명 '발화'에서 뭔가를 가져간다.


그러니 '착취'가 되겠나? 안되겠나?

인류의 공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착취되주는 것도 긍정적일 순 있겠다만,

과연 그게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가?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아만'이라는 것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니까 알기 전에는 알지 못해서 허우적거리면서 도움을 구하지만,

도움을 받고 나서 알게 되면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하게 된다. 왜 이러는가? 

불교적 개념으로 분석하면 이런 식으로 분석이 된다.


내가 알게 된 것은, 내가 알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더더욱 1%에 가까워질수록, 이것이 찰나에 일어나는 사고가 되고 자아도취를 일으키는데,

여기서 부수적인 것을 거슬려하는 경향이 생긴다.,

그래서 '타인에 의해서 이렇게 되었다'라는 것을 계속 떠올리는데 있어서 짜증을 느낀다는 것이다.

일단 첫째로 '타인'이라는 것이 들어오자마자 '내가 이렇게 되었다'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게 되므로, 자아도취가 방해된다.

그리고 둘째로 '사후판단'의 발생에서 볼 때 '별거 아니다'라는 것이 자꾸 느껴지기 때문에, 그 전의 올챙이적 상황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경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예화가 있다고 한다. (약간 각색했다.)


어떤 제자가 자신이 뭔가를 알고 나서 부처의 말이 '쉽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부처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이것이 쉬운가?"

제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네 쉽습니다."

그러자 부처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전에는 힘들어했는가?"

제자는 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알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바로 여기서 인간의 특징이 나타난다. 알기 전에는 허우적대지만 알고 나면 잘난척한다. 알겠나?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정성들여 글을 쓰고, 그 글이 그의 허우적거림을 막아줬다고 하더라도, 그의 공로가 인정되는 경우는 없다.

왜? 자아도취감이 그것을 '제거'하려고 들 것이다. (즉 타인의 영향을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두번째는 이득이다.

나한테 이득이 없다. 무주상보시? 지랄하는 소리다. 나는 그런 거 하지 않는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런 걸 한다. 근데 이것도 엄밀히 따지면 굉장히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왜?

내가 무주상보시를 하면, 내 머리속에서는 집착이 사라지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나에게 '감사'해하면서, 종종 시간차가 있긴 하겠다만, 언젠가는 나에게 고맙다는 느낌을 표현해준다.

이것이 나에게 이득으로 다가온단 얘기다. 

잘 구별해라. 보시를 한다는 것 자체는 그런 걸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엄밀히 보면 결국 그래서 돌아오는 게 있나? 없나?, 

이건 따지면 확률의 문제지만, 대개는 있다.


내가 친절한 말을 건넨 사람들 중에는, 그걸 좋게 기억했다가, 나중에 나를 만나면 고마운 감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한테 떡을 하나 준다던지 이런 식의 물질적 보상도 종종 나타난다. 물론 이런걸 꼭 바라진 않는다만 (무주상보시이니)

그러나 현실적으로 냉정히 따져봐라. 나는 잊어도 그가 잊지 않을 수도 있고, 그는 잊고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내가 억지로 그에게 '잊어라'고 강요할 수는 없잖은가?

무주상보시는 내가 하는 것이지, 그 사람한테 강요하는 건 아니다.


뇌과학적으로 분석하면 기억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기억이 그 순간 '지각'으로 올라온 것이다.


따라서 무주상보시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이득이 생긴다.

강조해서 말하면 나는 '무주상보시'이겠지만, 그는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맞다면 그가 보시를 할 것이고, 아니라고 해도 그의 기억이 좋게 올라와서 좋게 대해줄거란 얘기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실용적인 처세술이 된다.


그러니까 현실에서는 무주상보시를 해도 상관이 없다.

이득이 없는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근데, 온라인에서 무주상보시를 한다? 잘 모르겠다. 


물론 나는 무주상보시를 할 수도 있다만,

이것을 냉정히 따지면 '착취'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지 않나 그런 생각도 해본다.

그러니까 '메타'의 위치에서는 '착취'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실제 마음에서는 이게 불편함을 제거하는 '방법'이 되긴 하다만. 말이다.

나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착취'를 하게 된다. 알았나?










물론 대가리가 좋은 새끼들은 이 앞부분에서 이미, 접근을 읽어냈을 것이다.

어디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는가? 이를 보면, 내가 어떻게 접근하고 있고,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지가 보였을 것이다.


아무튼 '착취'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이득'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게다가 내가 '온라인'에서의 관계를 별로 탐탁치 않아한다는 점에서, 

굳이 노가다를 해야되는가? 이런 고민을 해보게 된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글을 씀으로써, 

'왜 그럼 쓰나? 아가리 닥치고 있지'라는 반문이 나올 수도 있겠는데,

이런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이 맞을 수도 있지만,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은 지금 그 고민 내용에 해당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는데 있어서 문제는 없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앞부분의 글은, 이 철갤에서 양질의 글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써주는 글이다.

왜 좋은 글이 쓰여지지 않는지 그 이유를 쓴 것이다.

