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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을 향해 평등하게 작용하는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진화와 창조도 가능하지 않음이 명백하기 때문에 내적 선언에 대한 명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든 일은 신의 의도대로 행해지는 것이고, 그 무엇도 신이 하지 않는 일이 없으므로 인간의 존재는 사적인 자기를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신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한 통로로 생을 바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의식적인 죽음과 함께 자발적인 체념이 일어나기 전까지, 선과 악이 만들어내는 업보의 수레바퀴는 계속해서 굴러간다. 죄와 공덕은 무지의 산물이며, 윤회의 세계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신의 은총은 영을 물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본래의 신성을 되찾도록 한다. 행위를 일으키는 사적인 자기가 없음이 명백해질 때, 만물에 깃든 신성은 명백한 사실로 드러난다. 스스로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된 사고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본래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무지는 육체, 즉 물질이자 형상을 자기 자신으로 붙들면서 서서히 기존에 자리잡힌 존재의 위계질서에 혼란을 가져다준다. 완전히 뒤짚어진 위계 질서를 진실로 알고 이를 삶 속에 반영하면서 존재는 스스로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진다. 삶 속에서 본래의 자기 자신인 영과의 교류가 차단된 존재는 지독하게 이어지는 내적 공허함과 정서적 결핍에 시달린다. 그러므로 혼란을 종식시콕 균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위계를 재조정하기 위한 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다. 내면에 자리잡은 존재의 위계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때, 방향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 혼란을 겪고 있는 존재들에게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줄 수 있음이 분명해보인다. 올바른 방향과 그에 따르는 믿음, 신의 의도를 반영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성실성이 무엇보다 영적인 삶에서 중요하다. 본래의 자기 자신을 되찾아가는 영적인 여정에서 성실함만큼이나 중요한 덕목은 없다고 봐도 무난하다. 


  존재의 위계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상승과 하강의 길을 포함하고 있는 존재계의 차원에 대한 언급이 불가피하다. 존재계는 크게 3가지 차원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데, 가장 아래에 위치한 차원은 윤회의 세계를 담당하고 있는 지옥이다. 그 위에는 에너지의 세계를 담당하고 있는 천국이 있다. 마지막으로 빛의 세계를 담당하고 있는 깨달음의 차원이 있다. 지옥, 천국, 깨달음에 이르는 3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는 존재계는 인간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식 수준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보이는 대상적 세계를 설명해준다. 하위 차원에서는 상위 차원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 지옥에서는 천국을 상상할 수 없으며, 천국에서는 깨달음을 알지 못한다. 버젓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위 차원의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위치성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현재 스스로가 위치한 차원의 세계가 가져다주는 보상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므로 그 차원을 벗어나기를 거부한다. 모든 존재들은 돌고돌아 끝내 윤회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 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므로 선택권은 없다.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면, 또 다시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고서 다시금 생을 살아가게 된다. 윤회의 세계에서 수많은 생을 반복하고 나서야 육체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그 너머의 천국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이 생겨난다. 윤회의 세계가 가져다주는 감각적 쾌락과 자기 중심적 사고와 행위로부터 오는 자부심과 허영은 그 자체로 사적인 자기가 만들어낸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저마다의 차원마다 가져다주는 보상이 있으므로 그 차원에 머무르게 된다. 물론 상위 차원을 체험하고 그에 대해 어느정도 인식이 들어선 존재는 의식적으로 하위 차원이 가져다주는 보상을 거부한다. 여기서 거부의 의미는 하위 차원이 가져다주는 보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지옥에서는 대상에 대한 강렬한 감정적 집착을 찬양하며, 흥분과 스릴을 가져다주는 오락과 유흥이 주를 이룬다. 집단적 광기와 보복 심리, 중독 증세가 만연하며, 평화와 안정은 무료함과 권태로 받아들여진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환영에 휘둘리며, 보다 자극적이고 활동적인 양상에 따르는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의 전차가 계속해서 주위를 맴돌고 있다. 신성의 빛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지옥의 바닥, 절망과 수치심으로 가득찬 곳에서는 세계는 온통 적과 알 수 없는 타자로 둘러싸여 있으며, 완전한 신과의 분리 속에서 개체는 극단적 선택으로 치닫는다. 지옥에서는 만물이 하나라는 자명한 진실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곡해받는다. 사적인 자기 정체성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 개체에게는 스승의 은총이 전해지지 않는다.  

