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중1때부터인가 시작해서 책으로 배우고,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 대해서 제 스스로 고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깨달음도 있었지만, 결국 캐나다에서 비즈니스 대학을 진학하고 이 세상의 물결을 타다가 요즘 다시 진정한 철학자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잊어버린 수많은 깨달음 같은 것을 다시 찾아보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골방철학이라고 제가 다음에 블로그를 열어서 제가 고찰하는 것들을 적어보려고 하는데 관심있으시면 방문해주세요. http://blog.daum.net/tolerator/?t__nil_login=myblog
공부란 무엇일까?
이 세상, 아니 적어도 자본주의 국가의 사람들은 살면서 가장 중요시 하는 가치관 중 하나가 있다.
바로 교육 혹은 공부다.
인간의 일생을 축소판으로 보자면 탄생 - 공부 - 일 - 노후-죽음으로 구성할 수 있을 만큼, 현대의 인류의 인생이란 이렇게 단순해졌다.
인간이 공부에 대해, 아니, 적어도 공부에 대해서 이 사회로부터 부여받는 중요성이란 실로 대단하다.
우리는 이 사회의 흐름을 대변하는 자본의 유통을 담당하는 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도록 어려서부터 배워왔다.
지금도 아직 자신이 뭘 원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인생을 살고자 하는지,
그런 꿈에 대해 생각할 기회도 없이,
그저 방금 젖을 뗀 수많은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고, 수학을 배우고, 그 어린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다.
과연 공부란 무엇일까?
우리는 대학을 가기 위해 십 몇년을 공부하고, 대학에 가서도 취업을 하기 위해 이것 저것 여러 스펙을 취득하기 위해 분투하며, 막상 그 공부를 끝내고 사회에 들어가서는 그 사회의 생산을 담당하는 일벌레들 중의 하나로 우리의 평생을 바친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아니다.
자신의 학창시절 때에 공부와 거리가 멀었던 학부모들조차도 그 아이들로 하여금 공부만을 해야한다고 가르친다.
운동선수 였던 부모도, 연예인이었던 부모도, 예술가였던 부모도, 자신들이 학생 때에 자신들이 부모들이 했던 똑같은 말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며, 모든 아이들에게 공부를 하여금 강요하고 있다.
과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공부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공부를 하지 않는 인간들은 과연 쓸모 없는 인간들일까?
이제부터 공부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과거 역사를 거슬러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 모습이란 그저 순수한 학구열에 의한 것이었다.
플루토가 건립한 Academy나 중세 유럽의 파리나 볼로냐에서 시작된 대학들은 그저 순수하게 더 배우고 싶어 모인 그런 곳이었다.
세계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하는자, 신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자, 인간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이들 등,
즉, 탐구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그저 "공부"그 자체의 목적을 가지고 정진했던 그런 곳.
물론, 그들이 학문에 정진하면서 그 학업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계속 연구하며 살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직업들은 현대 사회에서 직업이라 불리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과거 과학자는 다빈치나 갈릴레오처럼 그저 연구하고 탐구하고 생각하였다.
우주에 대해서, 만물에 대해서.
과거 의사는 의학을 공부하여 인간의 몸에 대해 탐구하고 질병에 대해 연구하며 사람들을 치유할 목적으로 공부하였다.
과거 신학자는 신에 대해 공부하여 사람들에게 그들을 창조한 이에 대하여 전파하려고 그들은 신학을 공부하였다.
예를 들면, 그저 그 학문이 가진 그 본질에 철저히 입각한 그런 순수한 학구열이었다.
이런 학구열이 있던 사회였지만, 모든 이들이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을 단편적인 예로 들어도 John Locke 같은 학자들은 그저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많은 구성원들 중 하나였다.
유명한 영국인들의 성을 보면 Smith, Miller, Taylor 같은 성들이 있는데,
이런 성들은 과거 그들의 조상이 어떤 가업을 가지고 살았는지 보여준다.
Smith란 성은 Blacksmith라는 단어에서 유래하듯 그저 말 그대로 대장장이나 그런 일을 하던 사람들으로부터 유래되었고,
Miller란 성도 방앗간을 하던 사람들로부터 후손들에게 이어진 것이고,
Taylor란 성도 옷을 재단하고 수선하고 만들던 그런 의상업을 하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 성들이 보여주는 것은 과거 사회에서는 굳이 학업의 길이 아니어도 이런 다양한 여러 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물론, 상업 혁명과 산업 혁명 이후 인류는 자본과 기술, 혁신을 위해 나아가면서 점점 더 인간의 길이 단편화 되어 간 것은 사실이며,
더 이상 세상에느 그리 다양한 직업을 추구하는 풍토가 사라지고 말았다.
