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서 하는 방식대로 간화선看話禪을 해 보지 못했다. 선방에 앉아 가부좌를 튼 채 화두 하나를 들고서 고요한 삼매에 잠기는 그런 걸 해 보지 못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화두를 잡는다. 중장기적 탐구 과제로서 어떤 화두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어린 시절로부터 내가 잡는 화두가 꼭 불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선승들이 참구했던 그것은 아니었다. 이십대 초반의 나의 화두는 '처녀수태'와 '부활'이었다. '창녀'라는 화두와 더불어 그 화두가 풀렸다. 풀렸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숭산 스님의 '오직 모를 뿐'을 마음에 새겼다. 불가의 화두선을 참고하고 흉내내어 보지만 내 개인적인 화두참구의 방식은 선방의 명상보다는 황농문 박사님의 '몰입'과 더 닮았다.


이 글에서 논할 화두는 '이 뭣고'이다. 지금부터 '이 뭣고'와 관련한 개인적인 깨달음의 곳간을 여러분들께 열어 보여드리겠는데 밖에서 보이는 곳간 건물의 화려함에 비해 곳간 안에 저장된 것들이 값진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까 보아 두려운 마음이 미리부터 앞선다. 솔직한 마음으로 말씀드리건대 심오함으로 포장된 간화선의 곳간 그 안에는 그리 대단한 것들이 들어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 곳간 안에는 비유컨대 스님들이 입고 다니시는 넝마가 된 회색빛 승복 두어 벌과 독경을 할 때 보조를 맞추는 목탁 하나 그리고 매일같이 수지독송하는 때 묻은 소의경전所倚經典 그리고 밥 빌어먹을 바리때 정도가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머지 텅 빈 공간을 공空이란 말로 좋게 포장하면 그럴듯해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곳간의 빈 공간 공空을 강조하려면 글을 여기서 끝맺어도 되겠으나 이번 글의 전략은 무소유의 법정 스님보다는 풀소유의 혜민 스님 쪽으로 잡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이 뭣고'라는 화두를 들면 '이 뭣고' 그 자체만을 생각해야 할까? 그러니까 '이 뭣고'를 이루는 것, '이'와 '뭣'과 '고'를 분리하여 생각해 보고 세 음절이 합해진 의미만을 또 생각해 보면 될까? 그게 아니라면 '이 뭣고'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와 관련한 다양한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보아도 좋은 것일까.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할 때 대對하다 라는 것은 대상이 되는 바로 그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견주어서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자유롭게 떠올려 본다는 의미를 가진다. 청산靑山의 대가 되는 것으로 녹수綠水가 올 수도 있고 명월明月이 올 수도 있다. 색色에는 공空이 대할 수도 있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이 대할 수도 있고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이 대할 수도 있다. 색이 공은 아니고 공이 색은 아니지만 색이라는 개념은 공이라는 개념을 통해 파악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두 개념은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서로 대하여 생각했을 때 관련이 있음이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뭣고'를 생각할 때 '이 뭣고'가 아닌 다른 것을 충분히 생각해 보아야 하며 그것들 중에서 어떤 것을 제시하면 '이 뭣고'에 대하여 그럴듯한 의미를 구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야 한다. 불교 이야기를 한 김에 내가 즐겨 읽는 금강경의 한 부분을 소개해 보겠다.


無得無說分

무득무설분

須菩提於意云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느냐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而有差別

수보리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설한 뜻을 제가 풀이하기로는 정해진 법의 존재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합니다 또한 정해진 법의 존재가 없음을 여래께서 가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법하신 바는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해질 수도 없기 때문으로 법이 아닌 것이고 법 아닌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까닭은 일체의 현자와 성인은 모두 무위법으로써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 금강경의 내용에서 법法이란 무엇이고 비법非法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비비법非非法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비非 자는 아닐 비 라고 새기니 비법이란 법이 아닌 것이고 비비법은 법이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새겨야 마땅할 텐데 법이 아닌게 아니면 그것은 이중부정이 되므로 아닐 비 두 개가 서로 상쇄되고 단순히 처음 말한 법法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많은 독자들은 이처럼 생각할 수가 있겠다. 왜냐하면 어떤 집합의 여집합의 여집합은 원래의 그 집합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말이 맞지는 않는 것 같다. 그 말이 맞다면 굳이 법/비법/비비법 세 차원을 나누어 적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금강경의 저 구절이 뜻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나의 금강경 주해는 어떤 스님께도 인가를 받지 못한 혼자만의 망상이니 승가에서 말하는 정설이 아님을 염두에 두고 걸러 들으시길 바란다.


