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그런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경험과, 그 경험의 주체인 나는 동일한가?
당연히 아닐 것이다. 레스토랑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무언가를 경험할 때도 있다.
만약 나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경험이 같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경험을
동반하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바라보는 경험을 했는데,
그 경험을 할 때의 나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지도 않았다.
이렇게 주체와 대상은 구별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게 된다.
우리는 항상 모든 경험, 감정, 기분 따위의 의식 활동을
어떤 하나의 존재에 귀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의 실체란 '속성들이 딸려있으면서, 궁극의 주어로 기능하고
술어 자리에 올 수 없는 단어들이 지시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는 <형이상학> 에서는 논의를 더욱 발전시켜
질료와 함께 개체의 구조를 구성하는 '형상'이 진짜 실체이며, 정의(definition)의 대상이자 개체의 본질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기 까지 한다.
근대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은 그런 전통적인 실체 개념을 인간의 언어 사용 습관에서 비롯된
착오이자, 실증적 증거가 없는 형이상학적 허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부분은 '주어-술어 구조' 이전에
'객관-주관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 어떤 대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의 전통적 견해에서
시작되서 현재도 정설로 받아들여져 있으며, 그래서 철학자들은 '의식의 지향성' 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전제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심을 둔다.
그렇다면 의식의 대상과는 구별되어 모든 의식 활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의식 활동의 선험적 조건이자, 의식의 내용물들을 담지 하고 있는 '나' 와 대상 사이의 '객관-주관 관계'와
'실체-속성 관계', '주어-술어 관계' 사이의 공통된 구조를 목격하게 된다. 어떤 공통된 구조인가?
부차적인 것이, 핵심적인 중추인 어떤 것에 '딸려' 있다는 구조이다.
이것은 우연인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을 원전으로 접하지는 못했고 여러 2차 자료를 통해
초월적 연역 파트까지만 가볍게 접해서 확언할 수는 없으나, 나는 이것이 칸트가 말한
'종합' 내지는 '통일' 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표상의 잡다가 어떤 하나로 통일되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최 대상이 '무엇'에 속하는지 판단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왜 그런가?
예를 들어서 우리는 사과를 볼 적에 사과의 전체적인 부분을 한번에 볼 수가 없다.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여러 사과의 부분들을 관찰하면서
그것들을 무의식중에 조합하여 하나의 사과라는 대상을 구성해낸다.
순서 t1, t2, t3.... 에 따라 주어진 시각 정보들의 잡다 q1,q2,q3... 가 있다고 해보자.
만약 이것들이 어떤 하나의 대상으로서 통일되지 못한다면, 무질서하게 다른 시간속에 널부러진
q1,q2,q3.... 속에서 그 어떤 것도 판단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판단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인식이 불가능해진다.
여러 표상의 잡다가 통일되지 않는다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는 '개념' 들 역시 추상해낼 수가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개념이란 우리의 의식에 주어진 개별적인 대상들에서
공통점을 추상해내서 나온 공통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하나로 뭉친 것이 없고 무질서하게 널부러진 표상뿐인데, 도대체
어떤 것에서 공통점을 추출하겠는가?
즉 통일이 없으면 대상이 주어지지도 않고, 인식도 불가능하고,
개념 형성도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추론이 불가능하고, 판단도 불가능하고, 인식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정신은 멈춰버린다.
그저 외부에서 주어지는 감각 정보들을 받아들이는, 로봇의 센서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인간의 이성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종합', '통일' 개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개념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추론과 판단을 가능하기 위하여!
결국 실체-속성 관계, 주어-술어 관계, 객관-주관 관계의 공통점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바로 '어떤 하나의 대상에 여러 부분들을 모으는 활동' 에서 그 선험적 구조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여러 표상들을, 하나의 대상에 모으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대상에 대한 판단을, 하나의 자아에 귀속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 정신 활동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고
그것이 필요조건이기에,
우리는 대상을 실체-속성 관계로 인식할 수 밖에 없으며,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적에 주어-술어 관계를 도입할 수 밖에 없으며
우리의 모든 의식 활동은 주체인 나에게 귀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실체-속성 관계, 주어-술어 관계, 객관-주어 관계 이 3가지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근거는
경험 이전에 작동하는 우리의 통일과 종합에 있다!
