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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변화하기를 원하지만, 끝내 다시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변화는 늘 일시적으로 행해지는 일탈 행위에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인식되며, 변화의 시도를 무수히 반복하기를 수차례 끝내 스스로는 변화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무기력함과 절망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변화의 시작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대립쌍이 일으키는 분리 감으로 얼룩져 있는 대상적 세계는 스스로가 변화하려는 노력과 추구를 그만둘 때, 진정한 내적 변용을 일으키는 언뜻 보기에 모순된 법칙을 가지고 있다.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찬 마음으로부터 구원과 해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자발적 체념과 포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무언가가 실질적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스스로 체감하기 위해서는 변화된 상태가 이전의 상태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자아내야 한다. 어색함과 미지의 것으로부터 오는 미묘한 감정이 공존하는 알 수 없는 상태에 위치해야 변화를 실감하는 주체는 이전의 나라는 존재가 이질적인 느낌으로 인식된다. 대개 과거 철없던 시절의 나를 떠올려 보면서 얼굴을 붉히는 이유는 현재의 나와 비교해보았을 때, 과거에 내가 한 행동과 사고들이 얼마나 무지한 것임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그로부터 나온 자부심과 허영이 작금의 겸허함과 대조되어 얼굴을 붉히게 만든다. 변화란 기존의 상태가 변화된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정의될 수 있으며, 대개 이 과정 속에서 기존의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심리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저항은 안정된 상태로의 회귀, 불안정한 상태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다. 안전을 확인받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은 급변하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육체의 안위와 생존을 보장받고자 하기 위함이다. 다만 육체의 안위와 생존을 보장된 이후에도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지는 모순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끝없이 육체의 생존과 안위만을 걱정하며, 한시도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는 마음은 여러갈래로 분열되어 있다. 전체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끝없이 도피하려는 무의식적 충동 속에서 도무지 갈피를 못잡는 마음은 스스로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경쟁과 반목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몸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존재는 부분과 전체가 실상 하나의 근원을 공유하다는 진실로부터 멀어지고 점점 그릇된 인식을 참되다고 받아들인다. 생존의 근원이 사적인 자기에 해당하는 육체에 한정된다는 착각은 생명의 참된 주인에 대한 무지로 이어져 대립쌍과의 경쟁을 부추긴다. 그 어떠한 분리도 없는 곳에서 분리를 상상하는 사적인 자기가 의식 안에 점점 자리를 넓혀갈수록 마음의 분열은 심화되고 분리 감은 끝내 해소되지 못한다. 해소되지 못한 분리 감은 충동적인 행위와 사고를 불러오고 적절히 발산되지 못하는 충동은 생명을 저해하는 부정적 감정으로 이어진다.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창조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충동이 그릇된 인식과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서 무의식 속에 억압을 축적하는 계기가 된다. 스스로가 몸이라는 개념을 붙들이고 있는 한, 결코 분리 감은 해소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전 인류는 실상에서 구분없이 모두 하나라는 진실 때문이다. 인식 속에 모두가 분리없이 하나라는 이해와 앎이 찾아오지 않으면, 마음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은 결코 오지 않는다. 육체를 자기 자신으로 붙들고 있기 때문에 육체와 결부된 동물적 본성만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의식의 수면 위에 떠오르는 마음의 부산물들이 모두 형상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인간의 존재는 스스로가 무지에 사로잡혀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무의식적 억압을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일수록 물질에 강렬한 집착을 보이며, 스스로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고수한다.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생각들이 형상과 관련된 것일 때, 실상은 잊혀지고 무의식적 억압은 해소되지 못하게 되어 더욱 존재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어떠한 결정적인 사건이나 스승의 가르침으로 인해 인식의 획기적인 전환이 오지 않는 이상, 몸과 스스로를 전적으로 동일시한 존재의 전 생애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는 깜깜한 어둠에 휩싸여있다. 형상, 즉 육체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거듭 필멸의 운명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삶 속으로 거듭 존재를 다시금 불러들인다. 형상의 사로잡힘이 사적인 자기로부터 비롯된 업보를 청산하지 못하게 만들어 시공간의 감옥 속에 존재를 가두는 빌미를 제공하게 한다. 


