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fafd12feb9f3fa538bcd0b71783713c09c093b9e075d3b592d65d7f4b58fe19e9fc57b8ea79



   '시크릿'이라는 책에서 나온 끌어당김의 법칙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때가 있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한 적절치 못한 해석이 스스로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져 되려 사적인 자기의 환상을 지속시키고 강화시키는 데에 일조하는 사태가 벌어짐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대상적 세계 즉, 세간을 향해 외부로 향해있는 마음은 언제나 더 많은 것들을 얻고 소유하는 사고와 행위들이 더 나은 삶과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한 해석을 더 많은 물질을 축적하고 소유하는 목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본래 자기 자신인 것만이 될 수 있는 우주 안에서 대상적 세계 안에 갇혀버린 마음은 진실과 거짓, 스스로에게 더 나은 선택을 스스로의 힘으로 분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마음의 제한을 고려할 때,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한 올바른 쓰임은 본래 자기 자신의 성품과 부합하는 것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가져오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자기 자신이 아닌 것, 본래의 성품과 반대되는 것들을 끌어당기려는 의도를 갖기 때문에 매번 끌어당김의 법칙은 좌절과 한계를 맞볼 수 밖에 없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는 목적이 향하는 방향을 결정한다. 목적이 대상적 세계를 향해 있고 그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할 때, 인간의 존재는 그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손해이며, 삶 속에서 나타나는 최고의 무지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행복은 실상 존재 본연의 성품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이며, 스스로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충만함을 영위하고 있는 순수한 지의 상태는 지 너머에 있는 잊어버림 즉, 실재의 망각이다. 


   마음의 입장에서 해석할 때, 우주의 법칙 중 가장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이다. 대개 세간에서는 남녀관계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다는 역설로 널리 퍼져있다. 여기서 사적인 자기에 해당하는 에고가 어떠한 대상에 대한 애착의 정도가 강할수록 그 대상은 더욱 사적인 자기로부터 멀어져가는 역설적인 상황을 종종 마주한다. 더불어 삶에 대한 집착의 정도가 강할수록 삶은 더 많은 것들을 나로부터 더 많은 것들을 빼앗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삶에 대한 집착의 정도가 약할수록 삶은 필요도 없는 것을 더 많이 제공해준다. 이는 무언가를 얻기를 바라는 욕망 자체가 지각의 환상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마음이 어떠한 대상을 얻고 소유함으로서 그 대상에 대한 통제와 제어를 행하기를 바랄 때, 이는 그 대상과 나 사이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분리가 있는 곳에서 자라나는 소유의 욕망은 대상과 나 사이의 다름과 차이를 강조해야 하며, 이로부터 외적으로 나타나는 대상과 사적인 자기가 분리되어 있다는 지각의 환상에 강하게 사로잡힌다. 지각의 환상이 제거된 정도에 따라서 사적인 자기가 일으키는 욕망에 휘둘릴 가능성이 더욱 적어진다. 사적인 자기를 지탱해주던 믿음 자체가 본래 실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에고를 붙들고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짙을수록 욕망은 강해지고 원하는 대상을 소유하고자는 바램은 커진다. 


