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이 "신"의 존재의 유무를 두고 갈등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감이 이러한 행위를 평가하자면
신의 존재의 유무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따지자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신의 존재의 유무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이 있다고 하여 지금의 세상이 달라질까요?
실제 예수가 존재했다 가정한들 우리의 삶이 달라질까요?
만약, 신의 존재의 유무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변화한다면
나는 온전히 "나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삶의 가치는 스스로가 부여해야 합니다.
고작 신의 존재의 유무 따위로 나의 삶의 가치가 변화해선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설령 신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저의 태도는 변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살아가도 되는 이유는, 오직 저만이 결정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은, 스스로의 이성적 판단과 느낌의 끌림으로 결정됩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아가며 나아가는 과정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저에게 있어"고통의 크기" 보다는 "자유의 가치"가 더욱 소중하기에,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길 선택합니다.
앞으로 저에게 있어 고통이란, 그저 새로운 가치를 위한 시련 정도로 취급될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저에게 있어, 신은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자유를 얻기까지, 저에게 삶이란 "지옥" 보다 더한 곳 이었기 때문입니다.
ADHD로 인한 깊고 예민한 감수성과, 삶의 진리를 추궁하는 복잡한 성향을 타고난 저는,
7살 미만의 어린 나이부터 우울함에 시달렸습니다.
단순할 수 없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수 많은 생각의 대부분이 고통과 연결되기 때문이지요.
생각은 배수가, 고통은 제곱수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끝도 없는 심연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심으로 신께 기도했으며, 진심으로 신을 원망했습니다.
원망하는 일조차도, 저에게 있어선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과정의 일부였던 것 같습니다.
신을 믿는 이유를 알기에
세상의 진리에 있어 신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지만,
스스로 삶을 지탱하기조차 버거운 인간에게 있어서
신의 존재는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나약한 마음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삶의 가치란,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이유"를 의미하기에
인간의 가치가 "신의 존재" 따위로 결정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만 삶을 이어가기엔,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이기에
한때의 인간에게 있어서 "신의 존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나약한 정신을 가진 것이라 비판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가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의지했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2. 실재론자가 망상으로 점철된 소설이나 시를 읽고서 그의 주장을 굽힌다면 철학자로서 또는 생활세계(직업)인으로서 그의 철학적 성과는 과연 인정받을 수 있는가. 도대체 철학적 신념과 깊이란 무엇인가.(플라톤적 사조에서.)
아무튼 방장 토비님은 너무나 철학적인 념글을 썼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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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님은 오늘처럼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사유의 원칙을 전개하십시오. 나처럼 몇몇 철학전공자의 이름을 비난하고 치켜세우는 순간 정확한 사유는 멈추고 맙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파는 건 무조건하고 생각함의 반칙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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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술사러 편의점을 다녀왔는데, 편의점 앞에서 초등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내아이 셋이 담배를 피고 있더군요. "시발시발"하면서. 나이 오십인 나는 중학생에게도 존댓말을 하는데,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서 "야야 느그 지금 시간이 몇신데(새벽 세 시 삼십 분이 넘은 시간) 여기서 이카고 있노. 집에 들어가라." 고 했더니 나한테도 개아리탑디다. 내가 한
가개(폼) 하는데, 요즘 애들에겐 안 통하나 봐요. "느그 경찰아저씨들 부른다" 하는 데도 여전히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시발시발거리네요. 그 모습이 귀엽고 또 안타까워서 햄버거라도 사주려고 했더니 그 사이 저만큼 달아났네요. 세상이 참.