 사적인 자기는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지식과 생각들이 분리의 틈새를 메워줄 수 있는 영적인 작업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삶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장애물이 되는 것이 바로 스스로가 개인적으로 지니고 있는 신념이 옳다는 믿음이다. 사적인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지만, 생각과 신념, 지식 등이 낳은 위치성이 사적인 자기의 실체를 전면에 내세운다. 사적인 자기를 실체로 붙들고 있는 존재는 분리의 틈새가 환영이라는 것을 밝혀줄 신성한 빛이 들어올 수 없도록 사적인 자기가 가로막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적인 자기는 대상적 세계가 나와 따로 분리되어 있다는 믿음, 나라는 기억이 낳는 체험에 대한 집착,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는 환상에 대한 그릇된 신념으로 유지된다. 몸과의 동일시를 내려놓아도 몸은 제 스스로 할 일을 모두 해낸다. 아니 오히려 몸과의 동일시를 붙들고 있을 때보다 더욱 일체를 수월하게 해낸다. 단지 인간의 존재가 해야할 것은 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동일시를 해체하는 것뿐이다. 스스로를 몸과 동일시하는 습이 강할수록 몸과의 동일시를 떼어놓기는 더욱 힘이 들 수 밖에 없다. 스스로가 몸으로부터 얻는 이익과 자부심이 많을수록 몸은 '내 것'으로 인식되어 실상을 가리는 장막이 된다. 세상 어디에도 '내 것'은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지만, 스스로를 몸과 동일시한 존재에게는 몸이라는 소유물이 본래의 자기 자신을 찾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세상에서 스스로가 소유하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토록 소유하는 대상에 강렬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육체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세월과 함께 서서히 노쇠하는 육체를 자기 자신으로 붙들고서 늙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존재에게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쾌락은 고스란히 슬픔과 고통을 낳는다. 생명과 존재의 근원을 잘못두었던 대가를 되돌려받는 것이다. 몸과의 동일시로부터 생각과 견해, 지식 등이 모두 '내 것'이라는 착각이 생겨난다. 존재를 지속시키려는 욕망조차도 신에게 되돌려야함이 마땅한데, 왜냐하면 스스로가 세상 안에 존재하는 것조차도 사적인 자기가 의도한 것에 따른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 내 것은 없으며, 일체는 하나이자 전부인 신의 것일뿐이다.        


  참된 변화는 내적 변용을 일컫는데, 이는 기존의 동일시가 해체되고 더욱 포괄적이고 진실된 자기로 거듭나는 초월의 여정이다. 사적인 자기가 전해주는 에로스의 끌림과 매혹을 내려놓고 전체를 위한 숭고한 희생에 가담하고자 하는 타나토스의 자비와 연민에 기꺼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내적 태도는 삶 속으로 신성을 초대한다. 치유의 힘을 담고 있는 신성은 분리의 틈새로부터 새어나오는 고통을 종식시키고, 참나의 기쁨과 행복이 솟아나는 창조의 근원을 발견토록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찾아 헤매이던 행복의 근원이 카르마의 소멸과 함께 내면에 거주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어떠한 분리도 없이 만물이 내 안에 있다는 실상에 대한 이해는 인간으로 지녀야할 온전함을 함양하게 한다. 독립적이고 온전한 인격체는 스스로가 만물과 하나라는 자명한 진실에 대한 앎 없이는 자라날 수 없으며, 스스로가 지닌 생명의 전부를 신에게 내맡김으로서 완성된다. 생명의 실질적 주인이 본래의 자리를 다시금 되찾을 때, 생은 본연의 쓰임새인 신성을 드러내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스스로가 보편적 의식 자체임을 깨닫고서 온전함을 되찾은 존재는 그 어떠한 변화없이 있는 그대로에 머무를뿐이다. 그 어떠한 변화도 의식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진정으로 유의미한 내적 변용이 일어난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모든 대상과 사건, 현상들이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이해하면서 만물과 하나됨의 상태에 고요히 머무른다.   


 변화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꿰기 위해서는 사적인 자기를 주위로 둘러싼 모든 내외적 환경들이 자기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수용해야한다. 대립쌍을 자기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수용하려는 자발적 태도가 무의식적 억압을 해소하고 카르마를 해체시킨다. 우주 안에 있는 사소한 그 무엇도 남김없이 자기 자신의 표현임이 명백해질 때, 존재는 스스로의 내면에 불멸하는 신성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개별적 환경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전 인류가 처한 조건은 동일하다. 내용이 아닌 맥락에 대한 참된 이해가 전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접점에 대한 . 공감과 직관적 앎을 불러들인다. 이는 실상에서 전 인류가 분리없는 하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양한 인간 형상과 수만가지의 동식물들을 자연발생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의 근원은 동일하다. 분리된 타자 안에서 작용하는 힘의 본질이 나와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갈등과 대립의 무의미함이 드러나 저절로 사그라든다. 우주는 언제나 평화롭다. 잘못된 몸과의 동일시로 인해 나타난 무의식적 억압이 마음의 동요를 만들어내고 그로부터 문제가 없는 우주 안에서 문제가 출현한다. 우주 안에서 일어난 문제에 가장 올바르고 쉬운 해결책을 지니고 있는 존재는 신이다. 고로 일체를 신에게 내맡기는 것이 인간의 존재가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 망각의 심연 속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존재의 출현은 현존의 장엄함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세계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