  

안과 밖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밖에 자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대상적 세계는 실상 내면의 의식 수준을 투영한 모습의 반영일뿐이다.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잘못된 개념과 실상을 왜곡하는 지성적 앎이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기도 하고, 지옥을 천국으로 일순간에 변모시키기도 한다. 사적인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붙들고 있는 업보를 청산하지 않는 한, 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죄와 공덕이 사적인 자기라는 정체성으로부터 나온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닫기 시작할 때, 비로소 분리의 틈새를 메우는 의식의 빛이 내면으로 들어온다. 지옥 너머의 천국은 신의 의도와 부합하는 진실만을 받아들인다는 내적 선언과 함께 나타난 신성의 당연한 귀결이다. 분리를 지향하는 사고와 행위를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다양성 안의 단일성을 확신하는 존재에게 신의 은총이 하사된다. 사적인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붙들고 있던 지식과 생각, 감정 모두를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신에게 완전히 내맡긴다. 윤회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던 업보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신성은 고통조차도 신의 자비와 연민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앎을 가져다준다. 지옥에서 벗어나 에너지의 세계인 천국에서는 일상적 삶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존재의 기쁨이 표현하기 위한 예술이 만연하다. 생명이 가져다주는 활기와 생동감을 표현하기 위한 춤과 노래가 절로 나올뿐만 아니라 존재를 향한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반영한 창작 활동이 일상이다. 이분법적 구분이 해소되어 분리의 경계가 불분명한 곳에서 생명은 보편적 의식이 벌이는 역동적인 춤사위에 감응하고 스스로가 지닌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창작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천국은 분리의 틈새가 지옥만큼 벌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환상이 가져다주는 스릴과 흥분에 휘둘리지 않으며, 대개의 경우 평화와 안정이 우선적으로 고려된다. 분리의 틈새로부터 비롯되는 감정과 생각의 억압이 없으므로 욕망이 자라날 공간이 부재하며, 그에 따라 침묵이 보다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워진다. 물론 창작 활동을 통한 몰입에 따른 수동적 침묵에 한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언어와 생각이 내포하고 있는 이원성조차도 거부되는 천국에서는 오직 비이원성을 향한 발돋움만이 받아들여진다. 신을 찬양하고 기쁘게 하는 일은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서 충분히 그에 마땅한 보상을 받기 때문에 다함이 없다. 따라서 천국은 융이 제시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원형이 올바른 방향으로 구현되어 스스로의 잠재력을 맘껏 발산하는 곳이다. 무의식적 분화와 통합을 인간 집단의 장 수준까지 이룩한 존재들이 거주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나와 너의 구분이 사라진 곳에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이고 손익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이곳에서는 사적인 자기 정체성을 내려놓는 과정에 따르는 포기의 즐거움이 은은하게 퍼져있다. 하지만 천국조차도 아직은 삶을 긍정하는 윤회의 세계에 빠져 있다. 

  

