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계산적으로 살지 말아라, 관계에 있어 니가 얼마나 줬니, 내가 얼마나 줬니 따지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볼 때 그 말은 좀 더 세밀하게 진술 될 필요가 있다.

계산적으로 살지 말라고 한다면, 여기서의 계산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돈 계산인가? 시간 계산인가? 에너지 계산인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반드시 ~ 해야 한다' 등의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당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잘 살아보기 위해서 당위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논의를 할 때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얼마나 긍정적 영향을 주는지를 기준으로 당위의 정당성 여부를 따져야 한다.


이제 그렇다면 계산이라는 것의 범위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관계 맺음에 있어서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즉 계산 없이 관계를 맺는가? 그게 가능한가?

만약 주기적으로 남편에게 물리적 학대 당하는 여성에게, 이미 결혼을 한 상황이니 얼마나 맞았는지에 대해

따지지 말고 관계를 지속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납득하기 힘들다.

이런 당위는 개인과 공동체적 삶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보기 힘들다. 


만약 어떤 부부가 있는데, 남자는 여자한테 돈도 가져다 바치고, 명품백도 가져다 바치고, 아파트도 가져다 바치는데

여성은 아무런 것도 제공하지 않고 그저 남자의 것을 누리기만 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계속 다른 남편들과 비교하고

가스라이팅을 해서 심리적 고통을 준다고 해보자. 이런 관계는 정당한가? 따질 것도 없다. 정당하지 않고, 따라서

파기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준 만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듯 보인다.

그래야 공동체 질서가 유지되고, 사회가 유지되고, 개인의 행복이 보장된다.


이렇게 '상호성'을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주고 받았는지 '계산' 하는 것도 당연히 따라온다.

그럼 그 계산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준이 되는 요소가 적어도 하나 있어야 한다. 


돈? 희망? 재미? 정보? 지식? 지혜? 용기? 이것들 중에서 무엇을 교환하는가? 어느것이든,

상호간의 합의가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합의는 실제로 당사자들에게 좋은 것이어야지

당사자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만약 인식에 기준을 둔다면

사기 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돈보다는 희망, 재미, 용기, 격려, 우정을 귀중히 여기고 그것들을 주고 받는 사회가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정서적으로 만족스럽고 결속력이 강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 여기서 줄이자.


친구 관계나 연인 관계에서는 기쁨, 희망, 관심, 위로, 재미, 공감, 크고 작은 도움. 이런 정서적인 부분을 많이 주고 받는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더 많은 것을 제공하거나, 다른 한쪽에 피해를 준다면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고 

이런 것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오해가 있을 수 있어서 말하지만 '제공' 이라는 것을 꼭 '현재' 기준으로 볼 필요는

없다. 과거에 친구가 나를 즐겁게 해준 것이 있고 그게 추억이 되었다면 그것도 일종의 가치가 제공된 것이다.

왜냐면 추억이란 여유가 있을 때 마다 상기하면서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런 추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일 

수록 만족감은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 관계나 연인 관계는 애당초 당사자간의 임의적 합의, 만족감 등 추상적인 것에

그 존립을 의존하기 때문에, 이런 균형이 깨질수록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진다.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경제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들을 주고받아야 한다. 이것이 깨지면

바로 소멸된다.


가족 관계는 위에 언급한 것들과 사뭇 다른 특징들이 있다. 그것의 존립이 발생 이후로 영원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낳은 자와 낳아진 이의 관계는 낳은 자가 있었기에, 낳아진 자가 있다는 식의 '두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로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 연인, 비즈니스 관계는 그렇게 설명이 안된다. 서로가 없어도 존재할 수는 있다. 그러한 관계들은 우연한 만남에 의해, 임의적 합의에 

의해 성립하므로 개체의 생애주기에서 우연하게 단절될 수 있는 관계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친구, 연인, 비즈니스 관계는 '내용' 이 본질을 구성하고 가족 관계에서는 '형식' 이 본질을 구성한다.

친구, 연인, 비즈니스 관계는 내용에 따라 존립이 결정되기도 하고, 관계 유형이 바뀔 수도 있다. 반면 가족 관계는

어떤 개별적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형식 자체가 부정되거나 변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가족들 사이에는 상호성이 필요 없는가? 그렇지 않다. 생물학적인 부모-자식 관계라는 사실 하나로부터는

부모는 그 어떤 권리도 요구할 수가 없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상식적인 규칙에도 부합하지 않고,

하나의 인간이 다른 인간의 도구처럼 사용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예를 들면 자식을 낳아놓고 영양 상태도, 학습 상태도 방치해서 

자식이 사회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그저 생물학적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에게 이것 저것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또한 생명을 주었다는 것을 근거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상호성에도 어긋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제공한 것을 대가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암묵적이든, 그렇지 않건 양자가 서로 합의한 일종의 '계약' 에 근거를 하는데, 그 계약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건 낳아진 이는 낳은 이와 계약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의식도 없던 시기에 무슨 계약이란 말인가?