얘들이 담배피는 건 좋고 새벽녘에 싸돌아다니는 건 가정사 문제이지만, 당장에 사고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자라날수록 사건사고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경우란 거지요. 과연 이땅의 사회 윤리가 586 세대의 자랑처럼 민주화, 시민화하였냐고 질문한다면 나는 아주 부정적인 답을 할 겁니다. 내가 아는 586은 기초(이론)없는 시민권자가 9할이었습니다. 그들의
오만(착각)은 그들 자식에 의해 반드시 그 업보를 되돌려받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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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외출하여 하필이면 나와 같은 인간종의 더러운 꼴을 많이 접한 하루였습니다. 님들은 모쪼록 이런 더러운 꼴을ㅡ우연이라도ㅡ접하지 마세요. 혹, 접한다 하더라도 얼른 그 자리를 피하세요. 당신의 공중윤리와 선한 의지는 악인을 구제하는 게 아니라 악인이 주인공인 나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대개는 그렇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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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를 비난하는 잘난 사람들 또한 어제와 같은 오늘을,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아갈 뿐입니다. 기죽지 마세요. 존재론은 칸트로부터 개인의 심각성이지 국가나 인류의 문제의 아닙니다.
푸! 나 정말 방금 나경원 따위의 이름을 다시 올렸다가 곧바로 튕겼어요. 선거철이기는 하네요. 한동훈 씨가 이재명보다 좋은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재명이가 너무너무 싫어서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결국 윤석열이를 뽑았어요. 죄송합니다!
이오니아 사람 중에서 플라톤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참 좋아했지요. 니체도 좋아했고 들뢰즈도 좋아한 사람, 헤라클레이토스!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그가 남긴 이 말은 좋아합니다. "소멸하는 것들은 불멸하는 것의 삶 가운데서 죽고, 불멸하는 것은 소멸하는 것들의 삶을 산다." ㅡ헤라클레이토스, 딜스-크란츠 분류의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 모음집
에서 연세대 철학교수 박동환 선생님의 번역을 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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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그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우습제?
내가 느그의 타고난 성품을 잘 안다. 토달지 마라. 느그 자식은 앞으로 개씹될 거다.
업karma(바로 니들이 줄기차게 말했던 '노력 끝의 결과')이 당장 네게서 해소된다 착각하지 마라. 관두자.
*만약 한국이 망한다면 뿌리 깊은 이씨 조선조의 서열문화가 한몫을 했다는 걸 니들은 죽는 순간에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미친 씨발련들은 그걸 페미니즘의 부재였다고 말하겠지.
물질(형상)의 시간은 현상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멀다. 진짜로 어마어마하게 멀어서 형상은 늘 현상을 압도한다; 그런데 바로 이걸 극복해야 한다: 형상은 항상, 죽을 때까지 존재자의 꼅데기일 뿐이며, (ᆢ)이러니까 바로 플라토가 튀어나오지? 푸!
진짜 철학자와 가짜의 차이가 뭔 줄 아냐? 진짜는 의사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행복(나도 너를 건드리지 않을 테니 너도 제발 나를 내버려 두라!)하게 살 수 있다. 단, 처자식이 있으면 문제는 달라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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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마시지 않았고 잠이 안 와서 몇 자 적습니다. 돌비님의 념글 문제 제기와 잘 어울리는 소설책이 있습니다.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지옥은 신의 부재'라는 단편인데요, 읽지 않으셨다면 꼭 한번 읽어 보십시오. 함께 수록된 나머지 중단편 모두 수작입니다.
믿음(또는ㅡ종교적ㅡ이념)을 제거한 신의 모습은 잔혹하고 억압이기만 할 뿐이죠. 자본제에서 돈, 국가권력 또 법이 바로 신의 현현입니다. 이번 의사파업 사태도 국가와 법이 키우고 부추긴 거라 저는 확신합니다. 재판관을 비롯한 법조계가 학연 혈연으로 맺어진 엘리트 카르텔에 의해 의사의 기고만장을 공적 영역에서 확신하게 만든 거죠. 한국사회가 망한다면 그 책임의
팔할은 법조인, 특히 재판관에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국가를 움직이는 각 직능별 역할이 계급화라는 이씨 조선조 반상문화에 잠식 당해 어느 한구석 제대로 작동하는 곳이 없는 한국사회입니다. 여기까지 온 게 기적이 아니라면 미국이란 초강대국에 줄을 잘 선 까닭인데, 이제 그 운은 다해 갑니다. 스스로 체제를 만들고 이끌어 갈 능력이 없는 자들의 공동체였습니다
법원에 가보신 일이 있나요? 아니, 재판을 받아본 적이 있냐고 물어야겠군요. 죄형법정주의에 따라서 재판관은 죄인의 죄에 대한 적당한 형량을 조율해 내는 게 그 역할의 전부인데, 자신이 마치 신인 양 온갖 훈계를 덧붙입니다. 그것도 아주 유치한 수준의 말로써.
