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불교의 입장에서는 불교가 일부 낙오자나 불쌍한 소수자들만을 위한 힐링 개똥철학으로 전락해서는 안됨. 부처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에게, 중생에게, 보편적, 논리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함.


불교가 그런 보편적 논리적 호소력을 가지려면 고의 문제가 (1) 해결해야만 할만큼 심각하면서도 (2) 누구에게나 적용될만큼 보편적, 일반적이어야 함.


그런데 (1) 과 (2)가 양립하며 조화되기가 힘듦.


이 세상에는 진짜 무시무시한 학대, 고문, 불치병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있지만,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과 안락과 성취와 보람을 느끼며 살다 심지어 죽음조차 그럭저럭 평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음.


전자에게는 (1)이 당연하게 다가오고 불교의 필요성도 설득하기 쉬움. 하지만 후자에게는?


물론 후자에게도 나름의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것임. 하지만 그것이 그의 행복과 성취에 비해 미미한 수준으로 느껴진다면?


이런 후자의 사람에게도 고를 문제로 만들려면 (2)의 접근이 필요함. "니가 통속적, 피상적 의미의 고통, 슬픔 등은 아주 크게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깊이 봐라. 너의 사랑이 성공할 때조차 그속에는 이별의 가능성이 있다. 네가 누리는 풍요조차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어쩌고저쩌고... 이것이 진짜 고의 문제이고 그렇기에 너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식으로 씨부리는 거지.


이런 식으로 고의 문제를 아주 근원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그것의 보편성을 담지할 수 있음. 사성제가 일부 불행하고 운없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인간조건 자체를 궤뚫는 것이 될 수 있음.


그런데 (2)를 통해 이렇게 만드는 순간 (1)이 무너짐.


후자의 사람으로서는 (2)는 인정하되, 그런 의미에서의 고의 문제가 중요하다고는 인정하지 않고, (1)은 거부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임.


"니 분석도 어떤 면에선 맞다. 나한테도 그런 의미에서는 인생은 곧 고다. 그렇지만 그렇게 아주 얕게만 깔려있는, 니가 그렇게 길게 논하지 않으면 나 혼자서는 인지하지도 못할, 미미한 철학적 조건이 그다지 중요하다고는 생각 안 한다. 그냥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지금까지처럼 살면 되지 않느냐? 지금까지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앞으로도 매우 높은 확률로 만족스러울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할 수 있음.


그래놓고 실제로도 잘 살다가 잘 죽어버리면, 그 사람한테는 실제로도 부처가 무의미했던 게 돼버리는 거임. 고의 문제가 실제로 그 사람한테는 걍 주변적이고 하찮은 것이었던 것임.


이러면 전자의 사람은 본원적 인간조건이 아니라, 그저 어떤 불운이나 잘못 따위로 인해 고의 문제를 가졌고 불교가 필요했던 게 돼버림. 그가 후자의 사람만큼 운이 좋고 성취를 했다면 그도 고의 문제 따위는 신경 안 쓰고 살 수 있었던 셈임.


이렇게 되면 이미 불교가 스스로 가졌다고 주장하는 의미를 유지할 수가 없음. 모든 중생이 아니라 그냥 모든 루저, 낙오자, 패배자, 불운아들을 위한 가르침이 됨.


그리고 이걸 제대로 인식하면 전자의 사람조차도 부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음. 자기가 순전히 인간이라서, 중생이라서가 아니라 그 중에서도 운이 없었거나 실수를 해서 이 꼴이 됐다는 걸 아니까.


이 문제를 풀려면 유일한 방법이 윤회임. 행복하고 보람찬 인생을 살다 잘 죽으면 그걸로 끝인 게 아니라,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무한히 삶들이 있다면 후자의 사람에게도 얘기가 달라질 수 있음.


그런데 윤회는 애초에 믿을 이유가 없음.


따라서 불교는 사성제에서부터 보편적 논리적 호소력을 갖는데 실패하고, 일부 루저들을 위한 것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결론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