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에 이르는 방편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적고자 한다. 실상은 단순하고 명료한 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직관적 이해라는 도구를 활용한다. '그냥 안다'는 표현이 적절한 현존의 상태는 그 어떠한 증거와 증명의 시도들이 무의미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의식 수준에 따라서 대상적 세계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닫는 지점이다. 완전히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현존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존의 상태는 언어 너머에서 '전부임'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오직 '그'만이 하나이자 전부라는 사실이 자명하게 드러날 때, 마음은 침묵에 이르고 무아 속에 전체가 담긴다. 대개 과거로부터 계승되어온 요가 사상과 철학들은 사적인 자기와 '그'와의 분리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시도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 아지 전부인 현존의 상태를 가리킨다.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과시로 얼룩져 있는 사적인 자기는 스스로만이 특별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일체가 '그'에 의해 저절로 행해지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사적인 자기는 '그'로부터 전적인 의존의 상태에 처해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생존의 근원으로 설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러한 사적인 자기의 자부심과 허영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최대한 복잡하고 어려운 용어와 공식 등이 필요하게 된다. 단순하고 명료해서 그 어떠한 부연 설명도 필요 없을 정도로 간단한 실상을 구태의연하게 복잡 난해 한 것으로 치장하는 일은 결핍으로 발생하는 자부심과 허영을 충족시켜주기 위함이다. 온전함과 완전함에 이를 수 없는 사적인 자기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시도에 시달리고 있으며, 대개 그러한 양상은 마음을 얻으려는 자와 마음을 주려는 자의 대립적인 구도로 일어난다. 세간적 삶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끌림을 '매력'이라고 부른다. 사적인 자기가 스스로의 생존 근원으로 쥐고 있는 마음은 대상적 세계를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인다.
우선적으로,
현존에 이르기 위한 방편을 왜 일상 속에서 시도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끝없이 대상적 세계에서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는 심리의 이면에는 현존의 상태에 대한 부정과 거부가 자리 잡고 있다. 잘못된 개념과 그로 인해 굳어버린 마음의 습은 너무나 대상적이 되어버려서 본래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최대의 실수인 이유는 실상 본래의 자기가 세계의 근원이자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현존의 상태에서는 이러한 진실들이 너무나 자명하게 드러나 그 어떠한 설명도 필요하지 않지만, 아직 마음이 만들어낸 환 속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는 결코 끝나지 않는 생존의 문제로 삶 전체를 헛되이 낭비한다. 대상적 세계가 고통과 슬픔의 바다로 얼룩져 있는 이유는 인간의 존재가 환을 환으로 보지 않고,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환은 대상적 세계 안에 있는 일체이다. 대상적 세계 자체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대상적 세계가 바로 마음이다. 현존의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의 존재는 환상의 격차에 따라서 대상적 세계를 왜곡해서 본다. 이러한 왜곡의 정도는 무지에 비례하며, 스스로가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 존재는 끝없이 심신의 고통에 시달린다. 무지는 고통과 슬픔을 낳을 뿐이지만, 올바르게 수정되지 않는 오류는 무지를 이어나가기 위한 마음의 습을 거듭 긍정한다. 단 한 번도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보고 의도적으로 멈추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참되고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는다. 마음이 거짓되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마음에서 일어난 일체를 진실로 받아들인다. 마음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마음은 전적으로 삶의 주인이 되어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실상 마음을 타고 돌아다니는 자가 마음에 얽매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역설적 상황에 처한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등한시한 결과는 항상 무기력함에 시달리는 마음의 노예로서의 삶이다. 온갖 역설과 모순을 품고 있는 마음속에서는 결코 고통과 슬픔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다. 현존은 대상적 세계 안에서 질서와 균형이 올바로 잡혀있는 최고의 수준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음 너머에 도달하는 것은 전반적인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길이자 참된 자기 사랑의 표현이다. 진정으로 자기를 위하며, 자유와 사랑을 중요시하는 존재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일체가 거짓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생동감이 넘치고 생생한 현실은 일말의 환상의 왜곡도 남아있지 않는 현존의 상태 속에서 저절로 드러난다. 환이 가져다주는 고통으로부터 미묘한 쾌락을 이끌어내는 사적인 자기를 거부하고 온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기 위한 방편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는,