 대상과 나의 분리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바램과 기대는 그에 따르는 실망과 좌절을 낳게 되어 있다. 분리 속에서는 그 어떠한 존재도 지속가능한 행복을 얻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믿음의 토대가 거짓과 환상을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관계의 지속은 늘 어딘가 모르게 불충분한 느낌을 자아내고 상대로부터 요구사항은 더욱 까다로워진다. 관계 초기에는 보이지 않던 상대의 단점들이 하나둘씩 발견되는 것은 마음은 언제나 편협하고 사적인 자기에 유리하고 이득이 되고자 하는 입장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자기에 해당하는 몸만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은 언제나 선호에 좌우되며, 사적인 자기의 정체성을 더욱 팽창시키는 정보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러한 마음의 습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기는 순진함이 되려 악을 낳는 근원으로 자리잡고, 더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삶 속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더욱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이러한 마음의 경향을 지속적으로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사적인 자기는 지각의 환상이 만들어낸 대상에 대한 집착과 미련으로부터 더욱 많이 얽매이게 된다. 대상과의 분리감은 사적인 자기가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으로 이어지고 삶은 걷잡을 수 없는 모순과 역설을 가져온다. 대개 스스로에 대해 무지한 존재가 범하는 중대한 착오는 그러한 삶의 모순과 역설을 가져온 당사자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일이다. 눈 앞에 보이는 세계는 그대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의 세계다. 사적인 자기에게 이러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한 저항은 강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진실은 언제나 사적인 자기를 죽음으로 이끄는 깨달음의 과정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자기를 붙들고서는 결코 참된 평안과 안정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대상과 나 사이의 분리감이 자아내는 긴장감이 늘상 불안과 두려움을 유발하기 떄문이다. 오직 하나만 있는 곳에서 둘을 상상하는 마음은 눈 앞에 보이는 대상이 나와 분리되어 있으며,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인식한다. 이러한 믿음은 그대로 대상적 세계에 투사되어 대상과 내가 본질적으로 동일함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사적인 자기가 지니고 있는 환상이 격렬할수록 마음은 침묵하지 못한다. 말은 다양성과 분리를 의미하는 반면, 침묵은 단일성과 합일을 나타내기 때문에 지각의 환상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마음은 침묵을 한사코 거부하게 된다. 사적인 자기의 입장에서 침묵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므로 어떻게서든 살아남기 위해서 끝없이 말을 내뱉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적인 자기를 붙들고 있는 마음의 입장에서는 침묵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뜻한다. 하지만 참된 행복의 근원은 사적인 자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할 때 얻어진다. 거짓은 언제나 거짓된 환상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겸허하고 용기있는 마음은 사적인 자기가 지각의 환상이 창조해낸 거짓의 산물임을 받아들이고 자진해서 스스로를 내맡긴다. 내맡김은 언제나 더 크고 포괄적인 자기, 다시말해 삶 속에서 하나이자 전부인 신을 향한 것이다. 사적인 자기만을 바라보던 마음이 비로소 에고에 대한 제어와 통제를 포기하고 신에게 전적으로 내맡기고자 하는 바람직한 의도를 가질 때, 지각의 환상은 제거되고 어디에서나 신만을 보는 단일성에 이르게 된다. 사적인 자기의 자발적 포기가 내면에 잠들어 있는 신성을 일깨우고 지각의 환상을 녹여냄으로서 마음의 해방을 선사한다. 몸과 마음에 갇혀있던 사적인 자기는 비로소 보편적 의식과 합일되어 객관적이고 진실된 시각을 지니게 된다. 진실과 거짓을 분간해낼 수 있는 보편적 의식 안에서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사적인 자기가 소유의 욕망이 매번 좌절을 맛보고 끌어당김의 법칙을 적절히 구현해내지 못한 이유는 실상에서 그 사적인 자기가 허구임을 알려주기 위한 신의 의도였음을 말이다. 에고의 해석에 따르는 기대와 바램이 언제나 신의 의도와 상반되는 것은 신께서는 언제나 최선의 것을 주시려고 하기 때문이다. 에고의 입장에서는 신의 의도가 무척이나 역설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에고가 그토록 자기 자신으로 믿고 있는 사적인 자기가 실상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신 앞에서 늘 겸허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일상 속에서 마음 너머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한다. 결국 방법은 다를지언정, 목적지는 동일하므로 자기 자신에게 적합한 방법을 선택해 일상에서 꾸준히 시행하면 된다. 물론 모든 방법이 동일한 목적지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모두 활용한다면, 더할 나위없이 바람직하다. 이미 이러한 글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 너머에 이르고자 하는 영적 의도가 존재 속으로 스며들어있음을 말해주며, 과정 속에서 제시되는 올바른 가르침은 영적 성장을 이끄는 촉매가 되어준다. 모두가 저마다 지니고 있는 카르마의 매듭을 푸는 과정 속에 있음을 기억할 때, 인간의 존재는 타인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공감에 이를 수 있을뿐만 아니라 전적인 이해에 이를 수 있다. 모두가 저마다의 영적 성장을 삶 속에서 구현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마음 너머에 위치한 보편적 의식의 장이 지니고 있는 맥락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앎과의 긴밀한 유대감을 유지해아 한다. 미묘한 물질인 생각과 감정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방향이 몸과 보편적 의식 중에 무엇인지에 따라서 카르마의 매듭이 풀릴지 말지가 결정된다. 몸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은 죄와공덕이라는 카르마적 매듭을 지속적으로 쌓아올리며, 보편적 의식을 향한 마음은 카르마적 매듭을 풀어가는 깨달음의 여정에 참여한다. 마음이 대상적 세계를 그려내는 과정은 생각이 그에 따르는 시공간을 창조하면, 감정이 시공간 속에 색을 입히는 절차를 밟는다. 대개 마음에 갇혀 있는 존재에게는 이러한 과정이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그 찰나를 인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과 생각의 틈새에 자리한 보편적 의식의 장은 불변의 맥락으로서 무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기적을 행하는 현존의 상태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feat 보편적 의식으로 넘어가는 구체적인 '방편'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서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