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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에 앞서, 이 모든 영적인 글들은 지적인 유희에 지나지 않음을 밝힙니다. 무지를 제거하기 위한 지는 필요하지만, 그 이후에는 그 지마 저도 내버려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무지를 제거하기 위한 지도 결국 말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언제나 지와 무지 너머에 있으며,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조차도 하나의 위치성을 낳는다는 것이 명백하게 이해될 때, 존재는 자발적으로 침묵하게 됩니다. 언제나 글을 쓰기에 앞서, 차갑게 얼어붙은 양철 나무꾼의 심장을 녹이는 소녀, 도로시의 따스한 손길을 마음속에 그려봅니다. 죄인도, 성자도, 모두가 '신'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대상적 세계를 설명하는 지성은 언어적 한계가 지니고 있는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깨달음 직전에 이르는 단계까지 그 실효성이 유효하다. 수많은 혼란과 분열을 낳은 개념적 오류를 수정하고 무지를 제거하기 위한 지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지성은 대상적 세계 안에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지적 유희다. 어떠한 대상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온전히 '앎'으로 편입된 대상에 대해서 인간의 존재는 분리에 따른 긴장을 느끼지 않는다. 어떠한 대상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질과 특성에 대한 이해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참된 앎은 그 대상 자체가 의식 내에 완전히 동화되어 그 대상과 나 사이의 유의미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진실로 자기 자신이 된 것에 한해서,  우리들은 그 대상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일체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수준에서 인간의 존재는 그 대상에 대한 완전한 앎을 얻는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고양이는 스스로가 고양이인 것에 대해서 어떠한 증명과 인정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순히 고양이는 고양이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지니는 한계는 언어가 허공 속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그 대상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를 그려내어 실상과 전혀 다른 공상을 자아낸다. 어떤 이에게 고양이의 이미지는 차분하고 얌전한 페르시안 종일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사납고 경계심이 날카로운 길고양이일 수 있다. 언어가 지니고 있는 위치성이 상대적 관점을 낳고 이에 따라 저마다의 경험에 따른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서 견고하게 굳어진 생각과 감정의 덩어리들을 해체하는 작업이 바로 업보를 해소하는 영적 작업이며, 무의식의 분화와 통합에 따른 '자기 개념의 확장'이라는 자아실현의 여정이다. 우리들이 바로 초월과 상승의 길이라고 부르는 여정 말이다. 



우선적으로 대상적 세계를 구성하는 두 가지 주요 원리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다. 보편적 의식으로 단일하게 구성된 대상적 세계는 존재계라고 일컬으며, 존재의 원리와 비존재의 원리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존재의 기쁨을 누린다. 지복은 각자가 처한 의식 수준마다 다른 형태와 양상으로 드러나며, 스스로가 지닌 개성에 따라 신에게 봉사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겉보기에 완전히 달라 보이는 모든 행위들이 한 가지 목표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러한 이해가 동반될 때 행위는 보다 수월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행위의 목적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으므로 행위와 사고 사이의 간극이 생겨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의도가 온전히 신을 향한 사랑을 반영하기 위한 것일 때, 존재계 내에서 그에 거역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존재계 내에 있는 일체가 행위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바로 '존재애', 신을 향한 사랑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의 원리는 여성적 측면, 우주적 본체에 해당하며, 비존재의 원리는 남성적 측면, 우주적 의식에 해당한다. 여기서 언급하는 남성과 여성은 단순히 생물학적 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존재의 원리가 존재계 내에서 형이하학적인 부분을 맡고 있으며, 비존재의 원리가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적인 경향성을 나타내고 있는 존재와 비존재의 원리는 남성과 여성의 의식적 자아에 해당한다. 보편적 의식은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남성의 의식적 자아는 비존재의 원리를 삶 속에서 구현하고, 여성의 의식적 자아는 존재의 원리를 구현해낸다. 무의식적 영영에 있어서는 반대로 남성은 여성적 측면, 여성은 남성적 측면을 맡고 있다. 무의식적 분화와 통합은 스스로가 세계의 창조주임을 망각하고, 하늘의 신성을 땅으로 실추시킨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타락을 원상 복귀시키는 영적 작업이다. 모든 인간의 존재는 신의 자녀에 다름 아니지만, 본래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동물적 본성에 스스로를 한계 짓고 구속시키는 무지를 받아들였다. 만물을 창조하고 파괴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스스로를 육체라는 감옥에 가두어놓고 자유와 사랑을 찾아 헤매는 끝나지 않는 모험을 계속하고 있는 형국이다. 계속해서 외부로 향하는 에고의 시선은 흥미롭고 신비로운 체험을 갈구하지만, 결국 그 모두가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는 시기를 맞이한다. 이원성의 체험이 환상임을 간파해내지 않는 이상, 더 많은 체험을 열망하는 마음의 갈증은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삶은 언제나 새롭게 펼쳐지고 있지만, 나라는 생각 안에 갇혀있는 존재는 환상을 축적하는 기억의 창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무엇에도 특별한 인상을 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나와 동일한 근원을 지니고 있는 하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체험은 끝이 나야 한다. 타는 듯한 마음의 갈증을 달래기 위해서는, 외부로 달려 나아가는 마음을 부여잡고 내면으로 들어가 본래의 나를 되찾아야 한다. 


