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을 발휘해 스스로를 차분하게 설득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은 가능한 길일까?

 

즉.. 벌레도 소고기나 돼지고기와 같이 본질은 원자의 집단일 뿐이라는, 더할나위 없이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기 주입하고 자기 암시하는 것

그래서 소고기를 먹을 때와 같이 다만 원자 묶음을 목구멍으로 넘긴다는 그런 느낌으로 수월하게 벌레를 먹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왜 안 되는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유전진화학자들의 몫이다.

어쨌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감정은 이성이 아닌 실천의 통제를 받는다'는 인상적인 문구는

이 사실과 함께 다음을 생각해보면 한층 깊게 와닿는다

 

아프간 내전에 파병참가를 자원한 한 영국 귀족 자제는 본토에서 언제나 고급 음식만을 찾았다. 그러나 숲 속에 고립되어 열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되자, 이전에는 소름끼치다며 손사래쳤을 나방애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근처 나무들을 샅샅히 뒤졌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맛있게 그것을

먹었다.

만약 이 영국 신사가 열흘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위의 '더할나위 없이 합리적인 생각' 을 도 닦듯이 자기암시하고 자기주입했더라면

벌레를 그렇게 많이, 그리고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을까? 아마 정신분열증과 폐소공포증에 걸려, 벌레가 아닌 자기 손가락부터 먼저 

뜯어먹게 되었을 것이다.

 

 징그럽고 더러운 것에 대한 본성적인 거부감은 DNA 염기서열에 각인되어 있어 마치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을 통해서는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이성을 통해서는 거스를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위의 영국 신사의 일화는 배고픔과 생존욕구라는 중대한 본성이 부차적인 본성ㅡ징그러운 것에 대한 혐오본능을 짓눌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보다 더 큰 하나의 본성을 동원하는 것임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더 중대한 본성은, 인간으로부터 더 혹독한 고통과 시련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본성을 "합리적으로" 억누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벌레를 먹으려면 굶어야 한다. 그러나 벌레를 서슴없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배고픔은 분명

벌레에 대한 혐오감 감수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다. 그러므로 불가피한 상황도 아니면서 아무 이유없이 벌레를 먹는 것은 명백한

손실이 된다. 

 하지만 만약 벌레 먹기에 1억의 보상금이 달려있다면? 벌레를 먹기 위한 배고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고로 굶는 것이 이득이다.

ㅡ이처럼 일반적으로 사회현상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즉 그 이윤관계를 명백히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때때로는 더 큰 본능을

동원하여 스스로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이득이 되는 순간이 많다. 그래서 사회의 인간들은, 안에서 어떤 종류의 보배가 나올지도 모르는 벌레를

씹어먹기 위해 갖은 자학 쇼를 벌이는 것이다. 

 

 사회생활이란 벌레를 먹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고, 본성에게 가죽채찍을 쥐어준 뒤 자기를 사정없이 때리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