대개의 재판관은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말을 논리의 달인 흉내를 내면서 철학교수(수리논리, 기호논리학 전공자)를 가르치려 들지요. 물리적 증거로서 드러난 죄에 기반한 설명은 애시당초 논리일 수가 없습니다. 선언이죠. 이들은 침묵하는 철학교수 앞에서 맘껏 법리를 자랑하는 데, 철학교수가 침묵하는 까닭은 단지 죄를 지었을 뿐이고, 국가가 재판관에게 위임한 처벌권
에 동의하는 것일 뿐, 재판관의 어줍잖은 말장난에 수긍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때(학력고사 세대)만 해도 서울대 법대나 공대를 의대보다 높게 치거나 동등하게 여겼지요. 그러나 오늘날은 지방 의과대학보다도 입결이 낮은 서울 공대, 인문대라고 합니다. 서울법대 출신의 재판관이나 검사가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서, 마치 본인이 국가권력 그 자체인 양 기고만장하는
꼴을 반백년 동안 지켜본 한국인들이 이제는 법대생보다 수능성적이 높고 몇 배로 열심히 공부(수능=공부)한 의대생 자제를 법조계에 있는 이웃사람 아이들에게 꿀리게 만들 까닭이 없죠. 법과 체제, 사회이론은 그러니까 저기 무지렁이 아낙네들부터 권력의 정점에 선 자까지, 모든 사람의 경험과 일상으로부터 구축되는 겁니다. 그게 다시 무의식화하여 관습으로 자리잡는
거죠. 얼마전 의사들 몇몇에게 형 집행유예 선고를 하면서 재판관이 의사들을 훈계하였다던데, 재밌는 건 그 훈계를 들은 의사들이 재판관을 비웃었다는 것. 물론 대놓고 비웃었을 리는 없죠. 법정 안의 재판관은 국가의 대리자이니까. 하지만 조금만 신중한 재판관이라면 의사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조소의 눈빛과 냉소의 입모양을 눈치챘을 겁니다. 둘 간의 우월성 투쟁에
따른 긴장감이 느껴지나요?
2000년초 김대중 개새끼가 의약분업을 실시한 것으로부터 의료수가 불균형 문제, 의료보험(공단) 재정 파탄, 환자의 과잉진료의 문제가 발생한 겁니다. 미국처럼 미트에서도 웬만한 약을 소비자가 직접 구입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2000년 의약분업 이전의 모습 그대로 놔두었다면 감기나 두통 따위로 병원 대기실을 가득 메우는 오늘의 이 난장판이 발생할 리 없었겠
지요.
*미트=> 마트mart.