나는 위의 내용에서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의 법과 비법非法 비비법法의 법이 서로 다른 차원의 법이라는 설을 먼저 제시하겠다. 여래소설법의 법과 비법 비비법의 법이 같은 것을 지시하는 법이라면 법이 법이 아님이 되는 넌센스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에서 정해진 법의 존재가 없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데 그것을 세계사가 펼쳐지는 자연세계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하는 가르침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비법 비비법의 법이 지시하는 법은 그와 다른 법 예컨대 사회 변혁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이론과 같은 것이라고 해 보자. 꼭 마르크스의 실천 이론이 아니어도 좋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등電燈을 가능하게 했던 과학에 기반한 특정한 기술을 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인류 진보가 일어난 곳곳의 곳곳마다 그러한 법法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비법非法은 무엇인가? 법이 인류의 진보를 가능하게 한 실천 이론이라면 비법은 그것이 터한 생활세계 현실의 인간 역사이다. 그렇다면 비비법非非法이란 무엇인가? 비비법은 인류의 역사가 터하고 있는 자연세계 까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조금 달리 생각하여 비법이 법에 대한 반대라면 비비법은 반대를 지양한 자연스러운 법의 시행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무위법의 무위無爲 라는 말과 자연自然 이라는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가.)


어떤 스님은 내가 지금 이야기한 금강경의 한 구절에 대한 주해를 보고서 '이 뭣고'라 하실 수도 있겠다. 나는 금강경에 대한 여러 선지식의 주석을 열람해보지 못한 상태이며 따라서 내가 풀이한 주석과 같은 내용을 다른 누가 먼저 하였는지의 여부를 모른다. 사실 나는 위의 내용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를 불교 전통을 공부한다기보다는 서양 근대철학을 공부하며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돌아가서 '이 뭣고'라는 화두와 금강경의 내용에 대한 나의 주해를 어떻게 서로 연관지어볼 수 있을까. 앞에서 나는 화두참구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는 것이라고 먼저 말하였고 바로 그 대한다는 것에 대한 사례를 들고자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들었다. 법에 대하는 범위인 비법, 법과 비법을 합한 것에 대하는 범위인 비비법이 각각 무엇을 지시하는 것인지를 풀어 이야기해 보았다. 그렇다면 어떤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질문에 대하여 답한다는 것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고 할 때 화두참구는 어떤 의미를 갖겠는가?


나는 먼저 민주주의 시대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한 수사학과 화두 하나를 놓고서 그에 대하여 생각을 하여 보는 행위가 양 극에서 서로 대칭이 된다는 아이디어를 밝히겠다. 민주주의의 정치 제도는 좌와 우의 정치 세력끼리의 권력다툼을 세련된 형식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세련된 정치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정치세력간의 다툼이 내전의 수준으로까지 악화될 수 있다. 정치적 지향이 서로 다른 두 집단이 무장을 하고서 다투어 이기는 편이 지는 편을 (어떠한 의미이든)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권력투쟁을 스포츠로 비유하자면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이종격투기보다는 양궁에 더 가깝다. 원칙적으로 민주주의 정치 제도에서 서로 경쟁하는 다수의 당은 경쟁하는 정치세력을 향한 네거티브 전략을 지양하고 자신의 정책과 공약으로 그리고 정권을 획득했을 때 그 공약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로 평가받고 그것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힘을 이용하여 서로 때리고 굴복시켜 승리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정치의 전부라면 정치라는 방법으로 사회의 진보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살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민주주의 제도에서 정치에 뜻을 둔 사람은 권력획득과 동시에 다수에게 선택받기 위한 미래 비전과 실천 방안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카리스마를 갖춘 탁월한 대중선동가가 단숨에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히틀러라는 인물은 대중연설에 탁월한 선동가였으며 독일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수상이 되고 총통이 되었다. 민주주의 시대 대중연설은 보통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하나 현실을 진단한다. 대중선동가가 진단한 현실은 다수의 사람들이 만족하고 있지 못하는 나쁜 점이 만연해 있는 그러한 현실이라고 하겠다. 둘 그러한 현실에 처하게 된 원인을 설명한다. 현실을 진단하는 사회 이론을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현실적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셋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책임이 있는 원흉 타도해야 할 대상이 지목된다. 넷 그들을 타도하는 길은 자신이 정치적 지도자의 역할을 맡는 것이라 말한다. 이 모든 말을 펼쳐놓은 다음에 대중선동가는 청중들에게 묻는 것이다. 그래서 저를 뽑으시겠습니까 뽑지 않으시겠습니까?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런 현실이 발생한 이유 그 근본이 되는 원인을 반드시 멸해야 하고 그 방법이 이러한 것이다 라는 구도는 부처님의 고집멸도의 사성제의 가르침의 형식을 빌려와 봤다. 대중선동가는 비유컨대 고집멸도의 가르침을 내어 놓는 제가 귀한 대접을 받을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고통의 현실에 대해 적절하게 준비된 명쾌한 설명을 듣고 가부의 판단만을 내리면 되는 위치가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이라 하겠다.