현대의 교육이란 부르주아, 혹은 엘리트의 길을 걷기 위해 존재한다.
과거 인간들은 방앗간, 대장간, 수선집 같은 다양한 직업을 가업으로 삼고 소박하게 살았으나,
현대는 진보와 경제력, 그리고 생산성을 위하여 교육을 통해 더욱 더 세상을 기술을 통해 진보시키려고 하며,
인간들 또한 더 나은 교육을 통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정 받는 부르주아의 삶을 꿈꾸며 교육에 열을 올린다.
다만, 현대의 교육이란 인간의 본질에 따르면 그리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내 자신은 생각한다.
물론, 자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길을 찾아 공부를 하지 않고도 그 길을 걸으며 이루는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면, 운동선수들이라거나 요리사들이거나 굳이 대학을 가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다른 루트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길을 이루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는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공부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아마 공부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처럼 뛰어난 문학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문학의 길로 들어가서 공부를 한다거나,
파스칼이나 가우디처럼 태어날 때부터 비상한 사고능력과 수리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런 쪽의 공부를 하도록 최적화되어 태어난 사람들이라거나 라던지 말이다.
내 생각에 인간이 걸을 수 있는 길은 무한하다고 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개인은 각자 고유의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뛰어난 음악성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뛰어난 예술성을 지니고 태어났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뛰어난 말재주를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는 인간이 걸을 수 있는 그 무한한 길의 가능성을 접어두고 있다.
이 세상에 수만가지 직업들이 존재하고,
알아가기 시작하면 무궁무진한 인생의 단면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아이들을, 사람들을 공부의 길로 유도하고 있다.
그저 공부를 하는 것은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
그저 공부를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위대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이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것.
그저 공부를 하는 것은 나중에 장가 갈 때, 더 아름답고 집안 좋은 아내를 맞이하기 위한 것.
등등 어느새 공부의 목적은 그저 이런 사회적 성공을 위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기에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인정 받는 몇몇 엘리트 직종으로 그 수많은 아이들을 몰아가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가 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
부모들은 아이가 법대에 진학해서 변호사가 되기를 원한다.
부모들은 아이가 경영대에 진학해서 회계사가 되기를 원한다.
등등...
어느새 공부란 이런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사짜 직업을 지망하는 도구로,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는 그런 또다른 기계들을 양산하기 위한 그런 매개체로 운영되어지기 시작하였다.
매년 한국, 일본, 중국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1년에 단 한번 있을 그 입시 시험을 위해 그들의 모든 청소년기를 바친다.
그들은 꿈을 생각할 여유도 없고, 취미를 가질 시간조차 없으며, 그들이 누구인가 자가성찰을 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못한채,
그저 기계에 프로그램을 설치하듯, 주입식 교육 안에서 언젠간 그저 잊어버리고 사라져버릴 데이터들을 입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과런 이런 교육 속에서 사람들은 교육의 진정한 목적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을까?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자신의 위대한 철학을 전파하던 공자라는 현자가 있었다.
공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 사람만이 가정을 다스릴 수 있고,
가정을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수 있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교육의 목표이다.
이것 이전에 쓴 철학에 대한 글에서처럼 교육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먼저 자신을 알아야만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떠한 사람이고 싶은지?
어떤 것을 지향하며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등
우리는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이 세계 모든 사람이 시작해야 하는 출발선이다.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면, 자신이 무엇을 공부하며 단련하며 익혀나갈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사람 자신에게 개인철학이 없다면 그저 사회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념들, 사상들, 유행들에 끌려다니는 한낱 노예일 뿐이다.
자기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정진한다면 인간은 그 길을 걸으며 그 자신이 이뤄야할 수많은 자아의 실현을 이룰 수 있다.
수신 (修身) 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파악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신이 걸어야 할 그 자아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에 있다.
그리고 만약 그 자신의 고유하고 합당한 길을 찾고 그 길을 걷는다면 그 인간은 이 세상이 말하는 물질적, 사회적인 성공이 아닌 진정한 행복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 행복이란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걸어야 할 길을 걷고 끝내는 그 일주를 마치는 것. 그것이 아마 진정한 자아의 행복과 성취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제가(齊家)란 후학양성을 의미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만약 이 세상에 영아 시절부터 자아성찰을 하는 위대한 현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교육이란 부모로부터다. 부모는 자녀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어떤 것이 옳고 그르냐를 가르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서 가르친다.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란 이 세상과 같다. 부모에게서 얻은 정보는 어린 나이의 그 아이의 내면 세계를 성립하며 그 아이가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준다.
만약 모차르트가 전혀 음악을 접할 수도 없는 가정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그는 절대로 위대한 음악가가 되지 못했으리라.
