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는 결국 온전한 타자가 될 수 없기에,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1. 신이 되거나
2, (기억안남. 공감과 소통....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몇년전에 논술입시 준비할 때 배웠던 내용인데 기억이 안 나네요,,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들어서 오래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문득 2번이 기억이 안 나요 ㅜㅜ
철학 갤러리가 있어 혹시나 해서 여쭤봅니다 ㅎㅎ.,,
뭐든 관련된 댓글이면 환영합니다!
주체는 결국 온전한 타자가 될 수 없기에,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1. 신이 되거나
2, (기억안남. 공감과 소통....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몇년전에 논술입시 준비할 때 배웠던 내용인데 기억이 안 나네요,,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들어서 오래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문득 2번이 기억이 안 나요 ㅜㅜ
철학 갤러리가 있어 혹시나 해서 여쭤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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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성에으 이론화는 헤겔부터라 보고, 주체를 저렇게 타자성의 나머지라 본 건 최소한 레비나스부터 아냐?
솔직히 이렇게 말하니 잘 모르겠다. 범위가 너무 커진 거 같은 느낌이들어.ㅎㄷㄷ
신 얘기 나오고 타자성의 이해의 조건 같은 거 나오니 임마뉴엘 레비나스 찍는다.
엠마뉴엘(또는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 듯합니다. 왜냐하면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라고 유명한 임마는 한 사람 뿐입니다.
헷갈릴 수 있습니다. 나는 임마뉴엘 칸트를 엠마뉴엘 칸트라고 말한 까닭으로 한동안 조롱거리가 되었지요. 사실ㅡ그때의ㅡ나는 칸트를 아예 몰랐던 겁니다. 그런데 레뽀님은 레비나스를 잘 아네요.
그렇게 주장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타자의ㅡ존재ㅡ이해 불가능성을 주장한 유명한 사람은 하이데거나 레비나스 쯤이 되겠지요. 님께서 말씀하신 명제 2의 공감과 소통의 적극적 요청이라는 측면에서는 레비나스가 하이데거보다 더 가깝고, 명제 1의 완전한 타자적 측면에서는 알랭 바디우라고 또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가 있습니다.
※※알랭 바디우란 사람에게서 완전한 타자(의 세계)는 수학입니다.
※"주체는 항상 온전한 타자(절대타자=대타자)의 바깥(잉여)의 문제이고, 또한 절대로 타자들의 실체를 헤아릴 수 없다." 예, 레뽀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확하게 엠마뉴엘 레비나스의 말입니다.
58.29/ 위에 남깁니다.
58/29. 레비나스의 소논문이 바로 그 주제인데 필사노트를 찾고 있습니다. 아니면 프린터물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하, 도저히 못 찾겠습니다. 아마도 방장님의 물음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이 담긴 레비나스의 텍스트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이지 싶습니다.
잠시만요. 계속 찾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게 순수이성비판의 요지입니다.
포기: 라면박스에다가 쟁여놓은 노트가 솔직히 양도 많고 사이사이 좀약도 쑤셔 넣어서 박스 하나를 뜯는 것조차 고역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필사를 했되, 내가 지금 당장 설명할 수 없는 건 나의 앎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제가 가뜩이나 비위가 약한데, 수 년, 또는 십수 년 묵혀둔 노트를 다시 꺼내어 좀약 냄새와 곰팡이 냄새를 맡는 게 지금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차근차근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여 언제 한번 박스 정리를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댔습니다.
아직 술이 남았고 이제서야 조금 진정이 되는군요. 다시 찾아 볼게요. 반드시 님이 원하는 바로 그 자, 그 글_그 문장(원문text)을 찾아내겠습니다!
네. 수고하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