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하루는 시적이었다. 오늘의 햇살은 청아하기만 하다. 나는 자주 내 영혼의 그릇을 본다. 나는 자주 내 영혼의 그릇을 본다.
쏟아냈는가, 어떤 문법은 체계의 획을 긋고 존재의 단밀성에 대해 설명하는 듯 하다. 바보가 눈이 멀고 백치를 찾는 설야의 언덕
안다는 것은 시적이다.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인가 되려고 하는 움직임에 진배 없다. 한방울의 물이 순환하기에 앞서 논증을 찾는 것은 존재의 지각이다.
그러나 나는 문법 체계의 고독성에 대해 일원화하는 질문을 던진다. 산다는 것은 때론 '답하고 질문하기'이다. 말의 업보란 무엇인가?
황혼에 걸쳐있는 수 많은 빗방울의 언덕을 보라. 폭포수를 쏟듯이 튕겨져 나오는 것은 몸의 그을음이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존재의 이역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면 나는 지금껏 비탈길에 있었던 내 단역의 생활을 청산한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한주리 굴비를 엮고 집으로 간다는 것, 곧 추석이구나
나는 내 방만의 행위에 대해 엎어지고 쏟아진 튀어 오르는 물을 바라본다. 그 곳에는 나는 없고 나를 보는 나도 없고 그렇게 굴비를 엮듯 사평역으로 곧잘 가는 것이다.
나는 방만의 행위에 대해 가증명제의 논증이 없다. 한방울 물로 산다는 것이 때론 무허가에 핀 들꽃 같기에
어제의 하루는 시적이었다 예술적이었다 신학의 시녀적이었다. 나무의 목자는 세피로트 나무의 번성하는 숲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에.
카발라/역카발라 등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으나 내 지혜의 밑천에는 거름이 없었음으로 이만 운을 마친다.
정신은 무엇으로 분열하는가 무엇으로 통일되는가 서사의 긴장적인 느슨을 푸는 매듭으로는 운을 마친 실이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나의 모든 오욕과 오독을 쏟아내는 지리멸렬한 언어로서 대체를 가지는 대지의 허방감에 모든 운을 다 끌어다 쓴 것이다.
그러니까 가령 내게 산다는 것은 재미일 뿐이라 생각하지만 그 잘난 놀이에 대한 자아의 일체감은 상당히 피로하기만 한 것이다.
나를 덮어주는 밤하늘과 박힌 별의 이불은 나의 밤과 조용히 흩어진다, 나는 그런 순간의 자애가 좋은 것이다
자고 나면 개운하게 그을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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