한편 화두선의 경우 제시된 것은 '이 뭣고' 세 글자 뿐이고 알아내어야 하는 것은 '이 뭣고'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이유가 모조리 대중 선동가에 의해서 설명되고 자신이 알아내어야 할 것은 표를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마음 뿐인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은 화두참구의 정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선동의 수사학에 비교하여 화두참구의 정신을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에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위와 비슷한 대조의 사례를 영화감상과 고전읽기의 비교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영화는 관객을 사로잡아 중간에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영화관람을 다 마치고 난 후 그것이 좋은 영화였는지 아닌지의 판단만을 수용자에게 요구한다면 고전읽기는 그것을 읽는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딴 생각을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딴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책이 수준 높은 책이고 딴 생각에 많이 빠지는 독자가 고급의 독자이다.


'이 뭣고' 라는 화두를 들고 어떤 딴 생각에 빠질 수 있겠는가? 내가 주목한 것은 '이 뭣고'가 '이것이 뭣이여'나 '이게 뭐여' '이것은 무엇입니까'가 아니라 '이 뭣고'라는 사실이다. '이 뭣고'는 경상도 사투리이고 '이것이 뭣이여'는 전라도 쪽이며 '이게 뭐여'라고 묻는 것은 충청도 사람들이다. '이게 뭐지? 뭘까?' 라는 물음은 어떤 것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는 익명화된 대도시 사람들의 속발음이라고 하겠고 '이것은 무엇입니까'는 'what is this'란 물음을 한국어 문어체로 번역한 것이라 하겠다. 글을 쓰는 본인은 서울에서 태어나서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지역 사투리를 쓰지는 않는다. 다만 아버지께서 충청도 분이시고 어머니께서 전라도 분이시라 그 지역 사투리를 더 익숙하게 듣고 살아왔다는 점을 먼저 밝힌다.