중세에 신에 지배했던 신본주의를 지나 산업혁명으로 인본주의가 생기고 자본제가 꽃피웠는데, 자본제가 신의 현현ㅋㅋㅋㅋㅋ "미국이란 초강대국에 줄을 잘 선 까닭인데?" 그럼 중국은 미국이라는 줄을 안섰는데 경제대국2위는 어떻게 설명할수있을까. 자신의 무능함을 한국에게 투영 "이끌어 갈 능력이 없는 자들의 공동체였습니다?" 민족주의라는 인종에서도 사회에서도 소속감이 없는게 공동체를 논함?? 코미디 하노 "법원에 가보신 일이 있나요? 아니, 재판을 받아본 적이 있냐고 물어야겠군요." 넌 법원운운하기 이전에 법철학이나 돌아봐라.판사의 주관성에 대해서 말할거면 기술의특이점이나 돌아보고
49/ 중세의 신본주의는 말 그대로 신이 현상의 주관자이자 실체 자체(절대적 가치)라서 앎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자 내 삶의 무조건적 주관자일 뿐이지. 산업혁명으로 인본주의가 탄생했다는 말은 그걸 이태리의 르네상스 즈음으로 출발점 삼는가 아니면 말 그대로 영국 산업혁명(증기기관 동력의 산업화)을 기점으로 여기는가에 따라서 시기적 맥락이 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라는 것이 산업혁명과 맥을 같이 하여 발달했다고 할 때, 신본에서의 신이 인본에서의 돈이나 또 다른 상징권력으로 넘어간 것은 아닌지. 왜냐하면 인간의 종교적 습성은 문명기술의 비약적 발전기마다 이름을 달리하며 특정 상징권력을 만들어 냈으니까. 태초에 말logos로써 있었던 신은 어느덧 문자로 있게 되고, 그런 문자를 발판삼아 교부의
권위는 공고해졌으니. 또는 영토와 혈통을 승계한 왕족과 귀족을 대체하여 신 부르조아neo bourg 세력으로서 자본가가 득세하면서 그들의 부capital가 또 세습된다 할 때, 그 자본의 태생적 존재 위치(결정론적 세계관)를 얼마든지 중세의 신god으로 등치시킬 수 있는 것.
오늘날 우리가 묻고 따져야 할 것은 신god과 돈money라는 이름의 서열이 아니라 내 삶과 당장의 일상을 누가 더 억압하고 있냐는 것. 누가 더 권력적으로 작동하고 있냐는 것.
중세 이전 동/서양이 분리된 사회였을 때(그때도 왕래는 있었다. 하지만 육상은 천산산맥과 사막으로 막혀 왕래가 수월치 않았다. 문명간의 교류는 있었으나 문명의 교차나 재문명화는 없었다) 동과 서의 문명사적 발달 정도와 부의 단순 비교는 순전히 거시경제학자의 난센스일 뿐이다. 동서양 교류 이전 부의 상징이었던 청자와 비단 향신료는 상대적 가치일 뿐, 그 사회
내에서의ㅡ부의ㅡ척도가 되지 못했다. 희소가치의 원리에 의해서 이질적인 것들이 각(동/서양)세계의 권력자에게서 소용되었을 뿐. 이게 최소한 중간계층에게 보급화하여야 문명교류란 말이 성립한다. 지니china는 본디 땅이 넓고 자원이 많아서 인구수가 웬만한 서양제국 전체를 압도했고 그러한 지리적 이점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자원과 인구는 자본의 모태인 바, 기껏 1776년에 국가독립을 선언한 신대륙의 모든 지리적 이점을 감안하더라도 중국은 결코 호락호락한 대상이 될 수 없는 유서 깊은 문명 대국이다. 그에 비해 한반도의 역사는 너무나 초라하다. 이 초라함을 극복하려고 거짓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게 바로 한국사이다. 국사 이전에 세계사적 감각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적확한
역사를 쓸 수 있다. 중국이 그 타고난 자본 또는 하부구조infra에도 불구하고 신흥국 미국보다 못 사는 까닭은 그들의 오래된 문화적 병폐, 특히 동양의 서열문화와 이종교배한 마오이즘 때문이다.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덧붙입니다: 비단과 향신료, 청자 등은 당나라에서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귀족의 사치품이 맞습니다. 그러나 중간 계층의 관료나 상인들 또한 향유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가치가 보전될 수 없지요. 하나의 고립된 문화권에서 인정받는 귀한 물건이 사막과 산맥의 벽을 넘어 이질적인 문화권에 수용될 때의 절차 또한 이와
같아서 귀족의 입소문에 오르내리는 이국의 물건은 반드시 대중화를 거친 뒤에서야 문화(사)적 가치로 인정받습니다.