가정교육에 있어서 부모가 취해야할 교육의 자세는 현재 많은 자본주의 사회의 부모들이 추구하는 사회적 성공을 위한 교육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한 사람의 "사람"으로써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한다. 보편적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먼저 자녀에게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한다. 어린 나이때부터 올바른 인성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도덕적이고남들에게 모범이 될만한 좋은 가치관을 가진 아이로 성장할 것이다.
만약 링컨에게 어려서부터 성결하고 진실되도록 가르쳤던 두 명의 어머니가 없었다면 아마 링컨은 인권을 보호하고 부당한 것에 대적하는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는 필자가 생각하는 제가의 모든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제가의 핵심은 부모가 만약 이 전 단계의 수신의 단계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 자녀 또한 수신에 정진하도록 가르쳐주고 자유를 주며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의 부모들은 반대만 하는 부모들이 많다. 그 자녀가 걸으려는 길이 "사짜"의 길이 아니라면 대부분 반대를 한다. 왜 인지는 필자도 모르겠다. 과연 아이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그 아이가 걷고자 하는 길을 걷도록 용기를 북돋아 줘야 하지만, 아마 필자 생각에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녀에게 성공적인 사람이 되라고 끊임없이 주입하는 것 같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자녀 한 사람의 Individuality, 즉 그 개성을 존중해주고 응원해줘야만 한다. 인정해줘야 한다는 이 행동 자체가 올바르지 않은 자세를 말해준다. 과연 부모가 어떠한 권한을 가졌길래 자녀의 인생에 Authorization (허가)를 내리는 입장으로 존재하는 지를 필자는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다.
진정한 제가란 그 자녀로 하여금 그 자녀가 그 자신의 자아의 실현을 할 수 있도록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진정한 인생의 길과 행복에 대해 올바른 가치관과 이념을 심어주는 것에 있다. 자녀로 하여금 이 사회가 인간에게 강요하는 그런 가치관이 아니라 올바른 자신만의 인생에 대한 해석과 세계관을 가지고 우직하게 이 세상을 걸어나가도록 가르쳐줘야만 한다.
극단적인 표현으로 군자인 아버지를 두고 태어난 아이는 군자의 길을 걷는다. 왜냐면 그가 아버지로부터 태어날때부터 배웠던 것은 군자가 걷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와 같인 뛰어난 군자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노예인 아버지를 두고 태어난 자는 노예의 삶의 방식밖에 모른다. 평생 구속된채, 억압된채, 자신의 자유를 모른채 평생을 이 세상의 속박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현재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 자신의 군왕의 길을 걸어 자기 자신의 인생을 정복하려는 야심보다는, 그저 이 세상이 좋다고 하는, 달콤하다는 것을 그저 받아가며 살아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돈이 최고라고 하자 사람들은 돈을 최우선하며 살아가고 있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미녀를 취하는 것이 최고인 가치관이기에 오늘도 남자들은 여자와 하룻밤을 가지려 온갖 부단한 노력을 가진다.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그룹에 속하는 것이 최우선이기에 사람들은 오늘도 유행에 맞춰 시간이 흐르면 아무 의미도 없을 온갖 물질들에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플루토의 동굴의 비유에서 나타나듯, 인간이란 그저 이 세상이 보여주는 그림자 연극을 보며 만족하고 있다. 그들의 자아는 갓난아기때부터 단 한 걸음도 진정한 그들의 세상 밖으로 걸음마를 떼보지도 못한채 말이다.
부모란 아이들을 노예가 되도록 가르치면 안 된다. 만약 수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중이라면 그 정복하는 방법을 가르쳐줘야만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선왕 필리포스 왕으로부터 정복자의 길을 전수받아 그 길을 완수한 것처럼 부모들은 그들 자녀에게 인생을 정복하는 정복자의 길을 가르쳐야만 한다. 만약 부모가 자신들이 똑같이 노예로 사는 방법을 자식들에게 대대로 가르친다면, 아마 그 가문의 인간들은 평생 노예의 신분을 벗을 수 없으리라. 진정한 자녀교육의 성취란 자녀가 사회에서 많은 연봉을 받고 좋은 결혼상대를 찾아 배우자로 맞이하며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녀교육과 제가란 그 자녀로 하여금 이 인생의 출발점에서 제대로 된 발걸음을 뗄 수 있도록 걷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뿐이다.
부모가 대신 걸어줄 수 없다. 부모가 자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부모는 또한 자녀의 인생에 대한 책임 또한 져줄 수 없다. 자녀의 인생이란 자녀 스스로가 우직하게 걸어가며 또한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다.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원하는 자녀의 인생의 길을 강요한다면 그 자녀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하리라. 그러므로 진정한 부모교육이란 자녀에게 올바른 인생의 길이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그 다음은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면 되는 것이다. 자녀가 자신의 꼭두각시, 그리고 세상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위대하게 정복하며 나아가도록 가르쳐주는 것이 제가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제가가 이어져서 대대손손 자기 자신의 레이스를 완주한 그런 사람들이 계속 배출된다면 그 가문은 아마 역사 대대로 위대한 가문으로 남을 것이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진정한 가정의 길을 제시한 그런 위대한 가문으로써 말이다.