어렵지 않은 말과 문장으로서 순수이성비판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군요. 님의 주장은 정말로 탁월한 구석이 있습니다. 대단하세요!
Es ist gut 좋다!
인터넷에 "나의 철학(자)적 성향은?" 이라는 질문이 있더군요. 거기 첫 번째 질문이 바로
하나. 지금 먼 산 어딘가에서 나무가 쓰러지고 있다. 그 나무는 지금 내게 실재하는 것인가? 쯤이에요. 저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답을 했어요. 최종결과는 제가 칸트 47%, 사르트르(또는 까뮈: 까뮈가 철학자인가?) 48%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첫째 질문이 바로 칸트의 세계관(대상과 나의 관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있다는 겁니다. 이 질문의 선택지에 따라서 칸트(적) 성향이 거의 좌우되는 듯해요.
*질문=>질문지.
*'드러내게=>"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ᆢ
오호 저도 해봐야겠네요
흐, 해보세요. 문항도 짧고 이름난 철학자들의 세계관을 미리 전제한 것이라서 나름 재밌어요.
내딴에ㅡ나를ㅡ제법 칸트(주의)적 인간이라 믿었는 데, 예상 외로 저는 실존주의자(? 까뮈, 사르트르 따위)와 가깝더군요. 사실 저의 선택은 칸트의 세계관과 다르죠. 저 첫 번째 질문에서 칸트의 세계관이 투영된 보다 엄밀한 대답은, 'ㅡ그것이 실재인지 아닌지를ㅡ나는 알 수 없다'입니다.
어디서 해여?? 링크점
118/링크 https://www.gotoquiz.com/which_philosopher_are_you
안녕하세요 고독사님 58 이에요. 아이피가 바뀌었네요
아, 역시!
역시나 공부하는 사람의 주장은 다르군요. 잘 읽었습니다!
제대로 철학하는 님께 한 곡 바칩니다. 이 노래도 대상 혹은ㅡ자신을 감싸고 있는ㅡ세계와의 마주함에 대한 혼돈을 호소하고 있죠 https://youtube.com/watch?v=BciS5krYL80&si=KVi0eDfDHvekiWv3
저는 콰인 / 후기 비트겐슈타인 이렇게 나왔네요. 다음으로 사르트르 / 카뮈 그리고 칸트. 이런 순서네요. 평소 언어철학이랑 분석철학을 따로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그 사람들의 글쓰기 스타일, 사고방식은 멋있고 굉장한 장점을 가진다고 생각했는데 (간결함, 명료함, 정확도) 이런 결과가 나왔군요. 아마 분석적으로 쓰인 교재들로 공부를 하며 생긴 생각인듯 하네요
끄덕끄덕. 그럴 수 있겠네요. 님의 평소 글쓰기 습관(낱말, 문장들)과 그들이 맞닿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저도 콰인과 비트겐슈타인을 잘 모르지만, 제가 본 님의 성향과 충분히 흡사한 구석이 있습니다. 방금 본문에 올린 pq증명만 보더라도.
콰인과 순수이성비판의 칸트는 다른 점보다 닮은 점이 더 많아요. 증명 형식의(연역적) 절차에 충실하다는 공통점만으로도 더 이상의 잡다 부연을 갖다 댈 필요가 없죠.
콰인과 칸트는 수학적 논리주의에 가깝지만, 따지고 들면 유명론적 입장, 수학적 형식주의의 성향도 많이 깔고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의 철학자를 어떤 사조로 분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냥 논리실증주의니 언어철학이니 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뭉뚱그리는 데 사실 철학이 참 어려운 거예요.
