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까는 글 올리면 십중팔구 날아드는 반론이 도교랑 성리학임.

이 둘이 그나마 형이상학적으로 보이거든. 특히 노자의 도덕경을 들이대면서 이렇게 심오한 사상을 니 따위가 어떻게 이해하겠냐...

뭐 이런 식으로 주장을 전개시키지.


그래서 예전에 도덕경을 함 봤었는데, 우선 들어가기 전에 점쟁이 얘기부터 해야겠음.

뜬금없이 뭔 점쟁이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함 들어보기 바람.


예전에 점쟁이 사이에서 영업노하우가 공유됐음. 그리고 그 노하우 중 하나가 아래와 같은 것이었음.


"서로 상반되는 특징을 동시에 말해라"

"터프해 보이는 사람이 들어오면 "넌 거칠어 보이지만 실은 아주 따뜻하고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라고 말하고

가녀리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 들어오면 "넌 마음씨 여려 보이지만 실은 아주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라는 식으로 말해라"


라는 것이었지. 이는 서로 모순되는 것을 동시에 말해서 절대로 틀릴 수가 없도록 만드는 것인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모순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매우 용한 점쟁이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었음.


세상에 따뜻하고 여린 마음을 1%도 안 가진 사람은 없고

아주 강한 의지를 1%도 안 가진 사람은 없으니깐 말이지.


이걸 바넘효과라고 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1+1은 2이기도 하지만 또한 2가 아니기도 하다는 식의 말장난을 의미함.

그러니 절대 틀릴 수가 없는 것임. 모순을 이용한 말장난이지.


그런데 도덕경을 읽어보면 이런 말장난이 보임.


"도를 도라 말하면, 이미 그 도가 아니다.
이름 부를 수 있으나, 언제나 그 이름은 아니다.".


노자에 의하면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라고 하고 있음.

그런데 정작 도덕경이라는 책을 써서 도를 말하고 있지.


이는 "도는 말할 수 없지만 또한 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앞에서 말한 "1+1은 2이지만 또한 2가 아니기도 하다" "넌 거칠어 보이지만 실은 아주 따뜻하고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

와 같은 구조지.


도덕경을 계속 읽어보자.


"그렇기에 언제나 없음으로 그 근원을 보고,
언제나 있음으로 그 드러남을 보라.
없음과 있음은 하나에서 나온 두가지 이름이라, 이를 현묘하다 한다.
현묘하고 현묘하니, 모든 오묘함의 문이 된다."


이 말은 결국 "도는 없지만  있기도 하다"란 뜻이다. 앞서 말한 바넘효과 말장난을 계속 쓰고 있지.

도덕경을 계속 읽어보자.


"천하가 모두 알듯 미를 위한 미는,
추악하다.
천하가 모두 알듯 선을 위한 선은.
선하지 못하다."


여기서 美는 아름다움이다. 즉 위 문장은

"아름다움은 추악하고 착함은 착하지 않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은 아름답지만 또한 추악하고, 착함은 착하지만 또한 착하지 않다"는 뜻이지.

이는 앞서 말한 바넘효과의 반복이다.

도덕경을 계속 읽어보자.


"그리하여 있고 없음은 서로 살리고,
어렵고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드러내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대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위 말은 결국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앞서 말한 바넘효과를 살짝 비튼 문장이지.

도덕경을 계속 읽어보자.


"그러므로
성인은 아무것도 하지않으며 그 안에 머물고,
말없이 가르친다."

"머무르지 않으니,
떠나지도 않는다."


이제 내가 더 설명할 것도 없을 것임. 성인이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동시에 가르치고

안 머무르면서 동시에 안 떠난다고 함. 전부 모순을 이용한 말장난임.


도덕경 추종자들이 심오하다고 칭찬하는 부분은 알고 보면 바넘효과를 이용한 말장난이란 얘기지.


도덕경 전문을 보면 전부 이런 식의 구조로 전개되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https://ko.wikisource.org/wiki/도덕경)


여기서 바넘효과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보면 도덕경은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아니라

유교 법가 같은 형이하학적인 처세술, 정치기술에 가까운 책이란 걸 알 수 있음.


"언제나 백성들을 순진하게 두고 욕심을 버리게 하여,
꾀있는 자들이 감히 행하지 못하게 하라."


"낮은 곳에 머물고,
마음은 고요하며,
사귐에 어질고,
말이 듬직하고,
올곧아 잘 다스리고,
일을 잘 처리하고,
때맞춰 움직인다."


"가장 좋은 지도자는 있는지도 모르겠는 자이며,
그 다음은 부모같고 기림받는 자이고,
그 다음은 두려운 자이며,
그 다음은 업신여겨지는 자이다."


그래서 역사학자, 동양철학자들은 도덕경 역시 유가 법가와 마찬가지로 통치술, 처세술로 이해하는데

정작 포스트모더니즘 물을 먹은 학자들은 도교를 형이상학적인 철학으로 오해하고 있음.

조지프 니덤 같은 과학사학자들도 이 도교의 '도'를 그리스철학의 '진리'추구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고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으로 착각했고 말이지.


그런데 보다시피 도교는 논리학과는 거리가 멀지. 모순을 옹호하고 이걸 이용하고 있지.

그리스 철학은 모순에 적대적이라서 아주 논리적이고 따라서 도교와 그리스 철학은 절대 비슷한 류의 형이상학이 될 수가 없는 거고.


이렇게 얘길하면 다른 한쪽은 아래와 같이 반론해 들어온다.


"도덕경의 내용은 언어의 유한성을 말하는 것이지 문장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다"

"'도'라는 절대 진리는 말로 표현될 수 없음을 근사치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이지.


그런데 이런 언어의 유한성 즉 논리의 유한성을 주장한 철학자는 서양에도 있었다.

고르기아스 같은 사람이지. 고르기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는 것은 설명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쓰는 언어와 문자는 실제를 정확히 반영 못하기 때문에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는 허무주의 사상이다.

도덕경의 내용과 비슷하지.


그런데 고르기아스에 대해서 플라톤은 단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그런데 니가 쓰고 있는 건 말(言)이 아니고 뭐냐?"


플라톤은 절대주의 진리관을 주장한 사람이고,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이 절대주의 진리관에 입각해서 발전해왔다.

그 과정에서 언어 논리를 매우 중시했고 따라서 논리학이 발전했다.


반면 동아시아지역은 도덕경류의 상대주의 진리관이 힘을 떨쳤던 지역이다. 그래서 논리학이 발전하지 못했고

논리적인 외래 철학조차 비논리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중국화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대표적인 예가 인도철학인 불교인데, 원래 불교는 아주 논리적인 철학이다.

하지만 이런 불교가 중국화되었으니 바로 선종이다.

선종은 도교의 상대주의적 진리관, 언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 논리에 적대적인 태도를 받아들여서

원래의 불교와는 다른 변태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


이처럼 서양이 절대주의적 진리관, 언어논리 중시의 철학을 발전시킨데 비해

한쪽은 상대주의적 진리관, 언어논리 적대의 철학을 발전시켜왔다.


이처럼 정반대의 선택을 하게 된 두 문명권은 수천년간 상호 접촉 없이 독자적으로 생활했고,

이후 만나게 되었을 때는 한쪽이 완전히 짓밟히는 결과를 맺게 된다.


동아시아 지역은 서구문명에 완전히 정복 당하게 되지.

늦은 밤에 비몽사몽으로 글을 쓰느라 글이 개판이지 싶다. 나중에 수정해서 다시 올리든가 해야겠다.


다들 잘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