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론적으로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나름의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범위로 정해진 개념일뿐, 객관적인 개념으로 정의 될 수는 없다.
이는 깁슨이 제창한 어포던스가 얼마나 주관적이고도 상대적인 개념 인지를 증명하는 요소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본능적인, 의식 이전에 일어나는 움직임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어포던스 자체는 개체에 따라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경험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로 완전히 물리적으로 같은 경험을 하고 있더라도 각각의 감각질은 다르다는 것을 보면 사람에 따라서 순수경험 그 자체는 다르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는 순수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보편성을 가진 순수성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니시다는 사유가 끼어들지 않는 연속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절벽 등반의 예시를 들었는데 이를 통해서 보면, 두 사람이 같은 위치에서 같은 절벽을 등반한다고 했을때, 숙련자와 초심자가 몰아의 상태에 접어들어 순수경험으로 인한 연속적 움직임을 하고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움직임에는 차이가 생기고 만다. 순수경험이기에 연속성의 사이에 사유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즉, 순수경험 자체가 상대적이라고 말 할 수 있게 되어버린다. 이때의 연속성은 어포던스의 영향으로 인해 상대적인게 되어버리며, 이를 이항대립에 끼워넣어서 말하자면, 정과 반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이는 동적 세계에서 정과 반이 시공간적으로 언제든 뒤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이를 다루었다. 이는 당연하지만 의식 그 이전의 문제로,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경험과도 유사하며, 어째서 상대성이 발생하느냐와 같은 여러가지 담론이 이루어 질 수 있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주체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 상대성과 보편성 그 자체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미술은 외재화의 영역이다. 만약, 우리가 느끼고있는 감각을 의도적으로 외재화 시킨다고 하자.그 외재화 시킨 무언가를 타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외재화 시킨 사람이 생각한(혹은 목적으로 한) 그대로 받아들인다고는 말 할수 없다. 심지어 본인이 외재화 시킨 무언가를 본인이 다시 보더라도 외재화 시킨 당시와 같은 감각을 느낀다고 할 수는 없는것이다. 이는 현상 표현의 불가지문제도 존재하지만, 본인조차 본인의 내면을 의식적으로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역시 의식과 판단의 일부는 순수경험의 연속성으로 인해 자신이 관찰할 수 없는 영역(어떤 사유도 끼어들 수 없기에, 일어난 현상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 이 생기고 말아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동적 세계에서 무언가를 ‘순수한 정지’로 표현할 수 없음을 뜻한다. (완전한 고립계라면 다르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 탁상공론이다) 이는 아라카와 슈사쿠의 죽음의 무의미성을 부정하고 있다고도 말 할 수 있는데, 이미 외재화 시켜버린 개체는 주체에서 분리되는 순간 연속성을 잃어버리고 일종의 순수성을 가지게 된다. 이때의 순수성은 주체 상대적인 것이며, 어디까지나 주체에게 있어서만 통용되는 순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주체)는 자신 밖의 객체에게 영향을 어떻게 받을지는 정할 수 없으며(받아들여지는 것), 단지 객체를 경험하는 것을 피함으로서 수동적 회피를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있어서의 우위성을 주장하는것은 무의미 하며 단지 그 안에 순환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주체와 외재화된 예술(객체)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 할수 있다. 비록 시공간적 연속성에의해 시시때때때로 주객관계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인간이기에 주객을 동일시 할 수는 없으며 완전한 동일시는 인간이라는 관념적 틀 안에 갖힌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삶과 죽음의 다름과 가치에 대해 증명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까지 우리는 순수경험의 상대성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미술작품을 보고 비슷한 평가를 내린다.
나는 이를 예술이 절대적 보편성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먼저 예술에 있어서의 인식 지평을 통일하려고 한다.

예술 사조는 해석자에 의해 의도된 것

유명한 미술가인 살바도르 달리를 보자. 살바도르 달리의 경우, 처음부터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아내 갈라가 그의 재능과 그림을 알아보고서, 여러 '마케팅'을 통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림이 바뀐것이 아니라 그림을 알리고 그림을 보는 관점(혹은 그림의 해석)을 바꾼것이다.
이러한 일은 소위 말하는 ‘근대 예술 사조의 생성’ ‘통치수단으로서의 사상’ 등에 자주 보이는 형태이며, 예술은 상부구조이고 그를 만들어 내는 것은 토대(권력자, 권위자 등) 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라면 긍정하면서도 굉장히 싫어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는 예술은 창작가가 만들어 낸 고상한 것 이라는 대중의 생각과는 달리 당시의 사회적 상황 (ex 전쟁, 독재 등) 과 개인의 물질적 풍요 등,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이유로 인해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면이 더 커지는 경향이 있는데, 창작자의 사망으로 인해 창작자보다는 예술의 발굴자나 해석자의 영향이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이즈음에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예술과 순수경험의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하자.

예술은 당대 혹은 후대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대적 보편성으로의 도전으로 비춰진다

수행을 한 사람 (예술계 권위자)은 객체(특정 예술작품)를 보았을 때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리비도를 일으킬 요소(시장성 등)가 있다고 판단한다.이때의 판단 기준을 나는 보편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절대적 보편성이란 없지만, 해석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같은 인식지평을 가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나름대로의 보편성을 지니게 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판단은 사유의 결과이지만 이 사유를 유도한 것은 예술작품의 순수경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을 한 사람의 순수경험 상태에서의 무의식적이고 연속적인 움직임 자체가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의 움직임 보다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새로운 해석을 통한 범용적 보편성을 잘 찾아낸다고 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방법을 바꿈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것을 우리는 '혁신'이라고 부르며 이는 새로운 작가의 발굴, 예술사조의 변화등으로 이어진다.

수행을 할 수록 순수경험의 연속성에서 보편성을 잘 찾는 움직임으로 유도된다는 것은 순수경험 자체가 상대적임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불완전한 보편성 비스무리한 것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유명한 예술작품은 권위자의 발언이 없었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성공 가능성이 다른 예술작품보다 높았던것이었다고 말 할수 있다. 다만 작품이 넘쳐 시장에서 그 자신과 해석방법이 주목받으며 숨겨져있던 것이 드러났을 뿐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