 존재와 비존재의 원리는 서로가 상호작용하며, 무의식적 분화와 통합을 수월하게 진행시켜 나아가는 데에 영감과 지혜를 전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실상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무의미하지만, 보편적 의식의 수준에 이르기 전까지 존재와 비존재의 원리는 서로 간의 업보를 주고받는다. 하나가 있는 곳에서 둘을 상상하는 마음은 죄와 공덕이라는 업보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한계적인 틀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성이라는 인간 존재의 집단의 장에서 뚜렷하게 표면화된다. 인간 존재가 지니고 있는 집단의 장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진행한 융은 원형에 대한 적절한 처방전을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탁월한 지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적 측면을 담당하고 있는 비존재의 원리는 남성의 의식적 자아에 해당하고, 이에 대한 원형상은 여성의 무의식적 자아가 그리는 남성상과 대응한다. 남성의 의식적 자아의 원형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되며, 전사, 마법사, 다정한 연인, 왕으로 구분된다. 모든 남성은 네 가지 원형상을 모두 갖고 있다. 왜냐하면 겉보기에 분리되어 있는 육체는 실상 단일한 보편적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사는 건강한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근육질의 남성을 가리키며, 마법사는 사물에 대한 지식과 외부 대상을 자유롭게 제어하는 남성에 해당한다. 나아가 다정한 연인은 여성과의 정서적 교감에 능통한 모습을 보이는 카사노바의 남성이며, 왕은 사상과 규칙을 만들고 통치하는 남성이다. 이 모두가 마음이 만들어낸 상상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지만, 언제나 외부만을 향해있는 마음은 세계가 자기 자신의 안에 있는 것임을, 즉 나라는 생각에 지나지 않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더불어 이러한 마음의 이원성 환상을 눈치채기 위해서는 남성의 원형 중에 왕에 해당하는 남성상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사상과 규칙, 체계를 정립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왕은 문화와 사회 시대 전반에 이르는 방향에 대한 적절한 가르침을 전수해준다. 왕이 생명에 반하는 원리를 수호하고, 지각의 환상에 사로잡혀 무지의 토대 위에서 사상과 규칙, 체계 등을 펼쳐낸다면, 일체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존재를 향한 사랑이 메마르고, 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나아가는 흐름은 결국 그에 따르는 반작용을 피해 갈 수 없는 현상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왕이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념을 주장할 때, 문명은 쇠퇴의 길을 걷는다. 거기에는 전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생기의 불꽃이 메말라 영혼이 더 이상 숨을 자유롭게 호흡할 수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떠한 생명도 높은 차원의 지복을 누리지 못한다. 오로지 동물적 본성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욕망만이 팽배한 문명과 사회 속에서 생명은 고통에 울부짖는다. 