전라도에서 윗사람이 '뭣이여'라고 물으면 보통 아랫사람이 '형님 그것은 어찌된 것인데요 이러이러해서 어찌하다 합니다'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경상도에서 '뭐꼬' 라고 물으면 '가가 그 때 그기서 뭐했어 가 그래서 지금 이리됐다 아입니까' 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충청도 사람이 하는 '뭐여' 라는 발화는 청자의 대답을 반드시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저 물음에 대한 충청도 사람의 답은 이런 식이다. '이 거기 누구 있제? 내 생각에는 그게 그런거 같어' 옆집 사는 사람들과 이웃이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집안의 대소사를 서로 공유하는 촌동네의 사람들일수록 '무엇이냐'는 물음을 서슴없이 잘 주고받는 편인 듯하다. 하지만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서울 경기도의 사람들은 다른 것 같다. 마주치는 사람은 많아도 아는 사람은 없는 익명의 도시 생활 '뭐지? 뭘까?' 하는 물음은 타인에게 발화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만 맴도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것이 뭔지가 궁금하면 스마트폰 검색창부터 켜고 보는 것이 요즘의 도시 사람들이다. 요즘은 편리하게 큐알 코드 라는 것이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왜 부끄러운 일인가? 이 차此 저 피彼 그 기其 에 대한 구분부터 해 보자. 두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나와 너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수 있다. 화자를 중심으로 하여 자신에게 가까운 것이 '이'이다. 둘 다에게 먼 것이 '저'이고 '그'는 화자와 청자가 공유하는 기억 속에 존재한다. 보통 자신에게 가까운 것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식별할 수 있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다. 손가락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거리낌없이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어린아이들 뿐이다. 그런 어린아이도 자신의 엄마가 아니면 그런 질문을 잘 하지 않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그 질문을 하지 않게 된다. 만약에 헬렌켈러가 귀가 들리고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이 물건과 저 물건을 만지면서 설리반 선생님께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만진 물건의 이름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뒤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장애를 가지지 않은 성인이 된 사람의 '이게 무엇이냐'는 물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테바이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어느 날 자신 앞의 사람들에게 대체 무슨 일로 모여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럴 수가!' 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를 법한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금강경에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금강경을 정확히 독해하였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금강경을 오독했을지라도 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가치있는 논의를 생산한다면 창조적 오독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관점을 가지고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면 한다. 아我는 나다. 인人은 남이다. 중생衆生은 그들이다. 수자壽者는 한평생을 말한다. 나는 앞의 셋을 공간에 대한 관점으로 바꾸어 생각하려 하고 뒤의 하나를 시간에 대한 관점이라고 생각해 보려고 한다. 전 문단에서 이/저/그 를 나누었다. '나'와 가까운 것이 '이'이다. '남'과 가까운 것이 '저'이다. '그들'과 가까운 것이 '그'이다. 이것은 공간에 대한 관점이다. 그리고 이 공간에 대한 관점과 그 변화의 양태가 '한평생'이라는 시간 축으로 꿰어진다. 영혼과 함수라는 이전 꼭지의 에세이에서 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영혼이라는 함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영혼의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였다. 금강경의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의 가르침은 시공간을 초월한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촉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이 글에서 말한 아 인 중생 수자는 원각경에 나오는 아 인 중생 수명의 개념에 더 알맞다. 금강경의 사상을 세간의 법집이라 하고 원각경의 사상을 출세간의 법집이라 주석 단 글을 이 글을 작성한 이후에 읽었다.)


손가락에는 이름이 있다. 첫째 손가락은 엄지 둘째 손가락은 검지 셋째 손가락은 중지 넷째 손가락은 약지 다섯째 손가락은 새끼 손가락이다. 그 중에서 검지는 영어로 index finger 라고 표기한다. 인덱스는 색인索引이라는 뜻이고 그것은 어떤 것에 필요한 정보를 밝힌다는 뜻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what is this?' 이 물음은 물음의 대상을 검지로 가리키면서 동시에 할 법하다. 눈 앞에 바로 보여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 '이것'은 무엇이고 눈에 보이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저것'은 무엇인가? 이것 저것과 구분되는 '그것'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아님에도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그 내용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일까? '나'는 누구이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너'는 누구이며 대화를 나누는 '우리'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져서 저기 보이는 '남들'은 누구이며 그 장소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와 '그녀'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의 한바탕 인생에서 '나' '너' '우리' '남' '그' '그녀' '그들'이 항상 고정되어 변치 않는 무엇이던가? '이것'과 '저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언제나 '검지'이지만 그 검지는 언제는 '달'을 다른 때는 '구름'을 가리킬 수도 있다.


사람은 '이'와 '저'만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그'에 대해서도 인식할 수 있다. '이'와 '저'의 인식은 시각에 의해 좌우되지만 '그'에 대한 인식은 청각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는 '여기'나 '저기'에 존재하지 않는 '거기'의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해들어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그랬대' 라는 이야기를 전해듣는 것만으로 우리들은 '그 사람'과 친해진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아니하는 상황을 눈 앞에 그려지듯이 실감나게 전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이야기꾼이라고 하며 청각으로 전달될 법한 여러 이야기들을 문자 텍스트화하여 적는 사람들을 문학가라고 부른다. 버클리 주교는 '이'와 '저'의 세계를 확신했던 한편 '그'의 세계에 대한 회의를 하였던 사람이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지 아니하는 '옆 마을'이 존재하고 있는가? '옆 마을'이라는 것은 버클리 자신이 발걸음을 옮겨 그 마을에 가 닿았을 때 그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자신이 그 마을에 가지 않았을 때에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자신이 옮기는 발걸음에 따라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세계가 새로이 생겨나서 인식되는 것은 아닐까? 한편 자신이 등진 세계는 어둠 속으로 소멸하고 있을지 그 누가 알랴?