수신과 제가가 끝났다면, 치국과 평천하는 두말할 것도 없다. 만약 수신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행복하게 걸으며, 또한 자기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그 행복을 전해주고 그 행복을 또한 이어나가게 하는 이 Virtuous Cycle 즉 긍정적인 연쇄효과가 계속 일어나게 된다면 이 사회와 세상 또한 밝아지고 행복해질 것이다.
이 세상이 왜 불행해 보이는가? 그것은 인간이 제대로 된 만족과 행복을 느끼지 못해서리라. 자기의 길을 모르고 방황하며, 그 길을 걸을줄 모르기에 주저앉으며, 그런 좌절 속에서 여러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인간은 돌출된 행동을 하며 도피처를 찾는다. 예를 들면,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여러 반대나 장애물에 의해 축구를 못해서 축구게임에 중독되거나, 아니면 그저 불만족스런 자기 자신의 인생을 잠시나마 잊어보고자 술, 담배, 마약에 빠지게 되는 것도 또 다른 예이다.
만약 행복하게 살아가고 자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그 사람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가득하다면, 이 세상에는 여러 사회적인 장애나 문제, 그리고 사람들의 근심어린 얼굴들이 가득하지 않으리라. 인간이 자기가 걸어야 할 그 길을 걸을 때, 이 사회에서도 그런 자아의 실현을 Maximize/Optimize (최대화)한 그런 사람들로 인해 시너지를 일으킬 것이고, 그런 긍정적인 조화로 인해서 자연스레 발전할 것이다. 인간이 지금처럼 너무나 무리하고 성급하게 발전을 거듭하며 이 세상에 수많은 톱니바퀴들을 고장내는 그런 발전이 아니라, 자연의 조화에 입각한 그런 자연스러운 발전으로 인해서 인류는 진정한 발전을 이루리라.
치국의 올바른 예를 보여주는 소수의 나라들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 북유럽의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같은 국가들은 이 세상에서 보기에 딱히 유명한 것도 없고, 경제적, 기술적으로 다른 몇몇 나라에 비해서 뛰어나지도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프랑스, 영국, 독일과 같은 나라들에 비해서 알려진 정보 또한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GDP를 비교하고 기술력을 비교하고 이런다면 그들은 최상위권의 나라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국가들이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한 통계가 있다. 그것은 World Happiness Index (세계행복지수랭킹)다. 그들은 매년 이 행복한 나라 랭킹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한다. 그들 나라에는 불행한 국민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좇지 않는다. 딱히 사짜 직업들을 좇지 않는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많은 여유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많은 아이들이 자가성찰을 할 기회가 있으며 그 시간을 잘 활용하여 여러가지 경험들을 토대로 취미를 만들어 나가고, 특기를 만들어 나가며, 이런 모든 것이 종합되어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갈 수 있고 나중에 대학을 진학하던 아니면 직업에 종사하던 자기 자신의 그 자가성찰을 바탕으로 많은 성취감을 가지면서 살아가도록 그들 국가에서 개개인의 인생을 지원해주고 있다. 그리고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국가들은 이런 자아의 길에 열중한 국민들을 토대로 천천히 그리고 효과적이게 발전하고 있다. 미국, 일본, 한국 등 100m 달리기를 하듯 뛰쳐나가는 주자들을 지금은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 다만, 먼 미래에는 이들 국가가 가장 자연스러운 발전을 토대로 위대한 국민의 번영을 이루는 국가가 되리라고 의심치 않는다.
행복한 인간들이 자신의 길을 정진하고, 그 길을 그 가정에 전파하며, 그 가정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나라를 이룬다면, 그 국가는 행복해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나라들이 모였을 때, 인류는 진정한 인류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도 없을 것이며, 분쟁도 없을 것이며, 여러가지 다른 가치관과 이념들로 인해 의미 없는 대립또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종래 "평천하" 이 단어가 말해주듯, 인류는 평화를 이룰 것이다.
이 세상은 그저 자기 자신의 인생을 걸어가는 행복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이란 그저 책 속에 존재하는 지식들을 암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란 그저 매년 되풀이되는 똑같은 문제들을 출제하는 시험들을 풀고 점수를 얻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란 그저 직업을 갖기 위해서 마땅한 스펙을 갖추는 그런 사회적 도구로써 운용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또한 아니다.