'민족(주의)'이라는 말(개념 아님!)이야말로 근대라는 개념으로부터 그 이후에 만들어진 말이고, 한반도는 일제의 영향이 절대적인 말입니다. 백의 민족이니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니 하는 말들 전부 역사적 근거없는 헛소리입니다. 이씨 조선이 성리학자인 정도전의 건국이념에 따라 천자국(대명제국)의 신황제인 주원장과 궤를 맞추어 스스로 기자조선 후손의 제후국을
자처하여 성립된 국가체제인데 '한민족'이란 말은 이씨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혀 가능하지 않은 동족주의(;론)입니다.
※다시, 전혀 가능하지 않은 '공동체 이론'입니다.
법철학은 엄밀히 말해서 철학이 아닙니다. 정통철학이 아니거니와 그것은 철학(형이상학: 존재론<=>인식론)이라는 본질에서 삐져나온 하위 분류라서 철학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만, 그걸 철학으로 인정하더라도 법철학은 체제학(실행의 학)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많은 태생적 모순을 안고 있어서 형이상학과 가장 먼 지점에 있습니다; 당장 보십시오. 49님은 법철학을
말하고 법관(판사라는 말부터 잘못되었다. 관료는 선비가 아니다!)의 절대적 권능을 말하지만, 작금의 기술만능시대에서 그들의 초법적 권력(=국가권력)이 언제까지고 영원할 리 없죠. 기술은 국가체제를 압도하는 진짜로 초월적인 문명(발전)의 원리입니다. 법은 그 초월적 사태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방어하려는 인간의 마지막 발악 수단이지요.
법은 항상 법을 실행하는 행위자의 편이라는 점에서 애시당초 보편학(존재론<=>인식론)이 될 수 없습니다. 법철학이야말로 진짜로 최근래에 만들어진 근거없는 학문이지요. 다시 공부하십시오. 플라톤과 교부철학, 데카르트와 칸트, 니체와 하이데거 누구도 법철학과 별 상관없습니다. 시간나면 칸트의 법철학과 한스 칼젠을 읽어 보십시오.
법은 문자이고 형식(사회적 약속)이지 재판관의 권력이 아닙니다.
※선비=학자/관료=체제의 꼭두각시.
ㅋㅋ 49련 호기롭게 댓글달았다가 개털려서 승천했노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모든 걸 상세히 따지고 들면 반드시 원인은 드러납니다. 이승만 정권의 초기 헌법학자들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였다면 오늘날 젠더갈등과 불평등의 많은 부분이 절로 해소되었을 겁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는 데 이걸 개선하려는 정치꾼이 있을 리 만무하죠. 낱낱의 부조리를 모조리 파헤치고 그 발생 지점을 따라가는 것이
본디 철학의 임무였습니다. 그래서 철학은 원인학이라고도 하죠. 이걸 방기한 채 이재명파, 문재인파, 윤석열파로 나누어 정치놀음이나 하고 자빠진 게 작금의 한국 강단철학입니다. 다행히 2030세대에 의해 점진적으로, 그러나 놀랄 만큼 각분야에서의 인식전환 행동전환이 이루어져 가고 2030 철학전공자들에 의해서 한국 서양철학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씻고 영화관에 갑니다. 파묘가 개봉하는 날이거든요. 첫 상영관에서 보고 오려구요. 모쪼록 견디어 내십시오. 나는 부조리와 불평등 앞에서 찍소리도 못 내고 오히려 그것에 동조하면서 산 죄많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2030 님들은 다르더군요. 님들이 한국사회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40506070개새끼들보다 부디 오래 사시어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어 주십시오.