마음이 몸을 향한 주의와 관심을 보편적 의식으로 돌리기 위해서 행해져야 하는 일상 속 방편은 우선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내관이라고 부르는데, 내관은 단순하게 내면을 두루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사적인 자기와 연관 짓지 말고 그저 감정 자체로, 생각 자체로 보는 것이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대하는 것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시도들은 실상의 맥락과 통한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나타나는 그 무엇도 실상을 나타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상은 마음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생각과 생각 틈새 사이에 있는 보편적 의식의 장을 발견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보편적 의식의 장에서 나라는 생각이 나타나고 순식간에 나라는 생각은 몸 형상을 자기 자신으로 붙든다. 이 과정이 너무나 찰나 간에 일어나서 대개 우리들은 생각과 생각 사이의 틈새가 있는 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신의 여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시도가 보편적 의식의 장을 발견하는 직관적 앎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개 스승의 가르침 중에서 마음이 만들어낸 생각과 감정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기 위해 제자에게 세간적 삶을 하나의 긴 꿈이라고 여기라는 말씀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귀결이다. 생각과 감정이 진실되고 실재한다고 있는 사적인 자기의 믿음을 완전히 부수기 위해서 스승은 생시가 꿈이라는 가르침을 전달한다. 물론, 최고의 관점에서 생시는 창조주의 꿈이다. 지난밤, 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듯이, 생시가 꿈이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전적인 믿음을 고수하는 제자는 생각과 감정에 대한 집착을 자진해서 내려놓기 시작한다. 주체가 생각과 감정의 가치를 부여한 것은 생각과 감정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여기는 믿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보편적 의식의 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사적인 자기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토대가 무너져야 한다. 일명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행위는 실상의 관점에서 무척이나 능동적이며, 창의적인 행위로 취급받는다. 이는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과 감정의 연쇄 사슬을 끊어내기 위한 힘을 축적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대개 사적인 자기의 정체성에 강하게 사로잡힌 존재일수록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탱하고 있는 토대가 무너져 나아가는 상황은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단순한 행위가 사적인 자기에게는 무척이나 어렵고 버거운 일이 되는 것이다. 올바른 이해를 동반한 자발적 체념과 포기 속에는 사적인 자기의 저항을 부드럽게 제압하는 힘이 있다. 쉼 없이 몰려오는 생각과 감정의 연쇄 속에서 지각의 환상에 단단히 사로잡힌 존재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점점 더 많은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마음을 생존의 근원으로 붙드는 악순환에 빠져드는 것은 사적인 자기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분리가 사라지지 않는 곳에서는 역설과 모순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이는 올바른 가르침을 통해 사적인 자기가 해소되기 전까지 진실로 취급받는다. 분리를 일으키는 생각과 감정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온전히 이해할 때, 생각과 감정을 내맡기고자 하는 의지가 저절로 자라난다. 마음의 입장에서는 자명하고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 실상에서는 명백한 거짓말이 될 수 있는 이치다.
그 두 번째는,
눈에 보이는 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가 '빛'임을 거듭 기억하는 것이다. 실상 물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되짚어보면, 만물의 근원이 태양이 전달해주는 빛 에너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태양의 빛 에너지가 단 하루라도 지구에 닿지 않는다면, 모든 생명체는 얼마 못 가서 생명활동을 멈추고 만다. 그러므로 태양으로부터 도달하는 빛이 이미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미세한 물질로 자리 잡고 있다는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지각의 환상은 몸 형상을 견고하고 딱딱한 물질의 속성을 가진 것처럼 받아들이게 만들지만, 실상 몸 형상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생명이 생명을 먹고 자라는 대상적 세계 안에서 몸 형상이 스스로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빛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는 음식 물질의 섭취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태양의 빛 에너지는 지각적으로 인식 가능한 물질의 근원일 뿐, 물질 그 너머에서는 해당사항이 없다. 차례대로 올라가 보면, 태양의 빛 에너지의 근원은 나라는 생각의 출현과 함께 나타난 대상적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대상적 세계가 있음으로 인해 태양의 빛 에너지가 출현하게 된다. 대상적 세계와 나라는 생각이 동일한 것임을 눈치채는 것이 만물의 근원이 실상 '나'임을 깨닫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사적인 자기가 아닌 보편적 의식으로서의 '나'를 뜻한다. 나아가 물질의 근원이 태양의 빛 에너지임을 깨달으면, 눈에 보이는 대상이 인식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보편적 의식의 빛비춤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 빛의 진정한 근원이 태양이 아닌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직관적 앎이 찾아온다. 생명을 실어 나르는 보편적 의식은 안과 밖에 상관없이 도처에 존재하며,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허공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몸이 스스로 움직이고 기능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빛이 담고 있는 생명력의 온기가 필요하다. 몸 형상은 단순히 의식의 빛을 담아내는 용기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의 근원이 의식의 빛임이 명백해질 때, 의식의 빛이 닿는 곳마다 순식간에 물질이 창조됨을 알게 된다. 실상에서 물질을 창조하는 근원은 내면에 거주하고 있는 신성 즉, 의식의 빛이다. 대상적 세계에 위치해 있는 햇빛은 몸 형상의 견고한 틀을 만들어내는 음식 물질을 공급할 뿐이며, 대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창조와 유지, 파괴를 일으키는 힘은 보편적 의식의 빛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몸 형상의 근원은 햇빛이며, 그 햇빛의 근원은 의식의 빛이다.