교육이란 그저 이 사회에서 가장 요구되는 과목들을 억지로 모든 이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란 그저 유치원 때부터 대학교/대학원까지 행하고 끝나는 그런 허무한 것 또한 절대 아니다.
교육이란 무한하다.
교육이란 끝이 없다.
교육이란 자유하다.
교육이란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철저하게 개인적이나 그런 개개인의 길이 모였을 때, 교육은 점점 서로의 조화로 인해 발전할 것이며, 아름다운 세상을 이룩할 것이다.
교육이란 인간이 인생의 길을 걷기 위하여 매순간 행하는 그런 학습이리라.
교육은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자신을 알아가고 이 세상을 알아가며 그리고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해석하는 그런 도구로써, 아니 자기 자신 인생의 동반자로써 여겨져야만 한다.
현재 인간의 교육이란 너무 허무하다.
그저 십몇년 동안 억지로 입력시키고 포맷하는 것을 반복하고
후에는 의미도 없고 기억도 나지 않을 그런 학습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것.
그러나 그 십몇년의 세월 이후 교육은 아마 인간의 인생에서 자취를 감추리라.
그런 교육의 모습 속에서 지금 이 사회는 병들어 있다.
교육이 그 진정한 교육의 모습을 바로 찾고 인간들이 그 진정한 인간의 길을 걷기 시작할 떄, 이 세상도, 이 인류도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훗날 우리 후손들도 아마 걱정, 근심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가능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그 비유가 적절하지 않다고.
ㅋㅋ 제가 상황을 악화시켰나 보네요. 전 사실 싸움도 좋아하는 편이라.. 하여간 남에 글에서 훼방만 놓고 가네요.
ㅇㅇ/ 그런 말투 자체가 이미 존나게 조롱투라니까. 왜 ~답니다 이렇게 말하냐? 니가 훨씬 똑똑하다 이거냐?
넌 자기투사 안하고 있다고 생각하냐?
ㅇㅇ님 제가 몇번을 해명해야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그 어떤 글도 님을 타겟으로 악의를 담고 쓴 적이 없어요. 제발 이정도 했으면 이해좀 해주시길 바래요. 제가 사과까지 몇번이나 연거푸 했는데도 뭐가 님을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네요. 전 님의 입장을 disprove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님의 입장과 저의 입장이 가진 오해나 거리감을 지금 대화로써 풀어나가려고 하는거에요.
(환상의 나래) 그런 말을 하지 말고 니가 자기투사 하고 있나 그걸 보라고.
자기투사란 말은 알고 있으면서 왜 그말을 자기에겐 적용못시키냐 이거지
솔직히 이런 말하면 또 발끈하시겠지만, 순수한 철학자는 그런 고자세를 유지하면 배워갈 수 있는 것이 제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철학이란 자기 방어의 수단도 아니고 대중에게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시키려는 그런 사악한 무기도 아니며 그저 순수하게 생각을 하고 생각을 나누는 용도로 임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믿습니다만 왜 굳이 님은 그렇게 지금 시시비비를 가리시려 하는 건지 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대화의 발전이 없네요.
순한똥개님/ 님과는 대화가 좀 통할 것 같네요. 앞으로도 많은 교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ㅇㅇ님/ 이건 지금 Infinite Regress와 비슷한게 제가 님에게 어떠한 답을 드려도 이미 님이 님의 내면 안에서 정의를 내린 답이 존재할 것 같기에 제가 님에게 더이상 뭔 말을 해드려도 소용이 없을 것 같네요. 계속 이런 대화를 이어나가다간 아무것도 이루지 않는 목적 없고 의미 없는 대화가 될 것 같아서 전 이만 그만하렵니다. 그렇다고 님에 대해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 오해마시길 바랍니다.
ㅇㅇ/ 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자기투사하고 있나
ㅇㅇ님/ 글의 내용을 별개로도 사람이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 그 글이 담고 있는 태도나 감정을 가지고도 그 내용을 전달하려한 수신자의 상태를 발신자가 추측정돈 할 수 있지요. 그저 제가 발신자로써 그렇게 느낀 것 뿐이지 "님이 발끈했다"가 진실로 성립되는 건 아니지요.
Demmeros/ 죄송하지만 수신자가 receiver 아닌가요?
ㅇㅇ/ 그 판단이 진실될 지 아닐지는 그것 또한 거기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대화하면 알게 되겠지. 근데 그렇게 안되고 있다는 게 바로 처음의 전제가 맞다는 증명이 되어 버리는 거고.
/순한똥개님 님이 지금 생각하시는 그대로 Psychology (심리학)에서 말하는 Receiver가 맞습니다. 과거 Communication의 오류에 대해서 배운 것을 입각한 것이에요.