  왕이 펼쳐내는 가르침에 따라서 전사와 마법사, 다정한 연인이 가야 할 전반적인 행로가 정해진다. 대상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형성된 마음은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상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시대적 분위기와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재생산한다. 마음 너머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라는 집단의 장에 내재한 원형은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것이며, 지각의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왕이 몸과 마음에 대한 지배력을 내려놓고 온전히 신에게 스스로를 내맡기는 길뿐이다. 불완전함과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온전한 수용은 인간의 존재를 자발적 체념으로 이끌고 이는 잠들어있는 신성을 일깨우는 허락으로 귀결된다. 매우 단순하지만, 스스로를 증식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는 마음에게는 스스로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라서 매우 어렵게 다가온다. 남성의 의식적 자아는 비존재의 원리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남성의 의식적 자아는 무의식적 통로를 통해 신적 지혜와 가르침을 적절히 구현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남성의 의식적 자아가 무의식의 분화와 통합에 얼마나 열려있는지에 따라서 영적 성장의 척도와 인격의 완성 여부가 결정된다. 존재의 원리는 새로운 진화와 창조를 담당하고 있는 비존재의 원리에 봉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이러한 봉사에는 그가 구현해내고 있는 비존재의 원리가 생명에 적합한 것에 대한 암묵적인 판단이 수반된다. 여성은 남성이 스스로의 본질적인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지를 직감적으로 판단하며, 이러한 남성에게 무의식적 성적 끌림을 느낀다. 존재의 원리를 담당하고 있는 여성은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창조적 역할, 종을 책임지고 이어나갈 권리에 대한 책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잉신이 가능한 시기에 있는 젊은 여성은 보편적 의식이 지니고 있는 성질을 구현해내고 있는 남성을 찾아 헤맨다. 보잘것없는 남성보다 뛰어난 남성의 첩으로 남는 것을 선호하는 여성의 심리는 이러한 맥락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을 지지하는, 적합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 남성의 아이를 재생산하는 것이 젊은 여성이 맡고 있는 존재론적 역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성의 의식적 자아는 남성이 지니고 있는 무의식적 여성적 측면에 민감하다. 여성의 의식적 자아는 직감적으로 스스로의 영적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남성상에게 끌림을 느낀다. 이처럼 존재의 원리와 비존재의 원리는 서로 상호작용하는데, 이는 겉보기에는 정뱐대에 위치한 대립쌍의 두 원리가 본래 단일한 보편적 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여성의 의식적 자아는 남성의 무의식적 자아와 대응하고, 남성의 의식적 자아는 여성의 무의식적 자아와 대응한다. 남성의 원형에 대응하는 여성의 원형 또한 크게 4가지 유형이 있다. 전사는 관능적이고 요염한 여성상과 대응하고, 마법사는 관계에 능숭학 모습을 보이는 여성에 해당한다. 다정한 연인은 간접적인 도움과 함께 격려와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는 배려 깊은 여성이며, 왕은 전 인류를 감싸안는 보편적 사랑을 보여주는 성모 마리아 같은 여성이다. 실상 남성과 여성의 원형이 제시하는 상들은 동일한 존재가 지니고 있는 존재와 비존재의 원리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관계를 형성하고 중시하는 여성의 의식적 자아는 현실 속 남성과의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스스로의 원형과 대응하는 남성상을 향하게 된다. 여성의 의식적 자아가 관능적이고 섹시한 모습의 여성상을 지니고 있으면, 남성 또한 탄탄한 근육질의 여성과 교제하게 된다. 두 갈래 길로 나뉘어 있는 마음은 스스로가 담당하고 있는 의식적 자아에 반대되는 모습을 필연적으로 원하게 된다. 이처럼 본래의 하나, 완벽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원형상과 대응하는 이성과의 결합을 열망하게 된다. 성욕에 따른 육체적 결합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남녀가 만나는 것이 아닌 정신적 측면의 정서적 교감도 포함되어 있다. 마음 너머에 이르지 못하고 대상적 세계 안에 갇혀 있는 여성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남성상의 변화를 통해 이는 쉽게 증명이 가능하다. 젊은 시절의 여성은 육체미가 있고 섹시한 남성을 이상적으로 여기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능력 있고 다정한 연인에게 끌리게 된다. 노년에 들어서게 되면, 여성은 외부에 있는 권위적 인물 혹은 신을 섬긴다. 이처럼 마음 너머에 이르지 못한 존재는 내면에 들어있는 신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언제나 외부에서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용품을 갈구한다. 자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심리는 내면에 머물러 있는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것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이다. 