물론 버클리는 이러한 의심을 해 보았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에 해당하는 세계가 암흑 속에 있다가 인식하는 자신에게 '이'와 '저'가 되었을 때에만 새롭게 생성하게 된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당장 보지 못하는 세계도 또한 존재하고 있으며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버클리를 전혀 읽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모른다. 지금까지의 내 논지를 요약해 정리하면 '나'와 가까운 곳이 '여기'고 여기에는 '이것'이 있다. '남'과 가까운 곳이 '저기'고 저기에는 '저것'이 있다. 이 둘은 목도한 사실과 관련 있다. '그'가 있는 곳이 '거기'고 거기에는 '그것'이 있다. 이는 전해들은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것'과 '저것'은 손가락으로 가리켜 지시할 수가 있다. 한편 '그것'을 아는 데에는 기억과 상상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것'과 '저것'으로 지시된 사물은 철학적 개념으로 어떻게 분류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개별자와 보편자의 개념이 여기서 나옴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지하주차장에 주차된 어떤 차를 가리키며 '이게 뭐야?' 라고 물으면 '차'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질문의 형식을 달리하여 '이거 누구 거야?'라고 물으면 '내 거'라고 답할 것이다. '내 거'에 해당하는 차의 차량번호가 '157하4356' 이었다고 해 보자. '157하4356'의 번호를 가진 차량은 현재 전 세계에서 '이 차'가 유일하다. 그 차량의 소유자가 자신의 차를 너무나 사랑하여 차에다가 '흑토마'라는 이름을 부여했다고 해 보자. 이 때 '157하4356'의 차량번호를 가진 '흑토마'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차주가 소유한 차량과 일대일 대응이 된다. '157하4356'의 '흑토마'는 철학개념으로는 개별자이다. 고추집보물의 명사 분류로 따지자면 '흑토마'는 고유명사에 해당한다. 한편 '이게 뭐야?'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제시된 '차'의 경우는 어떠한가? 답을 먼저 말하자면 '차'는 철학적으로는 보편자이고 명사의 분류로는 보통명사에 해당한다. '차'라는 보편자 보통명사에는 수많은 차량번호를 가진 제각각의 개별자로서의 차량들이 대응된다. 눈 앞에 보이는 실물로서의 차량1, 차량2, 차량3, 차량4가 있다고 하자. 그 차량이 모두 소나타라고 하자. 소나타라는 하나의 보편자에 차량1, 차량2, 차량3, 차량4의 개별자가 각각 대응된다. 소나타에는 현대차 로고가 박혀 있다. 현대차 로고가 박힌 다른 종류의 차량들이 있다. 캐스퍼 산타페 아반떼 그랜저 등등이다. 이것들은 현대차라는 상위의 개념에 대응된다. 현대차는 기아차와 같은 다른 자동차 브랜드와 더불어 한국차에 속하고 한국차가 아닌 다른 나라 브랜드의 차는 외제차로 분류된다. 그리고 한국차와 외제차를 합하여 여러 나라의 모든 차들은 결국 차에 속한다. 이것은 이정석이 사람이고 사람은 영장류이고 영장류는 포유류이고 포유류는 동물이고 동물은 생물인 것과 마찬가지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개별자는 '이정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실물의 사람을 말한다. 그 사람은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제 1의 실체는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무엇이고 그 밖의 보편적인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들 앞선 예를 들면 '사람' '영장류' '포유류' '동물' '생물'과 같은 것들은 제 2 실체로서 문장의 주어 자리에 올 수는 있다는 의미에서는 실체이지만 제 1 실체와는 그 종류를 달리한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가리켜 '이거' '저거'라고 지시할 수 있는 것들은 가로/세로/높이를 가진 무엇이겠으므로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구분에 따르면 물질적 실체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이거'라고 단숨에 지시하고 그 지시대상을 다른 사람이 단박에 하나의 개별자로서 인식하게 하는 인간의 능력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지금 내 '책상' 위에는 '금강경' 책 위에 나의 '스마트폰'이 놓여 있다. 어떻게 하여 나는 서로 붙어 있는 '책상'과 '금강경'과 '스마트폰'을 오랜 헤아림 없이 단박에 그것들이 따로따로 분리된 하나하나의 사물이라고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는 걸까? 서로 분리된 각 사물을 구분하여 인식하는 데에는 사물의 표면이 발하는 색깔이 구분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책상의 색깔과 책의 색깔과 스마트폰의 색깔이 다르다. 하지만 색이 다르다고 하여 그 색깔대로 모든 것이 달리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빨강과 파랑으로 분할된 태극기의 태극 문양을 하나의 것으로 인식한다. 빨강 색의 부분과 파란 색의 부분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형태 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이미지의 패턴이 비슷하면 고양이와 아이스크림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은 인공지능과 달리 고양이의 이미지와 아이스크림의 이미지가 서로 색이 비슷하고 어떤 면에서 색이 나타내는 패턴이 비슷할지라도 둘을 단박에 구분해 낸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감각 자료를 종합해 단박에 그것을 하나의 무엇으로 인식하는 능력이 있고 우리는 그 능력에 '직관'이라는 용어를 가져다 붙일 수 있다. 시각을 통해 직관적으로 인식 가능한 하나의 사물을 개별자라고 하겠고 그 제각각의 개별자들은 보편자의 개념들로 분류된다고 하겠다.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인식의 가장 기초가 되는 개별자와 그 개별자들이 대응하는 상위 개념들인 보편자로 파악될 수 있겠고 개별자와 보편자들 사이에는 서로 위계가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겠다. 위계를 가진 존재의 분류 체계에서 종種이 유類에 속함을 안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것을 유類와 종차種差를 이용하여 정의定義한 뜻이 드러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정의는 인간이라는 종이 동물이라는 유에 속하고 종으로서 존재하는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차이가 생각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의 여부라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하겠다. 섹스는 인간도 하고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도 한다.