답은 자존심을 버리면 알게 되는데, 누가 자존심 버렸는지는 자존심을 버리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겠지. 착각이니까. 착각한 사람이 자기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 본적있냐
그리고 ㅇㅇ님/ 여태까지 적어도 제가 느낀 님의 자세는 더이상 객관적인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들다고 제 스스로 결단내린겁니다. 물론 님의 말대로 저의 독자적인 판단일 뿐이지요.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는 저의 그 독자적인 판단이 저의 다음 행동을 결정내리니 저에게 있어서는 그걸로 다인 것입니다.
니 질문이 뭔데.
내 답은 스스로 자기투사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그 질문에 답이 있을 것 같다는 거지.
순한똥개님이 언급하신 자존심은 진실된 철학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버려야 합니다. 왜냐면 이미 자신이 진실이라면 더이상 진실을 찾고자 할 의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까요. 저도 자존심을 버리는데 상당히 오래걸렸습니다. 아직도 버리고 있구요. 앞으로도 저는 최대한 겸허한 시선으로 만물을 대하고 싶습니다.
연역이 안될수도 있겠지. 그니까 그게 답인지 아닌지 니가 스스로 너에게 물어보라고.
넌 답을 알고 있을 거 아냐. 니가 진짜로 상대를 높은 위치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건지 아닌지
그건 내 느낌이고, 내 느낌이 맞는지 당사자인 너에게 묻는거지. 근데 이렇게 회피하는 것 보면, 내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나는 느껴지지.
아니라고 대답해도<- 넌 실제로 그런 질문을 하는게 아니라 여전히 중심은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냐지.
ㅇㅇ님/ 님에게 이성적이지 않은 어떤 것이 존재하여도 님의 그 belief 때문에 그것이 Universal 하게 이성적이지 않다는 건 진짜 거만한 자세인것 같습니다. 님에게 이성적이지 않더라도 저에게는 이성적인 판단이 될 수 있는거구요. 칸트가 말했듯이 진실은 모든 사람들을 universal하게 만족시키기 위한 방향성을 지녀야하지만, 실제로 그런 universal한 Truth는 칸트를 인용하자면 Phenomena가 아닌 Noumena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세에서는 그런 Universal한 진실 같은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존심때문이라고 해도 될것 같네.
이런 지적을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지만, 만약 님이 진짜로 철학을 사랑하고 진실에 다가가고 싶으시다면, 옳은 생각을 찾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틀린 생각은 과감하게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틀린 생각이 자기 자신이 주관적으로 옳다고 믿어서 버리지 않고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큰 짐이 되겠지요.
아니라도 대답한다면 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난 너가 실제로 그렇게 질문을 안했다고 생각한거지. 넌 가정으로 말한거니까
~한다면 이라는 말 뜻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니까.
전 왠지 이 의미없는 논쟁은 주관을 버리지 않는 이상 뫼비우스의 띠처럼 Infiinite regress 할 것 같아 이만 나가보렵니다.
실제로 했다면, 믿어줄께.
ㅇㅇ/ 알겠어. 그럼 내 추측은 틀렸다고 할 수 있겠네. 어느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은 이상말이야.
ㅇㅇ/ 아니 당연히 믿는 것은 있을 것이고, 그 믿음이 정당한가 확인하는게 대화지.
그래. 그렇게 믿으마. 내가 널 잘못생각했어.
물론 아까 말했지만, 여기서 서로에게 아무런 거짓이 없다는 전제하에서야
니 행동에서 연역되지 않는다 된다/ 이런 관점 자체에 어떤 자기투사가 있다면 그 관점 자체또한 고찰의 대상이지. 사실 니가 말하는 "연역" 자체에 별로 동의가 안되니까 말이야.
무엇이 과대망상이고 아니다라는 그 기준을 동의하지 않는다니까? 드러난 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더 큰게 숨겨져 있을 수도 있고, 그런 작은 것을 캐치하는사람도 있거든. 다른 사람들이 볼때는 과대망상같아도 말이야.
어린아이가 개미를 태워죽이는 것에서 싸이코패스적 사악함을 본다고 하면, 어린애들을 다 그렇지 왜 과대망상하냐라고 말할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어린아이의 눈빛에서 뭔가를 캐치할수도 있는거야. 그런 캐치는 연역적인게 아니겠지.
그렇겠지. 하지만 너가 매도당하고 있다라는 생각 또한 편견이고 선입견일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라는 거야
그건 어떻게 보면 피해의식적인 거니까말이야.
그 느낌이 자꾸 증명이 되니까 그러지. 넌 자기방어적인 발언만 하고 있거든.