여성은 대개 남성보다 종의 종속에 더 깊이 사로잡혀 있으므로 사적인 자기에 해당하는 에고를 초월하는 데에 있어서 남성보다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여성은 남성보다 본능적 충동에 있어서 압박을 덜 느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운 편이다. 양극단의 분포도가 언제나 남성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경향성이 영적 성장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평균치에 이르는 여성은 많지만, 남성은 여성보다 양극단에 더 많은 수가 분포해있다. 영적 성장은 자기 자신의 전부를 신께 내맡길 것을 요구하지만, 대개 여성은 종의 종속에 남성보다 깊이 사로잡혀 있으므로 완전히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다. 물론 여성의 의식적 자아가 지니고 있는 성질이 보다 수용적이고 허락에 관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영적 성장의 길이 완전하게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는 남성보다 더 많은 수의 여성이 깨달음의 수준에 도달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삶의 맥락이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단순히 돈을 벌고 가정을 구성해 나아가는 것에 국한된 삶은 끝없이 윤회의 세계를 지속시키는 업보를 축적하게 만든다. 사적인 자기의 허구성을 낱낱이 밝혀내어 신이 스스로가 신임을 완전히 자각하는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신은 다양한 형상과 이름을 지닌 채로, 세상 속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생각과 감정이 남기는 인상들이 청산되지 않는 업보로 이어져 지옥과 천국의 모습을 지닌 윤회의 세계에 신을 가둬놓는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한계 외에는 그 어떠한 속박도 없는 곳에서 신은 자기 자신과의 유희를 즐기는 데에 흠뻑 취해있다. 무지의 취기가 사라지지 않는 곳에서 창조주의 꿈은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온다. 생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한 차례의 꿈에 지나지 않지만, 상대적 차원에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신은 스스로가 세계의 창조주임을 망각한다. 스스로가 절대의 상태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신에게 상대적 차원은 소유의 욕망을 낳을 뿐만 아니라 매력적으로 보인다. 대상적 세계 내에 있는 일체가 속박이고 한계이지만, 나라는 생각안에 갇혀버린 신은 작은 중생으로 살아간다. 그 무엇도 완전하지 않으며, 끝없는 부족과 결핍에 시달리는 대상적 세계에서 영원한 것을 찾아 헤매는 욕망이 환에 대한 집착을 낳고, 환을 참된 것으로 여김으로서 마야는 윤회의 세계에 신을 가둬놓는 굴레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온갖 마야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인간의 존재는 삶에서 외적인 추구를 그만두고, 내적인 영적 성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인간의 존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참된 행복은 결코 대상적 세계 내에서 발견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상적 세계는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거짓인 것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역설 속에서 삶은 언제나 공허할 뿐이다. 환은 배신하기만 할 뿐, 결코 존재의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남성이 외부의 여성으로부터 끝없이 인정과 증명에의 욕구에 시달리는 것은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의식적 자아의 방향이 신의 의도와 정렬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되고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자기 확신이 있다면, 외부의 인정과 증명을 바라지 않는다. 진실은 자명하고 명백한 반면, 거짓은 나약하고 취약하다. 신으로 향하는 영적인 길을 추구하지 않고, 세간적 삶에서의 성공과 부, 명예를 얻는 데에 온통 쏠려있는 남성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전부인 곳에서는 그 어떠한 증명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의 의식적 자아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외의 일체는 남성을 모두 하나님의 에덴동산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뱀의 간사한 속삭임이다. 오직 대상적 세계 안에서 신만을 보고자 하는 일관된 의지와 신만을 향한 헌신만이 존재의 그물로부터 아담을 구출해낼 수 있다. 실상에서는 해방도 구원도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상상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부터 속박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해방도 구원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은 하나이자 전부인 신만을 위한 것이며, 애초부터 이름과 형상을 지닌 사적인 자기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 삶에서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는 이유는 그 모두가 덧없이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꿈에 지나지 않는 찰나적인 '신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