신에 대해서가 논점인데 125는 논점이탈은 기본이고 이거말하다가 저거말하다가..잘못된 단어사용에 문맥에도 안맞는 소리에 확고한신념(망상) 그냥 조현병같음 병원을 가봐라
나는 나의 논리를 설파하고자 댓글을 쓴 게 아닙니다. 뒤져보면 알겠지만 나는 주장하는 것이 없어요. 차라리 무조건적 비판 뿐입니다만(여기에 항상 '태생적 부조리, 불평등'이라는 조건을 달지요), 목적은 뚜렷합니다. 제발 "니가 아는 만큼만, 너의 현실답게 생각하고 나대라"는 겁니다; 논점일탈이 나의 형식인 것은 사실 내가 말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져요. 말이
죄다 우스워요. 그럼에도 말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이 처지, 성격은 정확히 조현병의 그것입니다.
글쓴이가 말하는부분 "신이 있다고 하여 지금의 세상이 달라질까요? 실제 예수가 존재했다 가정한들 우리의 삶이 달라질까요?" 신이 세상을 지배했던 시대를 중세시대라고 말함. 신본주의사회 산업혁명으로 신을 몰아 내고 신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만들어진게 인본주의사회 오늘날 우리는 개인주의에 초석이 되는것도 인본주의임. "신의 존재의 유무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변화한다면" 만약 천국과 지옥이 있고 날괴롭히는 사람은 지옥에 갈것이고, 선행을 많이 한다면 천국갈것이야. 그렇게 믿는다는 천국가 지옥 더나아가서 신의 의미는그걸로 된거임. 믿어라 구원받을것이다. 단 어떤것을 믿는지가 중요한것이지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들어왔더니 댓글창이 어지럽네요. 먼저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철학은 사람마다 다른 관점에서 해석 할 수 있기에 "정답"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제 글이 너무 추상적이라서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핵심요약글 남기고 가겠습니다.
1. 신이 존재한다고 해서 삶이 달라지는가? -> 현재 신이 존재하거나, 과거에 존재했다고 해서 지금 우리의 삶이 달라질까요? 예를 들어 어느날 뉴스에서 공표합니다. "신은 실존했고 현재 서울에 강림하였습니다!"라고,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 삶은 달라질까요? 무엇이 바뀔까요? 거지에서 부자가 될까요? 없던 힘이 생겨날까요?
아니면 기독교의 말 처럼 앞으로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가고 나쁘게 살면 지옥에 갈까요? 아니면 불교처럼 윤회를 할까요? 어쩌면 사이비 종교의 뜻대로 세상이 미쳐버릴까요? 그건 아무도 알 수 없겠지요. 어쩌면 아무일도 없을 수도 있구요. 우리는 신에 대해 "정답"을 알 수 없기에, 모든 것은 인간의 "추측"일 뿐입니다. 증명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신에 대해 증명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의미부여 하거나, 타인의 말을 믿거나 해야겠지요. 그렇다면, 신의 존재유무와 정해진 삶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종교를 믿거나, 신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는 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도 되는 이유"를 타인(또는 미지의 영역)에 양도한다는 의미가 되어버립니다.
2. 신의 존재 유무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변화한다면 ->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타인(신)에게 맡기고 살아간다면, 신의 존재 유무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지겠지요. 신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내가 믿어왔던 삶'과 실제 신이 말하는 삶이 일치 할 가능성은 몇%일까요? 또는 만약, 신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내 삶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까요?
3. 내가 살아가도 되는 이유는, 오직 나만이 결정 할 수 있다. -> 만약 삶의 의미를 타인(신, 종교)에게서 찾더라도 결국 "그것 또한 스스로 선택한 결정" 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스스로 부여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고자 한다면, 삶의 의미는 타인(신,종교)이 아닌 스스로 찾아야 겠지요.(자유의지)
4. 나은 나약했기 때문에 신을 믿었었다. -> 하지만 스스로 삶을 찾는 과정에는 고통이 동반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약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스스로 견디기엔 버거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아가는 과정에서 잠깐씩 기댈 곳이 필요합니다. "부모님","친구", "선생님", "연인" 그리고 "신"이 되겠지요.