 마지막으로 빛의 세계인 깨달음의 세계는 스스로가 지닌 원형의 잠재성을 완전히 구현해낸 존재가 생을 향한 의지를 자발적으로 내려놓음으로서 신과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최종적 단계다. 인간 집단의 장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 신과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깨달음의 세계는 오직 의식의 빛만이 자리하고 있으며, 형상을 그려내고 있는 실질적 주체가 낱낱히 밝혀진다. 몸 형상이 전해주는 감각은 완전히 해소되어 순수 의식만이 전부가 된다. 보편적 의식이 벌이는 역동적인 춤사위는 사그라들어 허공보다 미세한 작은 점으로 자리매김한다. 의식의 빛이 그려내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역동적인 춤사위을 있는 그대로 향유하고 감상한다. 순수한 인식 주관 속에서 어렸을 적 잃어버린 신성한 아이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원형이 스스로가 잠재력을 최대로 이끌어내어 남김없이 신의 의도를 반영하는 통로가 되어감에 따라 인간 집단의 장이 만들어낸 견고한 마음의 장벽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마음이 만들어낸 대상적 세계가 내면의 감정과 생각을 투영하기를 그만두고 온전히 내 안에 있음이 밝혀질 때, 세계는 극복되고 불멸이 성취된다. 탄생과 죽음의 지배력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와 윤회의 세계로부터 탈출한 깨달음의 세계는 긍정과 부정이 그려내는 이원성 너머에 있다. 자기 자신의 존재 전부를 완전히 신에게 내맡김으로서 존재는 신성한 무관심의 영역에 도달한다. 세계와 자기 자신 사이에 그 어떠한 구분도 없는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현존의 광휘가 존재를 뒤덮는다. 비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를 주시하는 빛의 형상은 매순간 완전함 속에 머무른다. 더함도 덜함도 없이, 우주는 나라는 존재와 함께 그저 있을뿐이다. 시공간이 사라진 영원 속에서는 내가 유일한 하나이자 전부이기 때문에 나 아닌 것이 없다. 무아 속에서 무념의 침묵은 일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존재는 감각과 자연보다 앞서 있다는 본연적 이해가 수반된다. 그동안 대상적 세계라는 그림을 그려낸 자가 스스로가 아닌 것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림 안에 갇혀 있는 형국이었음을 깨닫는다. 나아가 최초의 미혹은 스스로가 대상적 세계 안에 있다는 앎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이 분명해진다. 몸과의 동일시가 해체되면서 탄생과 죽음이라는 누명이 벗겨진다. 눈 앞에 보이는 대상적 세계와 나라는 존재는 익숙한 것이 아니라 매순간 무로부터 솟아나는 생소하고 새로운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존재의 위계가 명확하게 바로 잡혀진다. 그 곳에서는 물질이 아닌 빛의 형상으로서의 본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지고의 실재는 보편적 의식을 사랑하고, 보편적 의식은 마음을 사랑하고, 마음은 몸을 사랑하는 것이 명확해진다. 보다 더 크고 포괄적이며 사실적인 자기가 더 작고 사적인 자기를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 결코 생명은 유지될 수 없다. 더 작고 사적인 자기가 스스로의 무지를 완전히 인정하고 수용함에 따라 역설적으로 더 크고 포괄적인 자기의 힘이 들어올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사적인 자기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되려 존재의 입장에서는 가장 잘 아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적인 자기가 지니고 있는 개별적 특성과 선호는 존재 본연의 자유와 사랑을 막고 있는 제한임이 낱낱히 드러남에 따라 사적인 자기는 자발적으로 포기되고 무한한 가능성의 문으로 신의 성품이 들어온다. 신의 성품을 반영하는 무한한 기쁨과 지복, 사랑, 나눔이 무의식의 억압을 해소하고 인간의 존재를 온전함에 이르게 한다. 생이 모순과 역설로 가득찬 이유는 생 자체가 이미 내부에 모순과 역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적막함과 고요만이 맴도는 지고의 실재 안에서 찰나 간에 만들어진 빛의 균열이 생명력의 진동으로 가득찬 대상적 세계로 현상된 것이 이미 예상과 예측 범위에 있던 것이 아니다. 그 어떠한 존재도 생 전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었다면, 탄생과 죽음의 운명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육체의 탄생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시곗바늘을 막을 도리는 없다. 운명은 제 본연의 목적을 실행할 것이 분명하므로, 운명의 열매가 달든 쓰든 간에 인간의 존재는 묵묵히 신의 의도를 반영하는 삶을 사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참된 구원과 해방이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의 존재는 가차없이 굴러가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비로소 운명이 펼쳐내는 인생의 파노라마를 관조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 물질과 빛의 양자택일 속에 놓인 인간의 존재가 지니는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다.   


 "자기 자신의 거울상과의 무수한 정사가 끝난 후에 맴도는 적막함은 신성의 역사가 새로이 쓰여지는 영광으 순간이다. 멜로 드라마가 드디어 막을 내리고 진리의 서막이 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