그게 '착취'이고 '이득이 없다'라는 것 때문이다. 

교환이론의 측면에서보면, 이러면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다 쓸 바야 논문을 쓰거나, 저서를 쓸 것이다.


이 앞에 쓴 글을 한번 곱씹어봐라.

왜 결과적으로 착취가 일어나게 되는지,

왜 결과적으로 양질의 글이 쓰일 수가 없는지,

그리고 굳이 말하면 '양질의 글'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만이 반영된 글인지도 생각해봐라.  

정말로 좋은 글은 사실 과학적인 글이다. 항목이 분명한 글이 좋은 글이다. 그렇지 않은 글은 별로 좋지 않다. 

아무리 딴딴해보여도 잊혀진다.

 













이제 본론으로 가자.

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에 '만'이 들어가있는가?


보통 이 문장을 해석하는 방식은 이렇게 될 것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71191&CMPT_CD=P0001

1. 불교는 집착이 모든 고통을 낳는 원인이라고 가르치는데 임제는 이것과 연관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인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종류의 권위가 집착을 낳는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지요."


2. "임제를 설명하기 위해 좋은 화두가 하나 있어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고승이 무지막지하게 생긴 죽장을 들고 제자들 앞에서서 묻습니다. '이 매가 있느냐 없느냐? 매가 있다고 답해도 때릴 것이며, 없다고 해도 때릴 것이며, 침묵해도 때릴 것이다. 매가 있느냐 없느냐?'. 고승은 그렇게 물으며 제자들을 후려패기 시작합니다. 이 화두의 답은 '새가 날아간다' 입니다. 보통 고승처럼 물어보면 눈앞에 있는 매에 집착하게 되지요. 더구나 스승 아닙니까. 새가 날아간다는 대답은 매가 있다는 대답도 없다는 대답도, 침묵한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어느 상황에나 맞는 정답도 아니지요. 이 대답을 할 수 있는 이는 집착이나 권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깨달음인 것입니다."


3. "대우화상이라는, 혼자 초암에서 기거하기를 좋아하는 고승이 있었어요. 임제는 대우화상이 영리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갑니다. 그는 밤새 대우화상 앞에서 유가론(瑜伽論)을 이야기하고, 유식(唯識)에 대하여 설명한 뒤에 다시 이런저런 문제들을 질문하지요. 이 때 대우화상은 밤새도록 초연히 앉아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더니 아침이 되자 임제에게 "홀로 초암에 살고 있는 노승이 그대가 먼 길 온 것을 생각해서 하룻밤 묵어가도록 했는데, 그대는 어젯밤에 어째서 내 앞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방귀를 뀌어댔는가?"라고 말하며 죽장을 들어 임제를 후려칩니다. 임제는 얻어맞아 다친 몸이 낫자 다시 한 번 대우화상을 찾아가고 또 맞고 옵니다. 두번째 구타에서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은 임제가 한 열흘 가량 쉬고는 다시 대우화상을 찾아가니 대우화상은 임제를 보자마자 또 방망이를 들고 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임제는 재빨리 방망이를 빼앗고 대우화상을 껴안은 채 쓰러져서 대우화상의 잔등을 두어 주먹 때리지요. 그러자 대우화상이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합니다. '내가 초암에 살면서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한 아들을 얻었구나!' 대우화상은 자신의 권위에 초연할 수 있는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강 박사는 "임제는 불법에 부합되는 견해를 얻으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며 "그는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리라고 가르쳤는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는 말이 여기서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4. "마음 속에 부처가 있으면 나는 계속 부처가 되고픈, 배우는 사람에 머물게 됩니다. 아버지가 있으면 나는 계속 자식인 자리에 머물게 되지요.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는 말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에 집착하게 되면 두 사람이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벗어나야 두 사람이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5. "<임제어록>에는 집착을 버리는 방법 중 하나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제시되고 있다"며 "무위진인은 위 즉, 자리가 없는 참다운 사람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에게는 아들, 선배에게는 후배 등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며 "무위진인이 되라는 것은 각자가 매여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 당당해지라는 주문"이라고 설명했다. 강 박사는 "'어느 곳에 이르던지 간에 주인이 된다면 여러분이 서 있는 그 곳이 모두 참될 것(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임제어록>의 구절이 임제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임제는 주인이 되어 서 있는 그곳이 바로 해탈의 커다란 바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통은 이게 전형적인 해석일 수도 있다.

강신주 박사는 '권위'에서 벗어나는 것을 테마로 잡았다.

그래서 모든 글이 기승전권위해방으로 간다.


근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글은, 권위의 집착만 있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의 慢을 달성시키는 방식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이것은 별종의 해석이 될 수도 있으니 참조만 하거라.







예컨대

이 불교에서 뭐를 좀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대가리를 깨봐야 부처를 넘어설 수 없다.

알겠나? 원조는 넘어갈 수 없다. 원조를 보완할 순 있어도 원조를 넘어설 순 없다. 그래봐야 원조 때문에 가능한 거 아니겠나.