냉혈한이라고 한적이 없다는데 그렇게 느끼는 게 혹시 너가 편견이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해보라는거야
일방적으로 느껴진다 강요받는다. 이런 느낌 자체가 자기방어적인 느낌이라는 거야
그런 느낌을 받고 있으면 뭐든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말이 나오는 거고. Demmoros 가 한 말이 자기는 널 악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오해하지 말라는 거지.
너의 의견을 비판하는 것과 너를 비난하는 것은 다른데, 넌 이 둘을 하나로 생각하는거야
왜냐? 니가 깊게 믿고 있는 것을 비판하면, 니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이 느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 잘은 모르지만
모르겠어.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는것은 어떻게 보면 숙명이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 대해서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더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는 거지. 자기방어적 싸움이 아니라.
그래. 대화하자. 난 대화를 거부한 적이 없어. 그니까 나도 이러고 있는거지.
동등한 입장이라는 건, 자, 내가 이거 인정했으니까 너도 이거 인정해라 이건 아니라는 거. 그건 계산적인 거고, 이해하는 게 아니지
동등한 입장이 무슨 뜻인데?
한쪽의 느낌을 강요할수 없다? 글세 난 거기에 동의하지 않아. 그건 토론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칭찬해주겠다는 것 밖에 안되기 때문에
당연히 토론을 하면 의견이 다르고, 그 말은 어떤 사람이 틀린 사실을 믿고 있을 수 있다는 소리야. 토론이 성립하려면 그 사람이 아무리 부끄러워도 결국엔 옳은 것을 믿게 되니 '좋은것' 이다 라는 것이고.
니가 옳다면 나에게 저절로 강요되겠지. 양심의 가책을 느낄테니
그건 니가 강요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느껴지는 어떤 힘이야.
니가 날 마녀로 생각한다고 해도, 거기에서 난 그 어떤 강요도 느끼지 않아. 내가 마녀가 아니니까.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상대의 말이 강요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내 자신 안에 그 말을 강요로 느껴지게 하는 어떤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낙인을 찍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거지.
낙인을 찍는 것이 싫다는 건 그것 자체가 자기방어적인 것이고, 진실하고는 사실 별 관계가 없는거니까
안받아들이는 거랑 싸우는 거랑은 다르지
내가 만약 부잣집아들이라고 해봐라. 근데 어떤 놈이 나보고 거지새끼 그래. 상관하겠어? 열 내겠어?
물론 나쁜 비유긴 한데, 조금은 다른 상황이라는 거지
근데 그 사람이 착각하고 있는게 안타까워서, 저 거지 아니니까, 저 거지로 증명하려고 하지 마세요. 헛수고니까요. 라고 말했어. 상대가 그걸 공격으로 느낄 수 있겠지. 그런 의미가 아닌데 말이야.
느낌이 동등하다는 말이 뭔지 이해가 안되네
ㅇㅇ/ 정당화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부자라고 했을 때, 거기서 니가 진짜로 부자일 수도 있겠구나.. 라고 느끼거나 구라치네 라고 느끼거나 그 갈래에서 진실이 밝혀지나 아니나의 차이가 있다고 하겠지.
그니까 책임을 설득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부여하려고 해도, 너라는 사람의 책임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뜻이야
ㅇㅇ 그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진짜로 알려고 하고, 그런 태도를 말하는 거지. 그런 태도 자체에 부자라고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이미 들어있으니까
이런 태도와 자기방어적 태도를 구분하자는 거야
진짜로 알려는 태도가 없으니까 선입견과 편견이 생기는 거지
흑인들을 다 그래 <- 한 사람이라는 개별성을 알고 싶어하는 태도가 없기 때문에. 이건 게으른 거고, 자기방어적인 것이기도 하지
그 느낌이 정당한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작업이 대화라고 한적이 있지
근데 대화또한 싸움이 목적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있는데, 이건 대화를 진행하다 보면 드러나게 되는거고
상대가 이득만을 취하고 떠난다면 그건 싸움인 거거든. 근데 그렇지 않은 이유로 대화가 지속된다. 그럼 진짜 대화인거지
내가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야한다고 외치는 목소리.
< 타자 본문에서 이러는건 아닌듯 결례의 범주에 해당 될 수 있다 。>
나에게 이득이 되는 진실이라. 이득의 관점을 영혼의 선이라 해석하면 그렇게 되겠는데, 보통 세상은 참만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참과 거짓을 섞어서 사용하는 사람이 유리하게 되어 있지.
나에게 이득이 되는 진실은 곧 거짓으로 변해버린다고 생각한다.