그렇다면 개별자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유와 종의 위계로써 분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인간 인식의 근본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동일성과 차이 그리고 유사함의 세 가지 기준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바라보고 그것으로 상위의 개념들을 형성하여 분류한다는 데 있다. 이정석은 못생겼고 정우성은 잘생겼다. 서로 다르다. 이정석도 사람이고 정우성도 사람이다. 서로 같다. 동물원의 키키와 정우성은 서로 다르다. 키키는 원숭이고 정우성은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과 원숭이는 유사한 종이다. 사람과 원숭이 둘 다 영장류에 속한다. 이런 식으로 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그를 분류하는 개념들은 동일성과 차이 그리고 유사함이라는 개념의 틀로서 파악될 수 있다. 사물을 분류하는 원리로서의 동일성과 차이 유사함의 이 세 요소는 더 이상 상위의 무언가에 포함되지 아니하는 최상의 유에 속한다고 하겠다. 사람은 이 셋의 개념을 통해 모든 물질적 실체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존재들 또한 분류할 수가 있다.


한편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로 시작한다.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1.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1.11 세계는 사실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것들이 모든 사실들이라는 점에 의하여 확정된다.

1.12 왜냐하면 사실들의 총체는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그리고 또한 대체 무엇이 일어나지 않는가를 확정하기 때문이다.

1.13 논리적 공간 속의 사실들이 세계이다.

1.2 세계는 사실들로 나뉜다.

1.21 하나의 일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며, 나머지 모든 것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2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2.01 사태는 대상들(실물들, 사물들)의 결합이다.

2.011 사물에 본질적인 것은, 어떤 한 사태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만 베껴적겠다. 나는 논리철학논고를 진득하게 탐구한 적이 없으며 그 철학의 전부를 알지 못한 채 단지 내 주장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부분을 잠시 여기에 옮겨온 것에 불과함을 밝힌다.