고전 형이상학을 저주하고 혐오한 언어철학이 콰인에게 와서 도리어 플라톤의 부활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이야말로 논리주의의 모태이잖아요. 사실 형식주의자들도 논리주의적 주장으로서 일상을 사는 경우가 많아요.
※칸트의 선험적 종합에서 수학의 경우, 많은 이들이 직관주의라고 생각하는데, 수학에서의 직관주의는 논리주의와 형식주의를 거의 절반씩 깔고 가는 수학 자체의 다른 이름이니다. 수학=직관.(니가 나를 짐작하듯이 나도 니가 무슨 말을 할런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다: 세상은, 세상사람은 니 생각 속에서처럼 그리 어리석지 않다.)
※'니' 말은 틀렸다: 수학의 선험성이 반드시 선험주의의 동기일 수 없으며, 수학과 과학이 인류의 진보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일 수 없다. 인문학은 말과 단어를 가지고 노는 일종의 장난질이지만, 우리는 대상과의 마주함에서, 그런 감성의 형식에서 수학기호보다 언어기호를 더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곧 수학적 직관의 완벽함보다 인간 일반은 언어적 직관의 애매모호를
즐기려는 선천적 유희성이 내재된 듯하다. 놀이하는 존재로서 인간.
*선천적 유희성 '또한' 내재돼 있는 듯하다.
;그래서 칸트의 선험적 종합을 직관주의니 논리주의니 하는 식으로 딱 잘라서 구분할 수 없다. 칸트 또한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폄훼했다. 콰인의 칸트 선험주의에 대한 비판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훗날 자신의 반성을 불러온다.
*1+1=2는 아무런 내용도 없어요. 그 자체로 직관적입니다. 칸트의 명제pq 증명(12범주론)을 다시 배울 것!
※※앗, 58님께 하는 말이 아닙니다!
58/노래 한 더 듣겠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NFI9r1VD-r0&si=SLpzT4LtaUQYIrtG
58님께 또 https://youtube.com/watch?v=lVRoAsCy_sc&si=GNxjJkQ1jznKL_8X
벌써 시간이 이만큼 흘렀군요. 여전한 초저녁이 아니었네요. 저녁은 드셨습니까 58님? 철학 이전에 생명이 있고, 생명 이전에 밥이 있습니다. 꼭 끼니를 챙기세요. ♥+ https://youtube.com/watch?v=zOILAZHf2pE&si=W-e-t1NnC9i-P7DU
네, 밥먹었습니다 고독사님. 고독사님은 식사하셨나요?
저녁 자시고 커피 한잔하면서 들어 주세요 https://youtube.com/watch?v=Dtx2JfFbUSc&si=zvkrQd2f_0TVCkH2
저는 벌써부터 한잔하고 있습니다. 술은 나의 주식이니까ㅡㅡ:
근데 21시 18분에 쓴 58님의 답글을 21시 21분에 다시 댓글을 다는 내가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 하, 참 힘들다 세상 체계라는 것은.
크! 개추박는다 우리의 이성적 능력은 '그럴 수 있는 능력(그렇게 태어났음)'이라는 조건의 발견에 의해서 그 진리가 밝혀졌다!
굿, 바로 그 것!
정말로 굿!
https://youtube.com/watch?v=w46bWxS9IjY&si=1YTYhNckWgTTdwtc
내가 사랑하는 철학하는 사람 58님과 조트 군, 그리고 내 여동생에게.(술 한 병 사올게요.) https://youtube.com/watch?v=v_9HpLRUpp8&si=abvn6M6XKdhFNfoY
저는 좆도 모르는 사람인데도 어떤 심오함이 묻어있네요
이거 예문이 이상한데 기억을 떠올리고 있지 않다고 경험을 안한건 아니잖어.. 밑에는 안 읽음
ㄷㄷ하네..
그 생각은 이미 350년에 쇼펜하우어가 더상세하고 자세하게 생각하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책을 썻음 - dc App
이런 글을 볼 수 있어서 기쁘네요,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