ㅇㅇ/ 본문 하나 만들어 접촉함 。
ㅇㅇ/ 논리로는 불가능하다고 봄. 뭐 이건 내가 요즘 생각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래서 시적언어를 연구중
후기 비트겐슈타인 같은 맥락이지 약간
ㅇㅇ 걍 느낌임. 근데 그 느낌을 모호하게 아니라, 일상의 언어, 시적언어, 추상적 언어 이런 것으로 전달되는 느낌을 잘 구분하는 거지
상징성에 맹종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난 논리를 부정하는 건 아닌데, 그 한계를 뛰어 넘는 차원을 느낌이라는 말 말고 어덯게 표현해야 할까 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면 되
왜 대화에서 용법을 쓰냐. 그냥 순수하게 대화하면 안되냐 ㅇ
그나저나 너 나랑 챗방에서 이야기햇던 사람이지
그러냐. ㅇㅇ 그니까 넌 타락이라는 말을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사용한다 이거지
근데 난 그걸 존나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거든
왜 장단을 맞춰주냐. 오해했으면 오해를 풀려고 하는게 상정인데
그런 것 자체가 또다시 해석의 여지를 갖게 만드는 거지. 오해를 유발시켰는데, 오해를 유발시킴을 알고도 그것을 풀려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수신자는 그런 것에서 이 사람은 나와 진실된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지
뭐 숫자는 그냥 숫자고, 우연적인 거지. 내가 들르다가 내 생각을 걍 썻는데 겹친거니까
비트겐슈타인이 왜 대화에서의 오해만 없애면 철학의 난제는 없어진다고 했는지 약간 이해됨
사실 내가 보기에 Demmeros 가 조금.. 뭐랄까 대립을 싫어해서 대화를 더 이어나가지 않은 거 아닌가 함. 난 그런 입장보다는 그래도 끝까지 가다보면 어떤 오해는 풀릴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난 키배를 떠도 존나게 오래하는 타입이지.
infinite regress 가 아닌 건 맞음.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이 너 판단한거 맞아 ㅇㅇ
우선, 난 과학적 사고방식이 대화에선 그렇게 의미가 없다고 봐. 왜냐하면 용법의 차이를 과학적 사고방식이 그 거리를 좁힐수는 없거든.
그래. 미안하네 그건
차라리 이런 용법의 차이를 줄이려는 것은 언어철학적 문제라고 봐도 될것 같다.
< 내가 븅신인데 본문 만든다 。>
사실 요즘 철갤은 필자가 대화상대를 찾기 힘들 순 있는데, 내가 볼때는 대화할 만한 사람들도 충분히 있어. 약간 오지랖은듯
ㅇㅇ님// 제가 이미 예전에 말씀드렸지만, 전 이미 ㅇㅇ님이 제게 남긴 글의 의도를 처음에는 수긍하지 못했지만, ㅇㅇ님의 입장에서 천천히 고찰해보니 ㅇㅇ님의 순수한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요. 이미 전 ㅇㅇ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려 했는지 어느정도 캐치했지만 이야기가 점점 Infinite Regress의 흐름대로 논리의 논리를 무는 그런 의미없는 반복을 계속하고 있기에 저에게는 그런 체인현상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그만둔겁니다. 이미 전 ㅇㅇ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았고, 님의 순수한 진의를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세요.
님에게 님의 의견을 피력하는 그런 님의 입장이 있듯이 저는 님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별로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데요. 제가 님에게뭐 답을 주고 싶지도 않구요. 저도 사람인지라 저랑 생각이 맞는 사람과 더 대화를 하고 싶지 제 입장에서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굳이 열을 내어 토론하고 싶지는 않네요. 님이 틀리다는게 아니라 철저한 저의 Preference입니다. 님도 특히 님이 대화나누길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이 제 입장에서는 순한똥개 같은 분들과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게 제 솔직한 기분입니다. 또 이 말에 기분 상하실 수도 있겠으나 그냥 저는 "선택"과 "집중"을 하려 하는 것이지요. 저의 대화를 전개해나가려 할 때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전개할 수도 없고 피곤한 일이라서 말이지요.
성실하게 고민하시고 올린 글이라서 차근차근 다 읽었습니다. 되도록 좋은 리플을 남기고 싶었는데... 필력은 좋으신데반해서 글쓴이분이 하시고계신게 철학이 맞는지라고 묻는다면 아니다고 해야될것 같아요. 철학 그리고 철학에서도 인간학은 인간의 감성을 다뤄야하는 것은 맞지만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왜 인간은 불행한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빠지게 되는게 그 예이다" 글은 매우 편안하게 쓰셨지만 "왜?"에 대해서 암산하듯이 "이러니까" "저러니까"를 남발하는 것은 단순한 감상의 연속일 뿐입니다. 행복에 대해수 아무것도 고찰하지 않았습니다. 글 전..
글 전체가 이런식의 연속인이네요.... 성실하게 글써주신분에 대한 호의로 좋은 감정에 드리는 조언이니 찬찬히 되짚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