선생님의 말씀처럼 저 또한 과거 자신의 무능, 무력, 불행을 신에게 되돌리며 내면의 안정을 추구하였습니다. 나약했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글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나약하게 태어난다. 누구나 기댈 곳을 필요로 하는 때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신을 믿는 것이 자유의지와 반대되는 행위더라도 신을 믿는 인간의 모습을 이해해야 한다."
"제가 세상에서 살아가도 되는 이유는, 오직 저만이 결정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치는 스스로 부여하는것과 신과 별개의 문제인데. 너가 말하고자 하는건 자유의지에 대한것이지. "하지만 과거의 저에게 있어, 신은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무엇인가를 믿는가? 자신인가? 신인가? 부모인가? 타인인가? 무언가를 믿는게 잘못된 행동이 아닌데. 너가 "ADHD로 인한 깊고 예민한 감수성과, 삶의 진리를 추궁하는 복잡한 성향을 타고난 저는"이런걸 보면 자신의 무능,무력,불행을 신에게 돌리면서 탓하면서 내면의 안정을 가져오는걸로보임. 중세에도 불행한 일이 생기면 신의 벌이다 신때문이다. 신의 탓으로 내면의 안정을 가져 오기때문에, 국가에서도 허락됐던것인데. 너도 다를거없어보임.
49/ 우리의 정신은 아직도 중세를 살고 있습니다. 나의 정신은 미래인이라고 하더라도 시절이 중세면 우리는 중세인일 뿐입니다. 님은 인본이 뭔지를, 자유와 자율, 주체가 뭔지를 칸트에게서 다시 배우십시오. 님의 리포트에 B+ 이상의 논술능력을 부여하는 교수부터 사이비입니다. 님의 교수님께 "철학을 다시 배우라"고 내가 말을 전합니다. 아비도 자식도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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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하, 도대체 어디서 이런 사이비 악당들이 자꾸만 태어나는 거지? 잘 들어 개새끼, 칸트는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설명한 일이 없다. 신 존재 증명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니가 좋아하는 논리로 따지면, 당장 '신 부재의 증명'이 요구된다. 제발 쫌 아는 만큼만 나대라!(아, 이게 그의 아는 만큼인가?) 아무튼 칸트는 신의 존재론적 증명 대신에 '내 마음
의 가치(도덕법칙)'로서 신의 존재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 칸트는 차라리 기왕의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모든 신을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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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있는거랑 신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이랑 내가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거랑 내가 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거랑 아무 상관 없지요
철학갤이라고 해서 와봤는데 석사 수준도 안되네
인터넷이 그렇지
니가 무시하는 석사 수준 말고 너의 박사학위 수준을 조금만 알려줘.
맛보기로 올리되, 내가 한 시간 내로 네 댓글에 적절한 토를 달 수 없으면 니가 이겼다; 너의 모든 지식: 미적분, 영-독-불-서-라 모든 (수학)언어의 공격을 허용한다.
이런글보면 조금 답답해지지만 참아야지
너는 무슨 시원한 방편을 알고 있냐? 꼭 답글 달아놔.
니가 철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조금은 인정하되, 니가 철학 석사 학위자라면 너의 수준을 내게 반드시 드러내야 한다. 니가 쓴 박사학위 논문을 드러내면 정확하다.
웃기는군...
나는 본디 웃기는 놈이니까 다 필요없고 니가 답답한 문장만 얘기하고 꺼져.
웃기는군...
나는 본디 우스운 새끼라서 나이 오십을 처묵고도 니들에게 항상 당하지. 그런데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 말의 무엇이 틀렸는지를 철학 석사적 관점에서 정확하게 지적해야지만 비로소ㅡ진정한 ㅡ철학담론은 가능하지 않는가.
웃기는군...
음ᆢ님의 짐작이 그럴 수도 있겠군요. 님이 거듭하여 본 내가 "웃기는" 대상이라면, 나는 정말로 웃기는 '놈(병신)'이 맞습니다.
웃 병
ㅋㅋㅋㅋㅋ 웃기는군이래ㅌㅋㅋㅋ 에휴
실존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