내가 큰 스님이 되더라도, 나는 '부처의 제자'다. 알았나?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어느정도 선행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길을 졸졸졸 따라온데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지,

이것 없이 그렇게(깨우침의 상태) 되지 않았단 얘기다.


이 글의 첫 앞 부분에서 '착취'라고 한 부분을 다시 읽어봐라.

나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알기 전에는 허우적대다가 알고 나면 '자아도취감'을 이루려고 한다.

소위 '증상만'이라는 게 생기게 되는데, 

물론 이것은 조금 밖에 모르면서 깝치는 증상으로 지적하는 것이긴 하다만,


나는 이것이 바로 결국에는 존재 자체의 문제로 간다고 본다.

즉 '자기가 깨달은 것'이, 사실 엄밀히 따지면 누군가의 가르침도 있었겠지만,

나의 천재성 때문에 깨우칠 수 있었던 것도 없잖아 있지 않겠는가?

'타인의 조언'은 사실 냉정히 따지면, 누구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자아의 과대한 부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한다. 이 상태가 깨달음의 상태는 아닐 것이다. 왜? 이게 증상만이니까.


근데,

잘 생각해봐라.

이게 결국에는 '만'과 계속 연관이 된다.

만을 갖자면 나는 타인을 부정해야 한다.

왜? 온전히 나로서, 내가 이렇게 똑똑하고 잘났기 때문에 깨친 거 아닌가? 

설령 타인의 도움이 있었다하더라도 내가 잘났으니 그렇게 해독해낼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러면 '타인'이 계속 자기 영향력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을 '받아들여야하는가? 아니면 조취를 취해야하는가?'



여기에

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란 말에 이상한 느낌이 교차되는 걸 발견한다.

언뜻보면 '수행에 있어서 방해를 주는 권위자'라는 생각이 들겠다만, 각도를 틀어보면, '내 안의 자아도취감을 방해하는 존재로서 타인'이라는 것도 나타나게 된다.


결론은 단순하다.

둘 다를 성취하는 것이다.

즉, 대외적으로는 '권위자'제거지만, (포장된 발언이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慢의 실현'이 된다.


알겠나?

즉 '부처(타인)을 죽여버림(제거함)으로써',


언뜻보면

권위와 자리에의 집착에서 벗어난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 순간 비로서 '나'라는 자아도취를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진짜 '자아'에 도취되게 된다. 왜? 이것은 타인이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이므로.


즉, 이제 온전히 '내'가 존재한다.




그리고 나서,

나는 깨우친 자로서, 

이제 타인의 '제자'가 아닌, 내 스스로 홀로 '깨우친 자'로서, 

즉 '도와준 이도 제거한 자로서' 온전히 내가 되어, 사람들에게 '온전한 나'로서 인정받게 되고,


그것으로서

나는 이제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보시'를 행하게 된다.


또는 '관계맺기'를 행하게 된다.





동전의 양면이다.

한쪽을 살피면 권위자 제거다.

한쪽을 살피면 자아도취의 성립이다.





인지적으로 말하면 더 단순하다.

외부에 의한 입력공간의 수많은 시리즈들 중에서 (아이디어의 출처들) 여러가지를 취한 다음에,

출처 자체를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 순간 아이디어는 내것이 된다.







이제 다시 서두로 가보자.

왜 이 갤에서 활동하기가 꺼려지는가?

왜 착취와 이득이라는 게 논해지는가?


만약에 이 글을 다 읽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


니가 내 글을 읽었다고 해보자. 

밑도끝도없이 태클거는건 그냥 경기할 마음가짐이 안되어있었다는 것이니 무시한다.

이 글에 맞게끔 보라. 


읽기 전에는 허우적 댄대가 있었는데, 읽고 나서 뭔가 명료히 잡히는 게 하나쯤은 있었다고 해보자.


이제 어떻게 되는데?

넌 나를 제거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니 머리속에서 나는 없다. 왜? 제거되었을 거니까.

그럼 그렇게 얻어진 아이디어는 어떻게 되는데?


"사실 나도 이런 것쯤은 생각할 수 있는거야."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으로 '둔갑'되게 된다.

즉 무지가 시간차에 의해 사실상 지라는 것으로 둔갑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원작성자는 얻는 게 있다 없다? 없다.




따라서 양질의 글은 쓰이지 않는다.

왜? '자아도취'를 이루려면 타인이 나를 엎드려 절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까.


이 순간 내가 구하고자 하는 건, 물질적인 보상이 유일해진다. 왜? 그건 확실하니까.

따라서 돈되지 않는 글은 쓰지 않는다. 글을 쓰더라도 손해보지 않는 글만 쓴다. 그러니 양질의 글은 쓰이지 않는다.




이 글의 제목은 여기까지 씀으로써 완성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라는 것에 들어있는 慢은 무엇이냐?




바로 니 마음이다.

허우적거리는 상태에서 도움을 구하고, 조언을 구하다가, 

언을 구한 다음에 나타나는 '니 마음의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