지금까지 '이 뭣고'의 논의는 주로 '이' '저' '그'에 해당하는 아我 인人 중생衆生의 공간적인 의미와 그 공간에 속한 개별자로서의 사물 그리고 그 개별자들이 보편의 유에 속하게 됨과 유와 종을 파악할 수 있는 원리인 동일성과 차이 그리고 유사함의 세 가지 최상의 유들을 이야기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인식의 중심이 되는 것은 언어학의 품사로 따진다면 명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영문법의 예를 든다면 명사에는 고유명사 추상명사 집합명사 보통명사 물질명사가 있다. 명사는 시간의 흐름에 맞서서 변하지 아니하고 고정된 성질을 가진 것들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명사와 대비되는 동사의 경우에는 사건의 처음과 끝의 변화를 개념화시킨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명사들을 모두 합하면 그것이 하나의 세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에 적은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그와 다른 차원의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 즉 사실들의 총체이지 존재하는것 즉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는 선언은 세계가 명사들의 총 합이 아니라 명제들의 총 합이라는 뜻이다. 만약 세계가 명사들의 총 합이라면 세계는 스틸사진처럼만 존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는 한 컷의 사진이 아니라 움직이는 영화이자 드라마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프로필만 나열한다고 역사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변화를 서술하는 것이듯이 세계는 움직이는 무엇이며 명사와 더불어 동사가 포함된 명제가 세계가 무엇인지를 더 잘 알려준다고 하겠다. 사실을 말하는 것을 명제라 한다면 사실들의 총체인 세계는 명제들의 총 합이 되는 것이겠다. 명사들의 총 합으로 존재하는 아 인 중생의 공간적 배경에 수자상壽者相 이라는 시간적 요소가 결합되면 그 때 비로소 역사를 가진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을 '이 뭣고 라는 사건'으로 정해두었다. 제목을 그리 정한 이유는 이 뭣고 라는 말로써 명사에 해당하는 것들을 일별해 보고 사건이라는 말로써 시간의 차원이 덧붙여진 세계 즉 명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일단 사건event와 사실fact는 다르다. 인용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는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사건과 사실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이라고 드러난 사건은 사실에 속한다. 사건이란 시공간적 배경을 가진 일회성 이벤트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일회적인 이벤트가 일어났다는 것이 참이라면 그것은 사실이 된다. 한편 일회적으로 발생하는 이벤트가 아닌 영원한 진리로서의 사실이 있다. 이 세계에서 언제나 옳은 진리 예를 들어 '원은 중심에서 일정한 거리를 가진 점들의 집합이다' 라는 명제는 이 세계에서 두루 통하는 사실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뭣고 라는 사건' 이라는 제목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역대 조사들의 선문답들을 한 번씩 쳐다보게 된다. 선문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이 무엇인지를 정의한 명제와 같은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영원한 진리인가? 아니면 이 세계의 어느 순간 일회적으로 발생한 특정 이벤트의 기록인가? 만약 저 질문이 둘 중 하나만을 골라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혹시 양자를 모두 만족하는 그 무엇이지는 않을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이다. 영원한 진리들이 기초가 되는 사실로서 그 바탕을 이루고 그 바탕 위에서 일회적인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난 바로 이 세계는 진리들을 표현한 명제와 일어난 사건들을 표현한 명제들의 총체이다. 사실들의 총체인 이 세계를 집합 기호로 다음과 같이 표기할 수 있겠다.


이 세계 ={사실1, 사실2, 사실3, 사실4, 사실5, ... 사실n, 사실n+1, ...


지금 나는 기침을 한지가 3주차에 접어들고 있다. 나는 내가 걸린 질환이 내 신체의 자연치유능력으로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침을 함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방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침을 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나는 문득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최근에 병원에 방문하게 되었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보니 폐에 염증이 있었고 폐렴으로 악화될 가능성 또한 있다고 하였다. 병원 처방에 따라 약을 먹으니 병이 금세 낫는 것 같았다. 나는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후회하는 마음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기침을 하게 된 초기에 일찍 병원에 방문했다면 나는 빨리 병에서 해방되었을 텐데'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내가 병에서 빨리 해방되지 못한 이유는 초기에 일찍 병원에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과관계의 표현이다. 여기서 '초기에 일찍 병원에 방문했다'라는 사건을 사실k 라고 해 두자. '빨리 병에서 해방되었다'는 사건을 사실l 이라고 해 보자. 사실k와 사실l은 위에서 규정한 '이 세계'에서는 발생하지 않은 일이다. '초기에 일찍 병원에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k와 '빨리 병에서 해방되지 않았다'는 ~사실l이 '이 세계'에 속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사실들은 '이 세계'의 사실들과 일치하지만 사실k와 사실l만이 ~사실k와 ~사실l로서의 이 세계와 반대가 되는 그런 사실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그 세계를 '이 세계와 아주 조금 다른 가능세계'라고 이름하여 보자. '이 세계와 아주 조금 다른 가능세계'에서의 나는 다른 사실들은 모두 동일하지만 '병원에 빨리 가서' '병이 일찍 나은' 사람으로서 기침을 하며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나보다는 좀 더 행복한 누군가일 것이다. 물론 가정한 두 세계가 위에서 말한 단 두 개의 사실만이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병에서 빨리 회복된 세계의 나는 그 사실이 영향을 미쳐 그 이후의 많은 사건들이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능세계가 '이 세계'와 아주 많이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세계'와 조금 더 많이 다른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인가?


