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모든 쾌락과 고통은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고통의 해소로 인한 쾌락
(2) 쾌락의 해소로 인한 고통
(3) 부당함으로 인한 고통

쾌락의 경우는 오직 (1)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즉, 쾌락이나 행복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고통이 해소될 때에 간접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다. 고통은 인간이 움직이도록 만드는 원동력, 채찍의 역할을 한다. 쾌락은 그에 대한 보상, 당근의 역할을 한다. 이 둘은 채찍과 당근으로 인간을 조련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로써 인간의 생존과 종의 존속이 유지되는 것이다. 예컨대, 밥을 먹었을 때의 쾌락은 배고픔의 해소로부터 기인한다.

(2)의 경우는, (1)과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쾌락이 발생했을 때, 이는 언젠가 해소된다. 밥을 먹었을 때의 배부름은 곧 사라진다. 이 때에 발생하는 고통이 (2)인 것이다. 고통이 (2)에 국한된다면, 고통 또한 쾌락으로부터 기인하므로, (1)과 (2)의 합은 0이 되어야 한다. 즉 인생은 불행도 행복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경우, 쾌락과 달리 독립적으로 발생할 수가 있다. 그것이 (3)이다. 과장되게 예를 들어보자면, 길을 가다가 번개에 맞았다고 생각해보라. 몸에는 불이 붙었고, 고통이 느껴진다. 이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몸을 뒹굴거나 할 것이다. 그렇게 고통이 해소되었지만, 쾌락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번개라는 사건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당함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부당함이란,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우연의 생존 위협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이 쾌락으로 치환되는 것이 아니고, 생존의 유지로 치환된다. 이 경우에는 고통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 부당함은 번개처럼 거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느날 기온이 너무 뜨거워서 불쾌한 것, 걷다가 레고를 밟아서 아픈 것, 모두 부당함이다. 이러한 부당함은 생존이 길어질 수록 천천히 누적된다.

(1)과 (2)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다. 총합은 0이다. 하지만 (3)이 추가되면서 우리의 삶은 고통이 더 많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을 막론하고 삶은 고통이다. 아무리 금수저로 태어나도 뇌에 각인된 수백만년간의 진화사를 거스를 수는 없다. (이것이 비단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통용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십억년간 이어져온 관행인 것이다.)

결론을 내보자면,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고통이며, 그 고통으로 하여금 인간은 움직이고 행동하고 번식하여 대를 잇는다. 즉, 고통은 인간이 살아가야할 목적의식을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우리는 목적의식을 주입당해야 하는가? 아무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존재해왔기 때문에 스스로 관찰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악순환을 끊어내야한다. 인생의 행복이나 의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누리는 행복은 결코 공짜가 아니라 고통에 진 빚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