의식의 빛의 근원은 지고의 실재이다. 영원한 망각 속에서 갑작스레 다가온 존재의 출현은 이질적이며, 충격 그 자체이다. 실재의 그림자인 의식의 빛은 '영원 속의 찰나'이므로 무척 생소하게 다가온다. 현존 너머의 실재는 사적인 자기의 입장에서는 결코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언제나 신비와 경이로 가득 차 있다. 스스로가 이미 처음부터 절대의 상태에 있음을 깨달은 존재는 모두를 동등하고 평등하게 비추는 의식의 빛이 바로 존재를 향한 신의 보편적 사랑임을 알게 된다. 의식의 빛은 보이는 대상과 보는 자가 하나임을 깨닫게 한다. 의식의 빛이 환상을 제거하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내 줄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분리의 간극을 좁히는 신의 자비와 사랑 덕분이다. 그 어떠한 편파적이고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순수하게 만물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사하는 의식의 빛은 세상이 온통 신성으로 물들어 있음을 본다. 내면의 신성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대상적 세계는 창조주와 창조물이 실상 하나임을 깨닫고서 신적 기쁨에 이른다. 일체가 나로 인해 존재한다는 앎이 분명해질 때, 사적인 자기의 해소에 따른 카르마적 매듭은 완전히 풀린다. 존재론적 의무에서 완전히 해방된 존재에게 신적 기쁨을 표현하는 것 외에 달리 어떠한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온갖 예술과 노래, 춤, 유머는 신의 존재를 향한 사랑을 구현하기 위함이다. 모든 행위와 사고가 실상 신이 주관하심이 명백해진 곳에서 행위자 없는 행위가 저절로 일어난다. 삶의 목적과 의미가 사라질 때, 유희는 일상이 된다.
그 세 번째는,
허공 전부를 자기 자신의 몸으로 여기는 것이다. 보편적 의식은 안과 밖에 구분 없이 모두를 향해 열려 있는 광대한 허공을 수용하는 마음을 지닌다. 보편적 의식의 몸은 허공 전부이다. 그 다함없는 가능성과 잠재력이 거주하고 있는 허공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이 출현한다. 대상적 세계 안에서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 안과 밖에 도처에 만연한 생명력이 씨앗에 스며들어 물질의 성장을 이끌어낸다. 물질적 기반이 형성된 곳에 보편적 의식이 들어가 생명을 탄생시킨다. 모든 생명체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 보편적 의식의 장으로부터 비롯됨을 알게 될 때, 몸 형상이 지니고 있는 차이와 다름은 다양성과 풍부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나와 무척이나 반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대상이 실상에서 나와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게 될 때, 대립과 투쟁의 무의미함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더 이상 싸울 의미가 사라진 곳에서 존재는 더 이상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시도에 구애받지 않으며, 완전한 자유와 사랑 속에서 보편적 의식의 유희를 관조할 뿐이다. 세상 속에 있되, 세상 속에 물들지 않는 초연한 태도는 사적인 자기의 거짓됨이 낱낱이 밝혀진 곳에서 드러나는 보편적 의식의 성품이다. 나와 너의 이분법적 구분이 실상이 아님을 알게 될 때,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만들어낸 몸을 향한 집착의 끈이 느슨해지고 이는 보편적 의식의 장에 대한 발견으로 이어진다. 세간적 삶과의 투쟁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사적인 자기는 육체의 생존을 이어나가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 삶을 향한 의지와 욕망이 멈추지 않는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고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고통의 지속을 두 팔 벌려 환영할 정도의 영리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에고의 영리함이 불쑥 출현할 때마다 영적인 수행을 하는 구도자는 일체를 신의 공로로 바치는 숭배를 해야 한다.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일체가 신의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에고의 영리함을 겸허함으로 되돌린다. 스스로의 몸집을 부풀리고자 하는 에고의 팽창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을 향한 맹목적인 헌신뿐이다. 사적인 자기로부터 비롯되는 위치성을 단번에 해소시키는 신의 무소 부재함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환의 속임수에서 영적인 구도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분리의 느낌마저도 모두 신을 향한 감사로 되돌리는 것이 영적 성장에서 마주하는 장애물을 무사히 피해 가도록 돕는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이 있다"는 중도의 선언은 사적인 자기가 고집하는 위치성으로부터의 탈피를 수월하게 한다.
