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견이 모잘라 무식한 질문일 수 있지만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아 질문 드립니다. 불교를 싫어하지도 않고 자살을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단순한 궁금증입니다.
1. 불교에서 인간은 죽어서도 환생한다는 전제를 갖는다. 집착에서 벗어나 생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만약 환생한다는 전제가 틀렸다면, 즉 인간은 한번의 인생만 사는 유물론적 존재라면 열반이라는 개념이 자살과 다를 것이 무엇일까?
2. 불교에서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하는데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 목적을 위해 잘못된 수단을 쓰는 것이 집착인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 속에서 고통이 있다면 그것 역시 집착인지, 집착이 악이고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집착을 끊는다면 그 세상은 아름다운 것인지?
3.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살은 나쁘다.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 자살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 식의 설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살을 하지 않을 이유를 설명 할 수 있는지?
4. 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과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자살 ( 전태일, 노무현 ) 을 같은 행위라고 볼 수 있는지?
1. 불교에서 인간은 죽어서도 환생한다는 전제를 갖는다. 집착에서 벗어나 생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만약 환생한다는 전제가 틀렸다면, 즉 인간은 한번의 인생만 사는 유물론적 존재라면 열반이라는 개념이 자살과 다를 것이 무엇일까?
2. 불교에서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하는데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 목적을 위해 잘못된 수단을 쓰는 것이 집착인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 속에서 고통이 있다면 그것 역시 집착인지, 집착이 악이고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집착을 끊는다면 그 세상은 아름다운 것인지?
3.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살은 나쁘다.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 자살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 식의 설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살을 하지 않을 이유를 설명 할 수 있는지?
4. 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과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자살 ( 전태일, 노무현 ) 을 같은 행위라고 볼 수 있는지?
1. 유물론적 세계관에서는 열반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습니다마찬가지로 유물론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에게 영혼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으니 동물이나 인간이나 별 차이 없는 것이겠죠2. 집착이란 갈애(육체적,정신적 갈증)가 원인이 되는 것으로써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나 고통이나 기타 등등이랑은 아무 연관이 없읍니다그리고 불교에서는 갈애가 원인이 되는 집착과 원을 구분하고 있읍니다3. 자살은 하던지 안하던지 자유입니다단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자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이죠4. 자살을 하는 목적에 따라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행위가 같다고 그에 따른 가치판단까지 같지는 않겠죠
불교는 윤회를 부정합니다. 당연히 환생 같은 것은 없습니다. 석가모니가 불교 철학을 만든 것은 당시 인도 종교, 철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브라만교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입니다. 브라만교에서는 전생의 업으로 인해 현생이 되었고, 후생을 위해 현생에 말 잘듣고 착하게 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인도 민중들은 미래의 삶을 위해 현생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쾌락을 거부하고 희생만 하며 삽니다.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이죠. 또한 낮은 카스트로 태어난 것 조차 우연이 아닌 전생에 자신이 저지를 잘못 때문이라는 숙명을 강요 받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석가모니는 제법무아, 즉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다. 영혼 같은 것도 없다. 정신은 몸에 속박된 현상이고 몸이 죽으면 생은 끝나는 것이다.
세상에 불이라는 실체는 없다. 나무에 붙어있는 불은 장작불이라고 부르고, 지푸라기에 붙은 불을 섶불이라고 부른다. 즉 재료가 중요한 것이지 불이라는 실체는 없는 것이다 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환생도 없고, 전생도 없고, 후생도 없으니 현생을 있는 그대로 영위하고 충실하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열반, nirvana는 산스크리트어로 '불어 꺼지다'라는 뜻입니다. 촛불을 불어서 끄는 것을 말하죠. 그 자체로 죽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집착의 불을 꺼서 집착으로 부터 벗어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열반에 죽음이 결부될 이유는 없습니다. 4성제는 일체개고, 제법무아, 제해무상, 열반적정을 말하고, 여기서 말하는 열반적정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은 상태를 말합니다.
당연하게도 자살을 좋게 보는 문화권은 없습니다. 그것은 동양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렇다고 전 세계가 같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기독교처럼 완전한 금기는 아닌듯 합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에피쿠로스 학파 같은 경우에는 자살을 완전한 금기로 여기지는 않았던것 같습니다. 특히 여씨춘추에 나온 양주학파 자화자의 말은 자살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그는 삶을 네가지 등급으로 구분하는데 첫째는 온전한 삶, 두번째는 부족한 삶, 세번째는 죽음, 네번째는 핍박받는 삶으로 평가합니다.
또한 에피쿠로스 학파의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보면 "죽음은 근심 걱정에 빠진 사람을 제거해서, 더 많은 불행을 더 겪을 수도 있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라고 썼습니다. 양주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자살을 선택가능한 한가지 옵션으로 보는 셈이죠.
그런데 이런 관점은 사회적으로 큰 시련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와 같은 사회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관점에서는 자살만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죽음이야말로 사람들을 억누르기 좋은 최고의 도구인데, 사람들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그 사회에 기득권이 설 자리가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까지 불교에서 윤회와 환생이 회자되는 것은 세가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으로 판단됩니다. 첫번째는 석가모니가 살아 있을 당시 분위기 입니다. 그 당시에 모든 민중과 기득권, 종교지도자의 사상은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윤회와 환생이죠. 그런데 거기다가 윤회와 환생은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면 민중을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싸우자고 덤비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가르침으로 둘러서 말합니다. 그 이유로 초기불교, 나가르주나 이전의 불교는 상당히 브라만교 적인 요소가 섞여 있었다고 봅니다.
두번째는 번역 문제입니다.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왕왕 오역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특히 초기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경전을 해석했던 사람들 중에 불교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높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껴 넣기도 합니다. 토속 신앙 적인 것들도 들어가기도 하죠. 예를 들어 인연론이라고 하는 것도 원전에 따르면 인연이 아닌 연기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 입니다.
세번 째는 경제적 문제 입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대로면 불교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모두 마음으로 수양하면 됩니다. 책 사서 보고 공부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윤회나 지옥같은 개념이 껴들면 종교가 되고, 종교가 되면 돈이 모입니다. 그래서 법정스님 설법을 보면 윤회나 환생은 없다고 딱잘라 말합니다. 하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종교화 되지 않았다면 현대에 까지 전달되지 않았을테니 너무 탓하기는 어렵겠죠.
같은 행위라는거 자체가 허상인데스 세상에 같은 인간은 없는데스 a의 자살과 b의 자살은 전혀 같지 않은데스 어느누구도 어느누구를 이해할수 없는데스 자살앞에서 무한히 침묵할수 있을 뿐임
자살이 옳다 그르다' 설명해봐야 다 헛짓거리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려면 타인이 되어봐야함. 근데 어느누구도 어느누구의 입장이 될수가 없기에 걍 먼발치에서 신비롭게 관찰하거나 걍 자살하지 말라고 종교인이나 어른인척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