불공정한 계약을 지킬 의무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학습, 생활 태도와 습관 등 양육과 관련된 것들은 그가 '보호자' 이기 때문에 

주장 될 수 있는 것이지 고정 불변한 생물학적 관계에 따라 주장 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러한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 역시 그것의 형식이 아닌 내용물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며, 피 보호자가 보호 받아야 할 상태를 벗어나기 전 까지만 

성립한다는 점에서 일시적 관계다. 따라서 보호자가 보호자로써 기능하지 못한다면, 그건 보호자-피보호자 관계가 아니며

보호 받아야 하는 상태를 벗어났다면 더 이상 간섭할 수가 없다. 그리고 보호자로써 준 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그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럼 보호자 역할 하는 사람은 무슨 득이 있어서 그 지랄을 한답니까?"


양육한 것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순전한 도덕심이나 생명을 양육하겠다는 이타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득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을 것이다. 보호자나 피보호자나 둘다 인간이고, 서로 득을 위해 그렇게 행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시 '계약'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지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이와 제대로된 거래를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이는 상황 판단이나 제대로 했는가? 아이에게 '선택권' 이 주어졌는가?

모든 물음에 대해 답은 '아니요' 이다. 애시당초 불공정한 계약이 무슨 효력을 가지는가? 검은 속내를 밑바탕으로 진행된

계약은 지킬 가치조차 없다.


따라서 보호자 입장에서는 '태어나게 해주었다' 는 것 이외에도 '키워 주었다' 는 것을 근거로 보답하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교문화에서 강조하는 효도는 어떻게 취급해야 할까?

이 과정에서, 보호자-피보호자 관계의 '내용' 이 그 효력을 발휘할 것인데 보호자가 피보호자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대우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이 핵심이다.


피보호자는 양육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제공 받은 것들에 대해서는 본인 재량에 맞게 마음대로 보답하면 된다. 왜냐면

보호자가 애시당초 대가를 바라지 않고 피보호자에게 '보호' 해주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육 과정에서 필수적이지 않지만 '부차적'으로 제공 받은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상호성의 원리에 의해

보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


보호자가 피보호자를 생각해서 삶에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멋진 옷을 사주었다던가, 

보호자가 피보호자의 감정을 알아채고 위로를 해주었다던가,

보호자가 피보호자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주었다던가,

보호자가 피보호자에게 필수적인 교육 이상으로 무언가를 해주었다면 그것은 보답되어야 한다.


하지만, 피보호자가 보호자에게 필수적인 영역에 대해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은 순전히 피 보호자의 자율의 영역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실의 영역' 에 속할 문제이지, '당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피보호자는 보호자가 1) 키워주었고 2) 생명을 주었기 때문에 보답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보호자와 피보호자 사이의 유대관계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다면 피보호자는 보호자에게 베풀고자 하는 욕구가 있을 것이고,

그 욕구에 따라 '자발적'으로 보호자에게 보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보호자가 '키워준 것', '태어나게 해준 것' 에 대한 보답은 

'의무감과 당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호자와의 추억, 그들에게 느끼는 감사함, 은혜. 등등 이런 것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움직여 지는 것'이다. 


즉, 추억도 감사함도 은혜도 없다면 피보호자는 '키워줌', '생명 제공' 에 대하여 보답 안하면 된다. 거기에 대해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다. 그건 그냥 의무다. 물론 교육, 정서, 영양 상태에 대하여 '필수적인 것 이상' 으로 해준 것에는 보답해야 한다. 

그건 당위의 영역에 속한다.


이렇게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관계들 몇 가지를 검토해보았고 상호성, 관계의 존속조건, 관계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래서 '계산적이 되지 말아라'는 것은 어떤 말인가?

사람들이 바보라서 상호성 따위는 성립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한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사람이 참 계산적이다' 라는 말은 오히려 '계산의 도리를 모른다' 고 바꿔 진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 계산적이라고 말하는 경우에, 나는 항상 '현재 혹은 미래에 도움이 안되면 칼 같이 손절하는 사람' 

에 대해 그런 수식어가 붙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호성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계산적이지 않다' 는 말이 아니라, 

'파렴치한 인간'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많이 보았다.


파렴치한 인간, 그리고 계산적인 인간. 이 둘의 행동 방식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정당화 할 수 있는 수단 한가지가 떠오른다. 

개체의 '통시간적 동일성'을 근거로 정당화 될 수 있겠다.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닌가? 이동 지속 이론을 받아들이는 형이상학자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상식적으로 과거의 나도 역시 나라고 부른다. 그게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통념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정당한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질러놓고서는


"저는 현대 형이상학자들의 '이동 지속 이론' 을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 실존하는 것은 현재이며 모든 사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죠. 

따라서 과거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르기 때문에, 저는 살인죄로 고발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칼에 찔리던 시점의 그 사람과, 

생명 활동을 멈춘 시점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저는 그래서 아무도 죽인적이 없어요" 


라고 말한다면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따라서 내가 과거에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을 받았다면, 그것을 갚아야 하는 것이 도리이다.



결론적으로, 관계에 있어 


1) 서로 얼마나 주고 받는지를 항상 고민하는 것은 계산적인 것이 아니라 '사려 깊은 것'이고

2) 그렇게 처신하지 않는 사람은 '파렴치한 인간'이다. 

3) 계산을 자기 마음대로, 이기적으로 하는 인간은 '계산적인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