마지막으로는,
감정과 생각, 물질의 한계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것이다. 마음의 본성상 극한까지의 추구는 더 이상 심신이 견딜 수 없는 상태까지 몰고 가는 상태를 유발해 대립쌍이 표면으로 완전히 드러나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자기 자신이 붙들고 있는 위치성과 정반대에 있는 대립쌍에 대한 뚜렷한 인식과 더불어 극한 속에서 완전히 사적인 자기가 지니고 있는 힘을 완전히 소진해버린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게 된다. 부분이 붙잡고 있는 그릇된 위치성과 힘이 남김없이 비워짐에 따라 전체에 대한 인식이 단번에 찾아온다. 사적인 자기의 통제와 제어가 느슨해지면서 갑작스레 맥락이 보편적 의식의 장과 정렬되면서 현존에 다다른다. 현존은 사적인 자기에 대한 완전한 포기를 요구하므로 대개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쉽사리 행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적인 자기는 생존의 근원을 전적으로 마음의 습에 물들어 있는 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몸과 보편적 의식 사이에 걸쳐있기 때문에 그 특성상 언제나 몸과 의식 사이에서 타협 불가능한 선택지를 마주한다. 이러한 마음의 조건과 상황들이 역설과 모순을 낳게 된다. 스스로 분열되는 양상을 매번 마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헤매는데, 이는 마음의 습이 환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증거 한다. 사적인 자기만을 바라보는 마음의 습은 환에 대한 사랑이 결국 자기 자신을 고 통고 슬픔으로 내몰아간다는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스스로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위와 사고가 실상 자기 자신에게 해롭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환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은 탄생이라는 누명으로부터 씻을 수 없는 낙인에 몸부림친다. 한계에 대한 도전은 사적인 자기가 견딜 수 있는 정도를 훨씬 웃도는 기준을 내놓음으로써 스스로를 내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도록 한다. 몸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존재에게는 육체의 불완전함만큼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닥쳐온 질병들과 소중한 가족과 애인의 사별 등과 같은 죽음의 관련된 일은 그 충격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습을 단번에 끊어내는 계기로 작용한다. 더불어 대상적 세계가 지니고 있는 모순과 역설로부터 환멸을 느낀 적이 있다거나 동물적 본성에 대한 구속으로부터 권태와 무료함을 느끼는 등의 일도 포함한다. 이러한 충격적인 일의 공통점은 환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 강해져 사적인 자기가 전적으로 신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사적인 자기라는 환상을 알아차리기 위해 대상적 세계는 적절한 처방을 삶 속에서 제시해준다. 결국 모두가 동일한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므로, 진실을 아무리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똑같다. 과정은 천차만별이지만 모두가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한 곳에서 모이게 된다. 삶을 향한 의지와 욕망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되었을 때, 영적 성장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희소식일 수 있다. 물론 환에 대한 애착이 강할수록 그에 따르는 저항도 격렬할 수 있지만 말이다.
환의 창조주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을 너무나 사랑한다. 하지만 환은 환일뿐이며, 언젠가는 끝이 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존재하기를 좋아하고 소멸을 원치 않는 신은 존재하려는 욕망이 최초의 속박을 일으키는 원흉임을 깨닫지 못하고 윤회의 세계를 떠돈다. 환이 환임을 받아들이고, 영적 이해와 분별로 환을 죽임으로써 운명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 모든 인간의 존재에게 부여된 존재론적 임무다. 모든 존재에게서 창조주가 기록해놓은 역사의 발자취를 보게 될 때, 만물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직관적 앎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생시의 꿈에서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선보인다고 한들, 결국 꿈은 꿈일 뿐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 신을 마주하는 유일한 순간임을 명심하고 신에게 합당한 헌신과 숭배를 보이는 것이 이롭다. 신이 스스로 실재를 향한 마지막 발걸음을 뗄 수 있도록 신이 스스로가 신임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한다. 존재하려는 욕망을 종식시키는 것은 신이 자기 자신마저도 환임을 자각할 때이다. 무념의 실재에는 기억될 것이 없기 때문에 잊어버림이 익숙하다. 나라는 기억마저도 잊어버린 실재는 아무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었음을 안다. 환의 창조주가 스스로가 만들어낸 창조물을 완전히 낯설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때, 지고의 실재가 무념 속에서 떠오른다. 존재와 그로부터 나타난 모든 것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그것이 바로 참된 것이다. 신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 곳에서 실재는 서늘한 정겨움을 담고 있는 미소를 짓고 있다.
" 일체가 다 좋으라고 있는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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