'이 세계'를 이루는 수많은 사실 가운데 사실p에 대응하는 것이 1 + 1 = 2 라는 명제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사실p 대신에 사실p'를 원소로 갖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해 보자. 사실p'는 1 + 1 = 10000 이라는 명제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사실p 대신 사실p'를 원소로 갖는 가능세계는 '이 세계'와 얼마나 많이 다른 세계인 것일까? 그 세계는 편의점에서 원 플러스 원 상품을 구매하면 집에 만 개의 제품을 들고 가야 하는 세계일 것이다. 원 플러스 원을 사면 물건을 만 개를 들고 가야 하는 세계는 일찍 병원에 가서 감기가 빨리 나은 세계보다 현실의 '이 세계'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마법학교에서 빗자루를 타고 다니며 마법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내는 '그 세계'는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것일까?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기차역 9와 4분의 3 승강장이 멀리 떨어진 두 세계를 단박에 이어주는 통로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 누군가는 훗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이 뭣고 라는 사건'의 제목을 가진 에세이를 읽지 않았더라면 철학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을 텐데' 만약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자신이 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세계일 것이며 그 세계 속의 그가 철학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이 뭣고 라는 사건' 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읽었던 것'이겠다. 한편 그는 다른 어떤 가능세계를 상상하여 볼 수 있는데 그 가능세계에서 그는 이 에세이를 읽지 못했겠고 그리고 철학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다.


많은 문학작품의 발상이 '이 세계'를 이루는 수많은 사실들 중 몇몇을 부정하여 달리 생각하여 보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만약 보통의 사람보다 7배의 키를 가진 거인국이 있고 그곳에 가게 된다면. 보통 사람의 1/7의 키를 가진 소인국에 가게 된다면.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인 조너던 스위프트는 이 세계의 현실과 반대되는 어떤 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재미난 이야기들을 적어 냈다. 한편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역사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수많은 가정을 시도해 보는 사람들이다. 역사 서술은 인과관계로 꿰어져 있고 그 인과관계의 인식은 사실과 다른 가정을 하여 봄으로써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뉴 라이트들은 '만약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라는 물음과 더불어 그 물음에 따라오는 여러 그럴 법한 가능세계를 상상하여 보고 그 가능세계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대한민국 이 세계보다 못하다는 판단 하에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국부 건국 대통령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해석하기 위해 가능세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한편으로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사건을 짐작해 보기 위해 가능세계를 활용해 볼 수도 있다. 핵무기의 전쟁 억제 능력을 논한 '상호확증파괴이론'은 핵무기가 사용되었을 때의 가능한 세계를 상상하여 본 결과 정립된 그럴 법한 이론이다. 조선 시대의 '예송논쟁' 또한 왕실의 장례 예법에 관한 사실을 어떻게 정하는지에 따라 서로 달라질 수 있는 두 가능세계를 상상하여 누구의 결론이 법도에 맞는지를 다투는 과정이었다. '그럴 듯한' 여러 세계를 우선적으로 그려 볼 수 있겠고 그 중에서 하나의 '그럴 법한' 세계가 정해진다 하겠다. 상호확증파괴이론과 예송논쟁은 여러 그럴 듯한 세계에 대한 상상에서 하나의 그럴 법한 세계를 생각해낸 것이다. 그렇다면 불경에서의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명상이란 무얼 말하는가? 만약 어떤 사람의 생각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명상에 고정되어 집착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세계'만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된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명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 인 중생 수명의 네 차원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사실명제를 배반하는 가정들을 자유롭게 해 볼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이 세계'만이 아닌 다른 가능세계를 생각해 봄으로써 '그 세계'의 모습을 그려 보고 '그 세계'가 '이 세계'나 '저 세계'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가지고 떨어져 있는지를 가늠해 보라는 뜻이 아닐까? somewhere over the rainbow 어딘가 존재한다고만 여겨졌던 '그 세계'가 어느 시점에 '저 세계'로서 비 개인 오후 하늘에 걸린 무지개와 같이 아름다움의 외피를 쓰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고 해 보자. 차안此岸에 머무는 우리들의 메마른 가슴에 피안彼岸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열망의 불꽃을 지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생생하게 그려지는 아름다운 이상향의 모습을 노래하는 소리가 아닐까?


그래서 '이 뭣고' 라는 화두는 아름답게 들리던가?